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 3월 11 - 12일
3/11 22:00 신도림 출발
3/12 03:05 큰재 출발-농로-목장입구
04:10 회룡재
04:45 개터재 5.65 km
505봉-무명봉-463봉
05:55 윗왕실재
477봉
07:00 백학산(610) 6.87 km
07:20-07:50 임도 (아침식사)
08:30 원삼 삼거리-농로
08:40 405봉
08:50 개머리재 4.7 km
09:30 지기재(20분 휴식) 2.7 km
금은봉
10:30 쑥밭골
11:00 신의터재 4.55 km
8시간 24.47 km
3월 11일_토_22:00
신도림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코미디언 김형곤의 돌연사 소식이 왠지 무겁게 다가온다. 특히 운동 중에 갑자기 심장마비라는 사건이 요즘의 내 생활과도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일까. 무리하지 말라는 물푸레의 바람에서 걱정이 묻어나고, 구태여 유명한 스타의 죽음이 아니더래도 뭔가 그와 나의 다른 환경을 찾아내야 맘이 편할 텐데. 나는 예전에 허리둘레로 고민한 적이 없었던가, 나는 정치의 유혹에 미련을 둔적이 없었던가, 나는 카네기 홀의 공연 같은 화려한 출세의 욕망이 없는 건가, 나는 어떤 이유로 이혼하고 홀로 살 일은 없는가, 나는 남을 웃기려고 고민하며 정작 스스로는 웃지 못하는 일은 없었던가.
그래, 가능하면 적게 먹고, 세속의 화려한 꿈들을 털어버리고, 내 아내를 사랑하며, 진정으로 크게 웃으며, 훌훌 이 산 저 산으로 휘젓고 다니다 보면 어딘가에서 내 영혼의 자유를 찾는 날이 오리니 부지런히 걷는 길이 역시 내게 남겨진 최상의 선택 이리라.
신도림역 간이주점에서 순댓국 한 그릇에 이슬이 몇 잔으로 산행 버스 좁은 자리의 취침을 준비한다. 이젠 꽤 잘 길들여져 한두 시간의 선잠에도 개운함을 맛보며 그리 피곤하지는 않다. 경부 고속도로 황간 인터체인지를 벗어난 산행 버스가 이십여분을 더 달려, 상주시 큰재 아래에 닿아 (02:10) 산행 출발 시각까지 엔진을 켠 채 기다린다. 잠시 바깥으로 내려서 보니 생각보다 그리 춥지는 않고, 바람은 다소 불지만 눈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서쪽 하늘에 흐리지만 음력 보름이 가까운 둥근달이 비추인다.
3월 12일_일_03:00
예정보다 한 시간 일찍 출발을 서둔다. 인성분교 앞 백두대간 안내 표지판에서 이번 구간의 대간 마루금이, 도경계는 고사하고 면경계도 그리 길게 이루지 못한 채 상주시를 관통하는 것으로 보아 고도가 그리 높지는 않을 것 같고, 오히려 모동면과 공성면의 면경계를 이루는 성봉산이 북상 대간길의 왼쪽에 솟아 마루금을 내려다보고 있다.
다소 흐리긴 하나 꽤 밝게 비추는 달빛을 왼쪽으로 앞세우며 폐교를 가로질러 학교 뒷산으로 들머리를 잡아든다. 폐가로 남은 사택 앞에서 문득 내 소년 시절이 떠오르며, 아버님을 따라 참 많은 초등학교 사택을 옮겨 다니던 기억과 함께, 학교 사택의 외딴집에서 뒷동네 어귀를 돌아 나오는 학교 뒷산 초입에는 밤마다 귀신들이 참 많았지만, 항상 눈을 꼭 감고 뛰어다녀서 얼굴들을 본 적은 없다.
야트막한 학교 뒷산을 이십여분 가로지르는 동안에 오른쪽 공성면 면소재지 쪽의 밝은 불빛이 어깨 높이로 가까이 동행하며 여늬 대간길의 한밤중 심산유곡과는 판이한 분위기다. 제멋대로 자라난 잎 떨군 잡목들과 별 모양 없이 빽빽이 차지한 소나무 가지들이 이마 랜턴에 부딪치며 발걸음을 성가시게 한다. 가끔씩 튕겨지는 잔가지에 얻어맞는 뺨이 찬바람에 따갑다.
