어떤 인생이 가치 있는 인생일까?

영화 ‘리빙: 어떤 인생’

by 김승희

‘리빙: 어떤 인생’이라는 제목에서 어떤 인생의 영화인지 호기심을 갖게 된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누군가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버거울 수 있지만 타인의 인생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성찰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한 발짝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조금은 빛이 나지 않을까?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이키루(살다)’를 리메이크한 영국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은 1950년대 런던시청의 공무원인 로드니 윌리엄스(빌 나이)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민원인의 요청인 놀이터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며 결국 그 일을 성취하고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다.


1. 로드니 윌리엄스의 건조한 삶 그리고...

런던시청의 공공사업과의 과장으로 있는 윌리엄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살아간다. 아내를 잃은 후 결혼 권유도 있었지만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았는데 아들 부부는 아버지의 집에서 분가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기에 윌리엄스는 좀비처럼(함께 일했던 여직원이 붙여준 별명) 살아도 죽은 자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기차를 타고 출근하며 기차 안에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이 타고 있지만 결코 그 칸에는 오지 않고 민원들의 요청에도 사무적인 반응으로 대해 애써 책임지려 하지 않으며 웃음기 없는 얼굴에, 감정도 없이 그냥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던 그의 삶에 흔치 않게 조퇴를 하게 되는 날, 그는 병원에서 청천벽력의 소리를 듣게 된다. 6개월. 길어야 8. 9개월 정도 살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평범한 일상을 살던 순간에 갑자기 닥쳐오는 인생의 위기, 그것도 얼마 남지 않고 죽는다면 그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바로 이 물음 -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우리에게 던진다. 특히나 어느 순간 기계처럼 살아왔고 어딘가 아프다는 의식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면 아니 행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순간을 송두리째 외면당하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충격과 그 허망함을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라면 언젠가 닥쳐야 하는 그 죽음.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 앞에 막연한 생각이 아닌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이라면 어떻게 남은 삶을 이어가야 할까? 가장 근원적인 것 중의 하나인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 것일까? 그 죽음 앞에서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 그 삶이 빛이 나고 의미가 있지 않을까?


2 죽음 앞에 선 윌리엄스 그리고 우리는?

충격을 받은 윌리엄스. 불 꺼진 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윌리엄스는 그날 밤 아들 부부에게 이 사실을 말하려고 했지만 분가하려 한다는 말을 엿듣게 되고는 아픈 사실을 숨긴 채 다음 날 출근하지 않고 돈을 갖고 휴양지에 간다. 마지막 남은 삶을 즐기기 위해 그러나 어떻게 즐길 줄 모르는 윌리엄스는 휴양지에서 극작가 서덜랜드를 만나 술도 마시고 오락실도 가고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출근을 안 하고 거리를 걷던 윌리엄스는 우연히 함께 일했던 여직원 해리스를 만나게 되고 이직하는데 필요한 추천서를 써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그녀와 여기저기를 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출근을 하지 않고 아픔에 괴로워하던 윌리엄스가 해리스가 일하던 직장을 찾아간다. 그녀와 영화를 보고 헤어지기 직전 통증을 느낀 윌리엄스는 좀 더 함께 있자고 얘기한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오해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하자 윌리엄스는 그런 것이 아니라며 그녀의 밝고 명랑하게 삶을 즐기는 모습을 닮고 싶었다고 하고는 아들에게도 알리지 못했던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지난날 평범한 신사가 되고 싶었다던 그는 그런 신사가 되고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당신을 보니 살아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그냥 이렇게 끝나는 것이 될까 두려워졌다고 한다. 마치 놀이터의 아이들 중 엄마가 오기를 바라며 놀이터 한 구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자신과 같다며 그렇게는 살지 않았으면 싶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붙잡았던 자신을 용서하라고 얘기하고 자리를 뜬다. 그리고 다음 날 오랜만에 시청으로 출근한 윌리엄스는 오랫동안 여러 번 체스터가의 여인들이 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된 그곳이 위험하다며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던 그 서류를 찾으며 그 일을 하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체스터가를 찾는다.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원했던 그 일은 그 이전에 공원과, 환경미화과로 시청 직원들이 미루며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었던 책상 위에 가지런한 서류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렇게 도저히 안 될 것만 같았던 놀이터를 만들기 위한 윌리엄스의 눈물겨운 노력은 계속되고 미안할 시간도 없다며 그는 그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마지막 삶을 불태운다. 주변의 사람들을 찾아가고 부탁하며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쓴 윌리엄스의 노력 끝에 결국 그는 놀이터 만드는 일을 마무리하고 생을 마감한다.


