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 3월 25 - 26일
3/25 22:00 신도림
3/26 03:10 신의터재 도착
03:35 신의터재(280) 출발
04:15 장자봉 갈림길-임도
04:45 무지개산 갈림길 4.27km
05:25 판곡저수지 갈림길- 묘터(5분 휴식)
06:10 윤지미산(538) -10분 휴식 4.41km
07:20 화령재 -아침식사 1.87km
08:00 화령재(320) 출발
09:00 산불감시초소 (580) 3.26km
09:40 봉황산(740.8) -20분 독도,휴식 1.45km
11:10 459.9봉
11:30 비재 3.85km
8 시간 19.11km
3월 25일_토_22:00
완연한 봄 날씨이긴 하나 흐리고 황사 섞인 바람이 조금씩 불어대니, 오늘 구간이 다소 쉬울 것 같지만 내일 시산제를 지낼 낮시간이 걱정스럽다. 3월 초 임관 후 장성 공병학교에서 교육 중인 작은놈이 한주 연기되어 삼주 만에야 외박을 나왔다. 전투복 차림의 소위 계급장이 유난히 빛나 보여 오히려 어려 보이지만 얼굴 볼살이 통통하니 그런대로 군인티가 나고 좋아 보인다. 첫 월급으로 마련한 내의를 받아 드니 꽤 기분이 좋다. 함께 하룻저녁을 보내고도 싶지만 이른 저녁식사와 한잔 이슬이로 달랜 후 섭섭하지만 배낭을 꾸려 대간길로 나선다.
지난주 속초 여행 후에 걸린 코감기가 계속되는 저녁마다의 이슬이 미팅으로 아직은 완전히 낫질 않아 염려되기도 하지만, 감기약을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냥 주머니에 넣은 채 견뎌보기로 한다. 그동안 비교적 난이도가 덜해 정신적으로 다소 해이해진 게 아닌가 맘을 추슬러본다. 이제 속리산 이후로는 대부분 만만치가 않을 터이니, 체력 보강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가까스로 출발시간에 맞춰 신도림역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전주에서 볼일을 보고 택시로 대전에서 합류키로 한 총대장은 이개월 만에 함께 동행하며 내일 시산제에 참석케 되니 참 반갑다.(02:00) 대전 톨게이트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오랜만에 대전시내를 바라보니 감회가 새롭다. 대전 EXPO시절이 언제든가, Ticketing System을 공급하기 위해 그해 여름 동안 긴 출장의 시간들을 보내며, 대천으로 잠시 떠나기 위해 방학 맞은 초등학생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유성 시외버스 터미널로 찾아오던 물푸레의 모습을 떠올린다. 내 40대의 지나간 십 수년은 그렇게 정신없이 흘러버렸다. 그때 꿈으로는 지금쯤 준 재벌은 돼 있어야 하는데.. 아.. 지난 IMF 시절...
3월 26일_일_03:10
경부고속도로 영동 I.C. 를 빠져나와 봄날 새벽의 신의터 고개, 잘 단장된 공원 앞에 내려서니 이주 전 세차게 불어 비닐하우스로 내몰던 매서운 바람은 간 곳 없고 전형적인 초봄의 시원한 산들 거림이 상큼하리 만큼 오늘 산행에 더위를 식혀 줄 만하다. 그믐 가까운 칠흑의 새벽에 인심 좋은 상주 땅의 농촌들은 깊은 잠에 취해 있고, 국도 한가운데에 둘러서서 준비체조를 할 만큼 도로마저 잠들었다. 대간 버스에서 비추어지는 불빛에 동서 분수령 표지판만이 야광으로 빛나고, 모처럼의 상큼한 날씨처럼 대간 산꾼들의 파이팅이 맑게 울린다.
3월 26일_일_03:35
농로를 따라 십여 미터를 걷다가 오른쪽 대간 들머리에 올라서서 잠시 동네 뒷산 오름 정도의 발길이 이어지니 일행들의 발걸음이 매우 가볍다. 어느새 14번째 구간, 대간 7개월을 지나는 동안 이젠 많이도 친숙해진 동료들의 정겨운 웃음이 어둠 속에서도 이어진다. 지리, 덕유, 황악을 거치는 지난겨울 동안에, 여늬 해 보다 많은 눈길 속을 함께 헤쳐 나온 보람에 오늘 같은 여유로운 웃음도 맛볼 수 있으리라. 아마도 속리산으로 진입하기 전 마지막 여유로움을 아쉬워하는 것 일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은 잡목 숲을 걸어 나가며 오른쪽 장자골은 어두운 적막에 겹겹이 산골을 이루고, 왼쪽 선교리 마을들은 허리 아래로 밝은 불빛으로 이어 걷는다. 약간 흐린 하늘은 그나마 그믐달마저도 가린 채 별빛 하나 보이질 않는다. 발아래 관목 낙엽들은 긴 겨울 눈 속의 차가움을 벗어나 가뭄처럼 말라버린 소근거림을 바싹이며,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산꾼들의 먼 길을 미끄럽지도 않게 사뿐 거리며 배웅한다.