농로로 내려서다가 목장 정문까지의 포장도로를 잠시 감아 돌아 정문 앞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다시 들머리를 잡는다. 왼쪽으로 얕은 계곡을 차지한 큰 목장을 이어가면서 마루금을 이루는 대간길이 매우 부드럽고 평온하다. 단지 조금씩 세차지는 북서풍이 저으기 염려가 되며 된 오름이 없어 땀도 많이 나질 않아 제법 한기를 느낀다. 그러나 염려했던 진흙길들이 추위에 굳어있어 미끄럽지 않아 산행 속도에는 큰 도움이 된다.
한 시간여 동안 바람과 밝은 달을 벗 삼아 평탄한 트래킹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왼쪽 상판 저수지로 이어지는 회룡재에 닿았으나(04:10), 오른쪽 봉산리 넘어 공성면 휘황한 불빛은 꼼짝없이 그대로 따라붙는다. 작은 농로를 이루는 고갯길을 내려서니 잠시 바람이 잦아들며 작은 언덕으로 이어서 올라선다.
3월 12일_일_04:30
회룡재를 지나 이십여분을 여전히 오른쪽 어깨 높이의 불빛을 벗 삼는가 싶더니, 개터재를 앞에 두고 모처럼 솟은 봉우리를 오른쪽으로 약간 우회하면서 산사태가 났음직한 흙 벼랑길을 조심스레 건너 오르니 발아래로 그리 길지 않은 개터재 내림길이 이어진다. 통일신라 9주의 하나로 경주와 더불어 경상도를 대표하던 상주 땅이 꽤 넓긴 넓은 모양이다. 비록 추풍령 덕분에 김천에 발전이 뒤졌지만, 골골이 마을들을 이어주는 여러 고갯길을 거치며 이천리 대간 마루금 중에서 백 리 길을 경계 없이 안고 차지하니 그 세가 만만치 않다.
잠시 동안의 오름길에서 등에 배인 땀이 점점 차가워지며 세찬 강풍으로 변해가는 새벽바람에 윈드자켓을 꺼내 입는다. 동쪽으로 크게 방향을 바꾼 채 얕은 오름을 십여분 거친 후 다시금 평탄한 숲 속 길에서 왼쪽 효곡리 마을 위의 둥근달이 앞서가는 것으로 보아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 듯하다.
유난히 많은 무덤들이 가까운 시골마을의 창문이라도 들여다볼 듯이 자릴 잡고, 삶과 죽음이 더불어 달 아래 한가롭다. 잘 단장된 것들과 허물어져 내리는 것들, 같은 지맥에도 명당은 다른 법인가. 산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아무르띠무르 박물관 뒤쪽으로 펼쳐진 공원을 마주하며, 천천히 석양을 드리우는 운하의 흐름이 꽤 운치가 있어 보인다. 공원 주변을 배회하는 각국의 얼굴들이 역시 다민족 국가로 이루어지기까지의 긴 역사를 말해주듯 각양각색의 모습과 표정이다. 간단히 음료수 한 캔씩을 마신 후 천천히 박물관 쪽으로 걸음을 향하며, 새로운 문화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K노인의 전쟁 후 50년대 이야기가 점점 열을 더한다. 단지 그의 철학적 사고의 변신으로 옮아가며 내가 궁금해하는 뭔가 있어 보이는 사건들의 빠른 진행과는 거리가 멀어질까 봐 조바심도 나긴 했으나, 분위기상 내가 얘기들의 흐름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50년대 말 대구에서 당과는 별도로 류 림 선생이 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었지.. 참 힘든 선거였지.. 공산당 4촌이라는 소릴 들어가며.. 이 땅에 진보 사상이 죄다 전쟁 이후에는 더욱더 발붙이기 힘든 상황에서 보나 마나 한 결과였지... “
그 해 선거는 류 림 선생의 본거지라 할 만한 대구에서 조차도 지난날의 그의 명성과는 달리, 이미 전쟁을 겪은 국민들에게 공산의 개념으로 몰아붙이는 흑색선전에는 당할 도리가 없었던 선거였다.
