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 2월 11 - 12일
2/11 22:00 신도림 출발
2/12 03:45 질매재(우두령,720) 출발
05:00 삼성산(985.6봉)
06:00 여정봉(1,030)
06:30 바람재(810m헬기장) 4.45km
07:30 황악산 비로봉(1111m) 2.85km
08:00 백운봉-아침식사
08:30 식사후 출발
08:40 (직지사갈림길)운수봉(670)
09:00 여시골산
10:00 궤방령(310m) 5.55km
12:30 가성산(716m) 4.25km
13:10 장군봉(616)
14:00 눌의산(743m) 3.03km
15:30 추풍령(210m) 3.61km
23.74km 11시간 45분
2월 11일_토_22:00
신도림으로 향하는 설렘, 한 달 여 만에 나서는 대간 길이다. 무척 기다려지던 일정이라 오후 내내 배낭을 꾸렸다, 열었다 하며 시간을 보낸다. 구정 지나자마자 일주일여 동남아 여행을 한 탓에 추위가 걱정되기도 한다. 다행히 새벽 기온이 그리 많이 내려가진 않을 것 같아 안도하지만, 물푸레의 걱정에 따라 자꾸만 옷가지가 하나씩 추가된다. 이달 말에 임관하는 작은 녀석이 대간 길에 한 번쯤 동행하고 싶은 눈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부디 대학생활의 보람을 잘 간직하여 무사히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스스로 찾아 떠날 넓은 세상에서 한없는 인생을 설계할 수 있길 바란다.
신도림역 간이식당에서 순대국밥에 이슬이 한잔으로 영양보충(?)을 끝내고 산행 버스에 오르니 오랜만에 대하는 대간 산우들의 활기찬 모습에 정겨운 손을 맞잡는다. 이제 두세 번의 겨울 산행을 마치고 나면 봄날의 속리산을 향할 수 있으리라. 부디 건강한 몸으로 연말까지 낙오자 없는 대간 종주의 꿈을 함께 이루고 진부령에서 환히 웃으며 브라보를 외치기를. 2월 한 달 동안 신협 운동에 몸 바치며, 대간 길에 함께 하지 못하는 한 대장님의 선전을 위하여 박수를 보낸다.
시흥을 지나 한 밤의 경부고속도로를 달린 산행 버스가, 영동 톨게이트를 지나고 우두령 생태이동 통로 터널에 조용히 닿는다.(02:15)(901번, 영동 상촌-김천 부항) 1시간 정도 잠을 더 청한 뒤 산행 준비를 위해 밖을 나갔다가 세찬 바람에 얼른 차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질매재(길마)의 말안장 모습은 터널로 사라졌지만 자연 생태 보호를 위한 노력이 좋게 보인다. 비좁은 차량 속에서 산행 준비를 분주히 마치고, 바람막이 외투를 껴입은 채로 밖을 나서지만 바람 소리가 귀를 때린다.
2월 12일_일_03:45
재빠르게 아이젠을 착용한 대간 산우들은 평소의 준비운동도 생략한 채, 세찬 바람을 피해 숲으로 몸을 숨기려는 듯이 오른쪽 능선을 타고 오른다. 모처럼 기온이 오른다는 오늘 새벽도 그리 편하게 지날 수는 없는 대간 길이다. 아무쪼록 며칠 전의 폭설에 발자국이라도 남아 러셀에 도움을 주길 바라며 선두 조의 발걸음이 힘겹게 십여분을 밟아 오르니 다행히 앞선 몇 개의 발자국이 길을 인도하며 비교적 지그재그가 심하지 않을 만큼 러셀이 이루어진다. 항상 그렇듯이 서쪽 사면에서 불어 올리는 세찬 바람으로 대간 마루금과 동쪽 사면은 적설량이 많고, 러셀은 서쪽 사면으로 치우치니 왼쪽 관절도 영향을 받고, 더더욱 맞바람에 매우 힘이 든다.
이십여분 비교적 가파른 시작을 치르면서 땀이 배이긴 했으나, 멈추지 않는 바람 탓에 외투를 벗을 엄두도 내질 못한다. 눈에 덮인 헬기장을 지나고 이후 삼성산(985.6,05:00)까지의 평탄한 오름 속에서 잠시나마 고개를 들어 왼쪽 궁촌 마을 위를 지키는 정월 보름달을 돌아보기도 하지만, 갈참나무 성긴 가지들 사이로 오락가락하며 생각보다 환하지를 않다. 음력설을 쇤 보름 동안의 풍요로운 시골 사랑방이 그립다. 보름달 아래 뛰놀던 쥐불놀이가 지칠 즈음에, 새끼 꼬는 짚 냄새 속에서 화롯불에 떡가래라도 구워 먹으면 살짝 얼음 진 동치미 국물이 제격이겠지.