3월 26일_일_04:15
장자봉 갈림길 부근 사거리 임도에 내려서니 작은 복숭아밭 곁을 지나 전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함께 걷던 왼쪽 마을들의 불빛마저 사라지고, 90도 동쪽으로의 진행이 360도 북쪽으로 바뀌는가 싶은 약한 오름에서 잠시 동안 오른쪽 머리 위로 그믐달이 수줍은 듯 비추이다 사라지곤 한다. 다행히 오늘 낮의 날 맑음을 미리 알려주려는 듯하여 반가운 맘에 몇 번이고 올려다보며 걷다 보니 오른쪽 무지개산 오름길 옆을 스친다.(04:45)
3월 26일_일_05:25
무지개산을 지나 작은 오르내림이 땀이 식지 않을 정도로 편한 트래킹으로 이어진다. 사라졌던 선교리 마을 불빛이 판곡 마을로 향해 이어져 다시 나타나고, 어느새 낮은 동녘 야산 너머에 동틀 움직임이 보이며 푸른빛을 띠는 밤하늘에 산마루 눈금이 선연해진다. 판곡 저수지 갈림길 임도를 지나 작은 오름길 오른쪽의 묘터에서 첫 휴식을 취하며 물 한 모금을 마시니 제대로 물맛이다. 지난 몇 구간 동안 늘 물병이 얼어 애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어제 저녁을 일찍 먹은 탓인지 벌써 시장기를 느껴 초콜렛 한 개를 꺼내 먹는다.
오랜만에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이십여분 땀을 흘리니 437.7봉 안부에 올라서서 능선 오른쪽으로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어지는 오름이 반복되며 자켓을 벗어 넣고 셔츠 차림으로 땀을 식힌다. 다시 이십여분 만에 올라선 정상에 초라한 표지석 하나 자연스레 세워 놓고 낙서처럼 새겨놓은 이름하여 "윤지미산"이라, 도저히 그 유래나 뜻을 짐작키 어렵다. 어느 낭만적인 산꾼이 있어 이 구간(신의터재-화령재) 유일한 혈용(穴龍)을 이루는 정상에 예쁜 이름 하나 붙여주고 싶어 그의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붙이지나 않았을까. 하필 김 모 배우를 연상케 하여 그 고운 뜻이 바랠 수도 있으련만.(06:20)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으로 허기를 때우고, 왼쪽 가파른 경사를 십여분 내려선다. 다행히 날이 제법 밝아 오면서 비록 맑은 일출은 보여주질 못하나 산아래 잘 보살펴진 큰 무덤 자리까지 무사히 다다르니 작은 소로를 지나고, 이어지는 대간 길 묘터들이 그 보존 행태에 따라 뭔가를 일러주는 듯하다. 대간 길을 걸으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명당자리에 관한 엉터리 이론이다. 우선 대간길이 약간 동서로 향하는 곳의 남향 자리가 명당이다. 비록 관룡자(觀龍子)로 그 용맥(龍脈)을 다 짚어 나가지는 못해도 큰 산의 음택(陰宅)에 좌향(坐向) 이 대간길을 베고 누워야지 길방향으로 곧추세워져 산(生) 사람들의 걷는 방향과 같은 향은 별로 좋질 못하다.
아무르띠무르 박물관은 1400-1500년대 왕들이 기거하던 집이며, 옛날식의 우물과 함께 무슬림의 전통에 따라 자기가 살던 집에 묻힌 왕들의 무덤을 간직하고 있다. 박물관 내부를 잠시 돌아본 뒤 말 탄 상의 아무르띠무르 동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그 기상을 한참 동안 쳐다본 후 K노인의 얘기가 이어진다.
“4.19 학생혁명....” 회한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잠시 고개를 돌려 멀찌감치 보이는 국회의사당 건물을 쳐다본다. 꼭 여의도 우리나라의 그것과 참 많이 닮은 모양이다. “수많은 학생들의 희생 속에서 얻어낸 자유... 그게 민주혁명이니 독재로부터의 자유라고 말들은 잘 갖다 부쳤지만... “
그해 5월 유림 선생은 혁신 동지 총연맹을 결성하고, 공동 투쟁에 의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혁명을 부르짖으며 활발한 정치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K노인의 견해로는, 모든 것이 정치적 이슈로 포장되면서, 어쩌면 이 땅에 싹을 피우며 자라나야 할 진정한 농민 대중의 자각이나, 초기 노동자 대중들의 생명력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오직 정치적 자유와 해방이라는 축복 속에서 소위 정치 사회적 인텔리들, 좀 배웠다는 지식인들에 의한 부르조아 사회주의로 흘러들 소지가 많았다.