그러나 K노인의 류 림 선생과의 가치와 관계에 대한 반성은, 또 다른 자기 발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새로운 길의 모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어떤 새로운 모델의 강한 자기를 창조하고 싶었는지도... 다시 말해서 류 림 선생의 아나키스트적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스스로의 수용과 거부를 놓고 한동안 깊은 사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을 겪는 시간 동안에 일어난 그 모든 사건들... 내게 가치판단에 기초를 제공하고 그러다가 류 림 선생을 좇아 권력을 거부하는 큰 흐름에 몸을 실었던 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 이전에 내가 꿈꾸던 작은 꿈들... 그냥 소시민으로 여유롭게 살고 싶다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바램들은... 신조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어린 시절의 관행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길게 내뿜는 K노인의 담배 연기가 참 길게 느껴졌다.
전쟁 중 그가 남긴 작은 비겁함들이 가져다준 엄청난 현실에 대하여, K노인이 반성하는 딜레마는 과연 그가 추구하는 목적인 가치 있는 삶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 그가 선택한 자유의 보호를 위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아나키즘의 선택이 과연 합당하고도 후회 않을 삶으로 엮어질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3월 12일_일_05:55
505봉, 무명봉, 463봉 등 작은 오르내림 속에서 한 시간 여만에 효곡리와 소상리를 잇는 꽤 넓은 농로 위에, 생태 이동통로를 겸한 다리를 설치한 윗 왕실재에 다다라 잠시 숨을 고른다.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녘을 느끼며 헤드랜턴을 접어 넣을 시간인데도 바람은 잦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세차게 불어오니 과연 오늘 낮엔 3월의 양광훈풍(陽光熏風)을 기대하긴 틀린 것 같다.
3월 12일_일_07:00
윗 왕실재를 지나 짧은 된오름을 맛본 후 그리 높지 않은 477봉까지 야산 특유의 잡목 활엽수와 소나무가 뒤섞인 구릉을 이어간다. 마치 고향 뒷산처럼 푸근한 발걸음에 제각각 마을 뒷산을 들먹이며 모처럼 대간길의 여유로움에 젖는 기분이다. 대간길 중에서 가장 낮은 고도를 유지하며 사람과 산이 함께 하는 평화로운 구간이다. 어쩌면 농사일에 찌든 삶을 기대며 밤을 새운 뒤, 새벽의 긴 연기를 드리우며 하루를 열어가던 우리네 착한 영혼들의 안식처는 모두 다 이러한 새소리가 들리는 야산 아래 같은 그림인지도.
백학산(白鶴山) 정상 능선으로 이어지는 남사면 오름길에, 예쁜 여인의 손톱 모양으로 새 순이 잎 떨군 은사시나무 낙엽 아래서 고개를 내민다. 행여 봄을 시샘하는 이번 추위에 얼어 버릴까 봐 다시 잎을 덮어준다. 짧은 된오름 후에 서쪽으로 향하는 정상 오르내림을 두세 번 거친 뒤에야 정상석이 앙징스러운 구간 최고봉에 다다른다(615m). 정상답게 그런대로 사방이 트이긴 했어도 흐리고 찬 기운의 날씨에 밝은 일출은 이미 틀렸고, 점점 세게 불어오는 북서풍에 사진 한 컷 남기기도 쉽지 않아, 앞선 기수의 선배 대간팀이 숨겨 둔 보물찾기(이슬이)를 마친 선두 조들은 하산을 서두른다.
오른쪽으로 이십여분의 급경사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잠시 숨을 고르며 서쪽으로 향하니 멀리 백화산(933)을 배경으로 대가산 잘생긴 봉우리가 한눈에 들러온다. 그 아래로 논밭과 시냇물이 흐르니 영락없는 시골 고향이다. 고독한 산꾼들의 영혼이 머물 수 있는 삶의 터전 이리라. 산 아래 농로를 내려서서 모처럼 바람을 피하며 아침상을 펼치고 온기를 채운다. 앞으로 나아갈 구간이 그리 험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에 복분자 한 컵을 들이켜니 지금이 천국이다.(07:50 출발)
3월 12일_일_08:30
아침식사를 서둘러 끝내고 작은 언덕 같은 구릉 길을 삼십여분 밟아 내리니, 효곡리와 함박골을 잇는 원삼 삼거리에 내려선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남쪽 성봉산 아래로부터 내려오는 포장길을 살피니 지나온 대간길까지 이어진다. 성봉산을 안고 도는 서진(西進)을 끝내고 북쪽으로 향해 작은 언덕을 올라서서 잘 가꾸어진 묘를 지나니, 십여 분 만에 405봉을 넘어 원소정마을과 함박골을 잇는 개머리재(소정재)에 도착한다.(08:50) 왼쪽으로 넓은 과수원 포도밭이 펼쳐져 있고 개머리 모양의 지형은 아무리 둘러봐도 쉽게 보이질 않는다.