삼성산을 지나 잠시 내리막에서 바람을 피하는가 싶더니 다시금 여정봉(1,030) 우회길에 이를 때까지도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댄다. 기온이 그리 낮지 않을 것 같아 보온하지 않은 물병이 꽁꽁 얼어붙어 오늘도 가지 위의 눈으로 갈증을 때운다. 이번 눈은 가루눈이라 한주먹 쓸어 입에 넣으면 아이스크림처럼 제법 씹히는 맛이 있고 솔향내가 일품이다.
눈에 덮인 비포장도로를 지나 바람재 헬기장에 다다르니(06:30) 이름처럼 바람이 춤을 춘다. (舞風嶺) 아무래도 이번 구간은 눈과 바람으로 이어질 것 같다. 강풍 속에서 선두 조는 쉴 새도 없이 이미 떠난 것 같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후미조를 기다리나, 인원수에 비해 오늘 행렬은 길어지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황악산 정상으로 발길을 옮긴다.
2월 12일_일_07:00
여명이 밝아오는 황악산 정상 비로봉 오름길에서 삼십여분의 가파른 오름을 헐떡이다 보니 어느새 동쪽 하늘에 붉은 띠가 쳐지며 아름다운 일출을 예고한다. 신선봉 갈림길을 지나 십여분 만에 형제봉을 단숨에 지나치고,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지만 어차피 정상 부근에서의 아침 식사는 힘들 것 같고, 갑자기 허기를 느낀다. 강풍은 여전하고 별로 갈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가올 한 여름의 더위를 생각하며 다행이라 생각해 본다. 위로는 스스로 만들 수도 있으련만, 우리가 찾아가는 행복이나 자유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는 것일까.
다행히 러셀이 지그재그를 크게 이루지 않고, 비록 적설량은 많으나 고운 가루눈이 잘 다져지는 탓에 눈길 산행에 큰 어려움이 없다. 선두 조는 삼십여분 앞서가는 모양이다. 계획된 시간으로 진행할 수 있으니 남은 긴 산행을 위하여 조금씩 페이스를 늦춰가며 바람이 잦아들길 바라본다. 앞뒤가 잘라진 행렬에서 홀로 새벽의 여명을 즐기며, 망부석(望夫石)을 떠올리는 바위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기다리다 돌이 된 사랑의 여인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새벽의 꿈이라도...
이 깊고 거친 바람의 터널 끝에는 어떤 평온이 가져다 줄 자연이 있어,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뒤엉키며 힘든 고통 속에서 참고 견디는 과정으로 끝나는, 하산 시점에서 느끼는 모두의 완성을 위해 손뼉 치는 기쁨으로 만족할 것인가.
가까이 다가서는 황악산 정상(1,111m, 비로봉)이 밝은 햇살과 더불어 푸르게 푸르게 빛난다.
2월 12일_일_07:30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 하지만 밤새 계속되던 북서풍이 이곳에서 절정에 다하려는 듯이 더욱 기세 좋게 눈가루를 휘몰아치며 춤을 춘다. 다행히 날씨는 맑아 떠오르는 햇살에 눈이 부시도록 은빛 가루들이 주위를 감싼다. 밤새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던 김천 시가지가 화려한 기지개를 켜며 도시의 아침을 가까이서 보여준다.
오른쪽 직지사 방향으로 돌아 내려오는 삼십여 분간의 내리막 길이 매우 가파르다. 눈 쌓인 북사면의 내림길에서 왼쪽 무릎의 바깥 인대가 계속되는 디딤으로 약간 통증이 시작되며, 대간 초기 남덕유의 악몽이 되살아 난다. 아직 갈길이 멀고, 유난히 직벽 내림길이 많은 이번 구간인데. 백운봉(770) 안부에서 선두를 놓친 채 허기진 배를 잠시 채우며 아침식사를 서둘러 마친다. 이번 구간에선 각자 흩어진 행렬에서 간단한 식사로 시간을 줄이고, 다시 하산 길에 나선다.(08:30). 10여분 비교적 잘 정비된 내리막 눈길을 밟아 내리니 오른쪽 직지사 갈림길에서 식사를 끝낸 선두 조를 만나 뜨거운 물 한잔을 얻어 마신다.