영화는 이 모든 순간을 시간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먼저 보여주고 그가 마지막 해냈던 일들을 찬찬히 보여준다. 그가 놀이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윌리엄스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시청 직원들이 윌리엄스가 행했던 모습을 생각하며 그가 시한부 삶을 살 줄 알았을까 생각한다. 그랬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달라진 윌리엄스를 떠올리며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그의 교훈을 닮자고 책임을 미루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다시 민원인이 무엇인가를 요청했을 때 옛날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공공사업과의 사람들을 보며 이곳에 신입으로 들어왔던 웨이클링이 윌리엄스와 함께 만들었던 놀이터를 찾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받았던 윌리엄스의 편지를 생각한다.


‘우리가 만든 놀이터는 사소한 일이고 그것은 또한 뭔가에 의해서 영구적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어떤 목표를 위해 매일 애쓰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날들이 찾아온다면 무엇보다 일상에 지쳐 오랜 시간 내 발목을 잡았던 그런 상태가 되어 당신도 움츠러든다면 우리의 작은 놀이터가 완성된 순간 느꼈던 소박한 보람을 떠올려 보길 바랍니다’


편지와 함께 놀이터에서 눈을 맞으며 그네를 타고 로먼 트리를 부르는 윌리엄스의 행복한 모습을 떠올리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타인을 위한 나눔의 삶으로 그리고 웨이클링에게 남긴 그 순간의 보람을 떠올리라는 글을 남기며 윌리엄스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남겼다. 다른 어떤 것보다 편지의 내용은 영화를 보는 나에게 가슴 깊이 다가오며 나의 삶이 어느 순간에 직면해 있더라도 그 순간의 보람을 기억해야지라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런 마음이라면 어떤 일을 할 때도 또한 최선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인생이 의미 있는 인생이라고 바로 단언할 수 없지만 영화를 통해 보여준 윌리엄스의 삶을 들여다보자면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며 나누는 삶, 그 삶이 빛이 나고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비록 그 일이 큰 어떤 일이 아니라 사소한 일이지라도. 자기 이익만을 위해 창고에 뭔가를 쌓아 놓거나 오로지 나의 자녀를 위해 뭔가를 남겨 놓은 것.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나 혼자 살기도 바쁘고 가난과 연약함 속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겠지. 누구나 각자의 상황 속에 있기에 무엇이 더 나은 삶이냐를 따지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한 번쯤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이고 의미 있는 삶인지. 죽음 앞에 겸허하게 돌아봤으면 좋겠다.


가치 있는 삶이란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이고, 분명히 자신도 누군가에게도 미소 짓는 일이라 생각한다. 순간순간 살아 있다고 느끼지만 순간순간 살아 있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다. 이렇게 살다가 ‘그냥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때로는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더군다나 일에 묻혀 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이렇게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그래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살아 있음을 더욱 느낄 수 있는 의미 있는 것을 바라보면 좋겠다. 누군가의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큰일이 아닐지라도 가족을 이웃을 돌아보고 주변을 바라보며 나의 연약함도 쓸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보는 내내 왜 윌리엄스는 끝내 가족에게 자신의 아픔을 알리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아들을 아끼지만 그만의 고민이 있고 그만의 삶이 있다는 말을 윌리엄스가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안타까움은 남는다. 남겨진 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가족들에게 알리는 것보다, 남겨진 이의 아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영화는 1950년대 그 시절 시청의 모습, 책임을 전가하며 회피하는 공무원들, 직장 생활 등등 스토리 전개상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영화는 볼거리와 생각할 것들을 담고 있다. 그 어떤 것이든 영화를 보고 마음 깊이 생각할 수 있다면 또 하나의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지 않을까. 영화를 보면서 그 즐거움을 매번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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