맑은 공기를 한 껏 들이쉬고 잠시 주위를 살피지만 아직은 춘색(春色)을 찾기가 어렵다. 남쪽 어딘가에는 목련과 산수유 소식도 들리더니만, 우수 경칩 지난 개구리가 얼어 죽겠다. 긴 동면(冬眠) 끝에 봄이 기다려짐은 산꾼 아니라도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유난히 많았던 지난겨울의 눈길에서 이제 앙상한 나목들에 피어오를 연둣빛 생명들과 함께 걷고 싶은 것이다.
소정재를 지나 작은 오름을 두어 번 거치니 발아래로 지기재 넓은 도로가 보이며 금은봉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속리산이 흐리게 다가온다. 왼쪽 선유골 넓은 과수원 쪽에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니 모처럼 시원하게 펼쳐지는 확 트인 시야를 즐기기엔 만만치 않은 날씨다. 쉬운 대간 길이 아무리 없다 한들 오늘은 이른 봄이라지만 겨울 태풍처럼 변해가는 낮 바람이 원망스럽다. 그나마 봄 날씨에 질척이지 않는 행보로 위안을 삼으며, 지기재 고갯길로 급한 내림을 맛본다.
3월 12일_일_09:30
지기재 마을 입구에 자립 잡고 잘 가꾸어진 좌승지 성진항(창녕성씨) 유적비 잔디밭 자락에 배낭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마지막 간식을 즐긴다. 길섶에 세워진 대간 분수령 표지가 유난히 튀어 보인다. 차라리 어느 스님들의 선문답 전설처럼 느티나무 한그루 길게 자릴 잡았으면...
"東으로 가십니까.."
"아니오..."
"그럼, 西로 가십니까.."
"아니오.."
"녜, 그냥 쉬고 있는 것이구려..."
"그렇소..."
그들의 지팡이는 훗날 느티나무로 자라겠지.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살아오고 있는 것인가, 그냥 쉬고 있는 것인가.
모서면 석산리와 대포리를 잇는 901번 지방도의 잘 포장된 도로에 간간이 지나치는 자동차들이 매우 한가롭다. 백학산 정상에서 정성스레 숨겨둔 보물(이슬이)을 한잔씩 나누어 마시고, 포도밭과 사과밭이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걷다가 지기재 마을을 지나 폐가처럼 버려진 농가 뒷켠으로 올라서니 다시 얕은 구릉의 마루금이 이어지고, 검은 염소 대여섯 마리가 큰 우리 속에서 놀다가 갑작스러운 방문객들에 놀라 눈을 크게 뜬 채 엉덩이와 얼굴을 함께 향한다.
왼쪽 능선 끝에 우람한 봉우리를 우뚝 세운 금은봉 능선을 바라보며 대나무 숲으로 둘러쳐진 금은골 마을을 돌아 능선 안부를 향하여 오름길을 잡아드니, 남사면에 꽤 깊은 슬랩을 이룬 바위산이 나타난다. 표면에 많은 바위 부스러기들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암질은 그리 단단하지는 못하다. 조금 붉은빛을 띠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철성분도 있는 듯하다. 돌허사비 교수는 잘 알 텐데.
3월 12일_일_10:30
왼쪽 금은봉 정상을 뒤로한 채 오른쪽 능선길을 따라 평탄한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바깥쑥밭골재에 내려서니 잠시 바람이 잦아들고, 이름 예쁜 쑥밭골로 향하는 논밭에는 제멋대로 자란 억새풀들이 길게 누워 하얀 햇살 받이를 즐기고 있다. 안쑥밭골로 넘어가는 구릉을 올라서서 신의터재까지 천천히 트래킹을 즐기고 싶으나 몰려오는 세찬 강풍에 점점 추위를 느끼며 발걸음을 서두른다. 선두조는 벌써 도착한 모양이다.