아도(阿道) 스님의 전설처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저기가 큰 절이...."(418년, 신라 눌지 2년) 아래쪽 직지사 지붕들을 구경한 것으로 만족하고 이어지는 운수봉(670) 능선을 가볍게 올라서니 여시골산이 우람하게 다가오며 바로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괘방령 매곡면(영동)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여시골산까지의 삼십여분은 비교적 바람도 잦아들고, 평탄한 숲길로 이어져 낮은 산의 푸른 솔숲이 황량함을 덜어준다. 한적하리 만큼 조용한 트래킹을 즐긴다.
톈산 고원지대로 넘어가는 햇살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지는 우즈벡의 오후는 생동감이 넘친다. K노인의 지도에 따라 조립 결착구를 신기하게 끼워 맞추고 풀기를 거듭하며 긴 K3 형강을 이어가는 농부들의 손길이 제법 숙련공처럼 바삐 움직이며, 앞으로 생겨날 그들의 현대식 농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감동의 첫날을 익히며 즐겁게 움직인다.
몇몇 소비에트 농장에서 일본식 간단한 결착구를 이용한 파이프 골재의 비닐하우스를 경험한 바 있으나, 별도의 밴딩이 필요 없이 연결 결착구를 이용하여 비교적 짧은 형강들을 연결 지어 이루어가는 긴 터널형 하우스에 매우 흥미롭고 신기해하며 스스로 지은 형태에 매달려 보기도 한다.
오전 한나절 교육으로 벌써 익숙해진 몇 명의 지도하에 협력 조립의 손발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감을 확인한 후에 K노인은 먼저 공구들을 챙긴 후 타쉬겐트 호텔로 향하는 승용차에 몸을 싣는다. 늘 따라붙어 구경하는 내게 싱긋 눈웃음을 보이며 벌써 저녁나절의 한 잔을 기다리는 눈빛이다.
“해방, 전쟁.. 모두 젊은이들에겐 엄청난 정신적 시련을 준건 틀림없어.. 헌데 말이야.. 다 뒤집어지고 까부숴진 전후의 한국 땅에서 새로이 먼저 나설 수 있는 젊은이들에겐 어쩌면 신나는 기회의 장이 될 수도 있었지.“
타쉬겐트로 향하는 찻 속에서 시작되는 K노인의 전쟁 후 50년대 후반의 서울은 그러했다. 혼돈과 파괴 속에서도 다시금 대등한 스타트 라인에 서서 출발 신호를 맞은 의욕적인 젊은이들을 새로운 기회의 장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단지 각 분야 중에서도 유난히 정치 쪽으로 시끄럽게 몰려 이승만의 자유당에 대항하여 민주세력의 결집을 주창함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정치와는 무관하게 폐허 속에서 고철과 먹거리를 취급하는 장사를 필두로 작으나마 기업의 터전을 착실히 챙겨가는, 일찍 눈뜬 젊은 세력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그 당시 K노인은 30대 후반의 마지막 젊음을 새롭게 가꾸고 있었다. 아픈 시련을 깊이 묻은 채 두 아이를 보살피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살림을 보살피는 아내를 위하여, 보다 복된 가정을 꾸미고 싶은 맘이야 어느 누구 못지않게 바램으로 늘 가슴속에서 가득하였지만, 정릉 계곡 비탈 위 허름한 판자집으로 퇴근하는 그의 발걸음 뒤에는 낮 동안의 민족과 정치라는 공허한 말씨름들이 배고픈 가장의 족쇄처럼 길게 늘여 따라붙었다.
항상 그랬듯이 그에게 주어진 지식인의 굴레는, 나약하고 용기 없는 피해자로 내몰리기에 적당한, 안주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역사 현실 속에서 행동을 잃어버린 박제로 굳어 갈 수밖에 없었다.