몇 그루의 진달래 잎가지 끝에서 새 순이 움트는 것을 느끼며 올봄 진달래가 만발하는 4월에는 진달래 노래를 부르며 북방으로 먼저 간 벗의, 넋이 되어 울어줄 두견새를 만날 수 있으려나. 오늘 산행 구간에서 유난히 눈에 많이 밟히는 무덤들은, 내 머릿속을 맴도는 삶과 죽음의 공존을 말해주는 영혼들의 상징이련가.
"59년인가.. 을지로로 당사를 옮기던 해, 큰 딸애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신당동 아래쪽 청계천 부근으로 집을 옮겼지.. 아내의 힘든 노력으로 자그마한 브로크 집을 한 채 얻을 수 있었지.. 그동안 다니던 공장일에서 벗어나, 털실로 옷을 짜는 편물 가게를 차린 것도 그즈음이었으니 그런대로 가끔은 웃음을 느끼는 시절이었지... “
전쟁 후 다시 찾은 큰 딸의 한두 해 늦은 중학교 입학을 지켜보며, 늘 가슴속에서 가시지 않는 회한들을 삭히며, 오직 한 잔씩 마시는 술기운에 젖는 날이면 K노인은 밤새도록 정릉동 뒷산을 헤매는 습관이 되살아나곤 했다. 비록 고등교육을 접하진 못한 채 시집을 왔지만, 고운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던 첫 아내의 얼굴이 나이가 들어가는 큰 딸의 모습에서 자주 떠오르는 날이면, 무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한스런 여인의 잔영을 찾아 헤매는지도......
항상 말없이 수줍음을 간직한 채, 새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잘 자라준 큰 딸이 대견스러웠고, 나이차가 많은 막내아들도 아직 초등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에 한글 책을 줄줄 읽고, 이따금씩 제 어머니의 한문 섞인 책에서 한자를 배우려는 영특함에 석유 심지로 밝힌 작은 창문에는 제법 맑은 웃음이 터져 나오곤 했었다. 단지 아직은 젊다 할 K노인의 외출복이자 교복처럼 생긴 나무색 골덴 작업복이 점점 헐거워질 정도로, 그의 몸이 다소 야위어 간다는 느낌이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 4.19로 찾아온 60년대 봄의 시작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되리라 흥분되는 한 해였으나, 이후 K노인의 40대 초반의 삶에 드리워진 또 다른 그림자는 그 자신도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서서히 어둠을 예고하고 있었다.
3월 12일_일_11:00
잔디가 벗겨진 무덤과 송전탑을 지나 지기재를 출발한 지 한 시간 여만에 빠른 걸음으로 신의터재에 내려서니 팔음산 포도를 자랑하는 화동면 광고판과 십 년 전에 꾸민 김준신 유적비 공원이 잘 단장되어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대간 길손들을 위한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고 깨끗하다.
본래 新恩峴이라 불렸으나 일제 때 어산재로 불리다가 신의터재로 다시 불린다는 얘기다. 임진왜란 당시의 김준신 장군의 유적으로 일본인의 미움도 산 것 같다.
강풍과 추위로 인해 노상에서의 하산주는 꿈도 못 꾸고 후미조를 한 시간여 기다리다 500여 미터 아래 화동면 선교리 입구에 있는 백두농원(054-533-9345)으로 들어가 비닐하우스 한동을 접수받아 이미 끓여 놓은 돼지찌개에 이슬이가 즐겁다. 당도 높은 팔음산 포도를 생산하여 직접 택배로도 부쳐준다는 허부행 사장님과 사모님의 후한 인심에 아직도 살아있는 이웃의 정을 느낀다.
"따뜻한 거실로 모셔야 되는데... 집이 좁아서..." 안절부절하며 찢어진 비닐하우스 천정을 만지고 있다. 우리들에겐 따뜻한 안방처럼 느껴지는데... 사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복 받으세요.
2006.3.12 배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