2월 12일_일_10:00
괘방령 977번 도로를 빤히 내려다보며 내려 밟는 직벽 하산길은 녹은 빙판이 눈에 덮인 채 매우 위험하다. 아이젠을 디뎌 밟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고 30여분의 하산길에서 양쪽 무릎이 통증을 느끼며 심각해진다. 선두 조는 물론 후미조도 보이지 않는 하산길에서 한걸음 한걸음이 완전 노인 걸음이다. 가까스로 눈 덮인 비포장 농로에 내려서다 삐져나온 아이젠 철사 고리에 반대쪽 발목 스팻츠가 걸려 두 다리 묶인 형태로 곤두박질을 치고 만다. 탈출을 고려해 본다.
괘방령 도로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에어파스로 응급처치를 하고 나니 무릎 통증은 덜하지만 지도상으로 남은 거리가 5시간은 족한데, 망설여지지만 방법이 없다. 그냥 올라서는 수밖에. 멀리 가성산이 유난히 높아 보인다. 다행히 한벌 더 준비한 아이젠으로 갈아 신고 십여분 휴식을 취하고 나니 그런대로 걸을 만하다.
가까이 올려다 보이는 가성산 초입까지 공수리 오리골을 크게 우회하며, 대간 마루금은 삼십여분을 나지막한 참솔 숲길을 제공하며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게 한다. 여시골산과 뒤를 이루는 황악산 내림길이 무척 힘겨웠던 한두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저 길을 다시 올라가는 역산행을 해 볼 것인가.
잘난 관료들이 넘나들던 추풍령을 피해, 과거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이나 상인들이 넘나들던 괘방령 어둔이 마을이 평화로운 정경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심오한 지성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어설픈 시도를 하다 사그라지는 박사님들, 자기들의 노력을 더하는 척하는 인류의 선생님들은 어느 길을 즐겨 찾을까. 차라리 작은 꿈을 찾고 본능적인 열망과 진정한 욕구를 찾아 떠나는 촌로들의 실천적인 정신이 걸어갔던 저 길이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2월 12일_일_12:00
가성산 남쪽 오름길은 모질게 따라붙던 바람마저 사라지고 봄날처럼 따사롭고, 쉬엄쉬엄 가파른 오르막을 한 시간 남짓 올라서니 가성산 정상 아래 안부에 다다른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물병을 흔들어 보지만 한번 얼어붙은 생수가 좀체 녹으려 들질 않는다. 정상이 다가오며 바람이 다시 조금씩 일기 시작하고, 추위에 녹지 않은 북동사면의 눈길이 이어진다.
정상 부근을 장식하듯 이어지는 눈 쌓인 암릉들을 이십여분 조심스레 밟아 오르니 억새 숲으로 꽤 넓게 펼쳐진 채 눈에 덮인 시멘트 포장의 가성산 정상에서 숨을 고른다.(12:30) 오른쪽으로 경부선 철로와 고속도로가 시원스레 펼쳐지고 지난날 숱하게 오르내리던 귀향길이 떠오른다. 고교 졸업 후 상경한 이후로 삼십 년이 훌쩍 넘도록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추풍령 고개를 오르내리며, 서울과 고향이라는 끈을 놓지 않은 채 쌓여만 간다. 문득 대학 입학 기념으로 형님께서 선물한 파란색 숫자판의 손목시계가 떠오르고 혜화동 어느 중국집에서 일찌감치 제 갈길을 찾은 추억으로 피어난다.
갑작스런 변화 속에서 소녀시절의 충격을 경험한 딸아이는 새엄마의 손에서 다행히 조금씩 웃음을 찾아가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며 곧잘 집안 살림을 도울 만큼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가끔씩 생기는 알지 못할 정치자금에서 떼어주는 생활비를 아내에게 전하는 날은 K노인의 술 취한 노랫가락이 정릉계곡 한 귀퉁이에 구슬퍼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밤새 이슬에 젖으며 산기슭을 헤매며 달렸다..
사라진 무엇을 찾는 듯이....
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K노인은 유림 선생으로부터 새로운 정신을 배우며, 스스로의 나약함을 질책하고 보다 뚜렷한 주장을 만들기 위해 고집을 살려나가고 있었다.
“훗날 단주(유림) 선생을 가리켜, 철저한 독립운동가니, 가족의 인연마저 외면한 곧은 민족주의자니 하고 치켜세우는 듯한 찬사들을 쏟아 놓았지만, 실제로는... “
직접 유림 선생을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며 함께 배고픔을 견뎌 낸 K노인은 한 독립 혁명가의 인간적인 고뇌를 느끼며 역사 속의 정치사상이 만들어 내는 공허한 이론들에 회의를 느낀 적도 많았다.
“선생이 주장하던 자유는, 단순히 정부를 거부하는 이기적인 그런 게 아니었어.. 단지 대개의 권력이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쁜 쪽으로 변해 갔고.... 해방 후 이승만이도 그랬고.... 김일성이도 마찬가지고...... 우리 모두를 생각했지... “
그의 아나키즘은 어쩌면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담아 소위 자유민주주의라는 미국식 자본주의 이론에서 미움을 받는 구실이 되었다.
또한 그가 존경하던 맑은 정신의 노동자, 농민들을 혁명으로 내몰아 계급적인 지배를 꿈꾸며 또 다른 권력으로 지배하는 공산주의와는 더더욱 협력할 수 없는 그의 사상 속에서, 해방 후 이 땅에 공동체적인 자유를 꿈꾸는 비 현실주의자로 비춰졌음은 일찍 사라진 민족주의자들의 한계로 남았다.
한때는 그러한 유림 선생의 발표문들을 받아 적으며, 현실정치를 거부하는 선생을 따르는 많은 동지들의 이해 못할 정열에 고민의 시간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30대의 마지막 젊음을 혁신을 구호 삼는 비현실 정치인들 속에서 지낼 수 있었음은 오히려 결단력 없이, 서둘지 못하는 그의 성격 탓인지도 몰랐다.
가성산 정상에서 장군봉으로 향하는 오른쪽 내림길에서 또 한 번 아찔한 긴 직벽 내림을 겪고 나서 점점 산행 속도는 느려진다. 유난히 오르내림이 잦은 이번 구간에서, 눈길의 긴 내림길이 무릎을 힘들게 한다. 차라리 오름길은 편하게 느껴진다. 느린 걸음으로 장군봉을 지나고 686봉을 거친 후 마지막 눌의산 정상 오름에서 이십여분 깔딱 고개를 숨 가쁘게 지쳐 오르니 추풍령 큰 마을이 시원스레 펼쳐지고 그 뒤로 다음 구간의 묘함산과 국수봉 능선이 장엄하게 다가온다.
2월 12일_일_14:10
구간 마지막 정상인 눌의산(743)에서 봉수대 흔적은 찾을 길이 없고 정상석 하나 없이 초라히 나뭇가지에 걸린 표지 깃발을 배경 삼아 디카에 흔적을 남긴다. 이리도 두 고개 사이가 직벽 오르내림의 큰 산으로 막혀 있으니 눌의(訥誼)라는 이름처럼 영동-김천 주민 교류가 뜸 할 수밖에 없겠고, 산행객 또한 드문 한적한 대간 길을 이룬다.
정상 왼쪽으로 내려서니 커다란 헬기장을 만나고 이어지는 마지막 추풍령 내림길은 오늘 고통의 화려한 집합체 인양 끝이 보이지 않는 500 고도의 직벽 내림이 이어진다. 도무지 한 시간 이상의 하산길이 무사할지 걱정이 된다. 무릎 보호대를 풀고 에어파스가 동이 날 때까지 열을 식힌다. 십여분 마다 휴식을 취하며 조심스레 하산길을 밟아 내리다 보니 어느새 당마루 고갯길이 보이고 즐비한 포도 농장들 사이로 유난히 많은 무덤들이 잘 보살펴지고 있다. 특이하게도 마루금 양곁으로 자리하는 묘자리들이 대간 맥을 확인하듯이 뚜렷하게 마주 향하게 배치되어 있다.
2월 12일_일_15:30
추풍령 고속도로 밑 굴다리를 지나고 경부선 철길을 건너며, 잘 정비된 국도 신작로를 따라서 추풍령 기념비까지의 마지막 구간 발걸음이 천근 추를 달은 듯이 무겁게 느껴진다. 아무튼 탈출의 유혹을 벗어나고 항상 그렇듯이, 완수한 오늘의 행보가 쌓여가는 내 자유를 위한 작은 보석으로 남아주길 바랜다.
산행 버스 옆 길바닥에서 펼치는 찌개 안주에 한잔의 이슬이는 늘 내게 행복으로 다가오고, 추풍령 진입로를 들어서자마자 황간 휴게소에서 땀을 씻는다. 또 다음 구간의 능선들을 바라보며 어느 따스한 봄날의 산행을 그리워 함은, 어느새 사라진 무릎 통증만큼이나 한심스런 미소를 짓게 한다.
2006.2.13 생일날에 배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