정치적 국가파괴와 경제적 사회혁명을 논할 만큼 성숙되지 않은, 이제 갓 출범한 작고 가난한 반쪽의 민주국가에서, 그나마 전쟁의 상흔 속에서 배고픔을 해결하지도 못한 대부분의 인민들에게 정치적 해방이니, 사상적 도덕적 자유의 개념이 쉽게 이해될 수는 없는 시절에, 국가라는 자유와 민주의 보호자가 필요로 인식되는 시절에, 국가와 권력의 폭압을 설명해가며 정부를 부정하는 사상운동은 결국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이 땅의 민주 민족을 노래하던 지식인들이 과연 비참하게 살아가던 대다수 농민들과, 산업 노동자라고 칭하기엔 너무 이르고, 집단을 이루지 못한 채 도시로의 피난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 이제 갓 태동되는 도시 노동자들의 희생을 논하며 소위 지식인의 무거운 책임의식과 죄의식을 추궁할 여력도 없었다. 오히려 정치 일선의 지식인들은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어떤 절차를 밟았던 간에 다시 일으켜 세운 선구자로서, 도덕적 정치적 리더로서의 엘리트 역할에만 만족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정치를 꿈꾸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사상운동에 미칠만한 열정도 없으면서.. 사상이란 것이 내가 먹고살고 느끼는 실체보다 결코 앞서는 것도 아니고... “
이제 새로운 정부와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 위대한 미래를 꿈꾸기 위한 통일된 규율과 힘을 필요로 하는 정치적 혁명의 논리 앞에서 그들의 무정부주의 운동이란 그 자체로 한계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K노인은 스스로 정립 되질 않는 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 속에서, 1960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해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3월 26일_일_07:20
윤지미산에서 고갯길로의 하산길을 한번 가파른 내림으로 끝내고, 비록 잘 가꾸어지지는 않았지만 제법 조림 사업마저도 겪었을 만한 야산을 평탄한 걸음으로 걷다 보니 어디선가 요란한 차량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약간 흐리지만 꽤 밝은 아침 햇살 아래 펼쳐지는 정경이 아직은 세속이다. 청주-상주 간 고속도로 공사가 꽤 오래 진행된 듯 시원스런 길을 보여주며 화령재 직전 고갯길을 터널로 연결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삶의 질이 나아지려면 꼭 필요한 작업이겠지. 다행히 88 고속도로처럼 얕은 대간길 허리를 잘라내지 않고 고갯길을 살리며 터널로 이어짐에 서늘한 간담을 추스를 수 있겠다.
큰 내림길 없는 보은-상주 간 도로(25번)에 내려서니 건너편 공터에 예쁜 정자 한 채가 세워진 화령재 공원이 화장실과 함께 쉬어갈 장소를 제공하며 날씨만큼이나 포근하다. 단지 지나다니는 교통량이 제법 되고 너무 과속이라 행여 지친 대간꾼의 걸음과 부딪힐까 염려된다. 화령(化寧)의 이름처럼 평온한 이 고갯길에서 이제 우리는 속세를 떠나 속리산으로 향해 갈 것이다. 비록 영원한 떠남은 아닐지라도 대간의 발걸음을 옮기는 날 만큼은 속세의 진토들을 털어버리고 싶은 것 일게다. 지난 추풍령 이후의 착한 영혼들 곁을 떠나 이젠 봉황산을 시작으로 큰 오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모처럼 포근하고 좋은 자리 덕분에 길섶의 조찬은 화려하다. 막걸리와 복분자 술 한잔씩이 제법 열기를 더하며 새벽길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준다. 새로이 참여한 반가운 대원들과의 늦은 인사도 나눠가며, 부디 아직은 긴 여정으로 남은 우리들의 발걸음이 무탈하고 보람된 한걸음 한걸음으로 이어지길 빌어본다. 여러 가지로 양호한 조건들 덕분에 이번 구간의 예정 시간보다 진행이 빠른 탓으로 충분한 휴식을 맛보고 화령 종주를 마치고 속리산 입문을 위해 짐을 꾸린다.
3월 26일_일_08:00
25번 국도를 따라 보은 쪽으로 오 분여 걸어가니 49번 문장대 방향 도로를 만나면서 행여나 생길 탈출자를 기다리던 산행 버스를 뒤로하고, 신봉리 마을 뒤쪽으로 들머리를 잡아 왼쪽 언덕배기로 올라선다. 짖꿎은 잡목들의 배낭 당김을 뿌리치며 서서히 오름길이 시작되나 세속의 한 잔 이별주를 마신 산꾼들에게 워밍업의 배려를 베푸는 듯 완만한 긴 오름에 전혀 힘들지가 않다. 돌 보는 이 없이 사그라지는 대간길 어느 할머니의 무덤에서 겨우 힘겹게 고개 내민 할미꽃 한그루가 봄볕이 너무 강해서인지, 지나다니는 대간 할범들에게 부끄러운 듯이 고갤 숙이고 피어있다. 같은 용혈(龍穴) 지맥에 영혼을 묻고 나서도 후손들의 보살핌을 받을 복은 없었던 모양이다.
겨우내 바랜 빛의 나목(裸木)으로 우릴 맞아주던 참나무 가지 끝에서 새로운 싹을 움트이는 활기를 느끼며 수북이 쌓인 솔잎을 밟으며 어린 시절 시골마을의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솔향내 연기를 맡아본다. 그 낙엽 아래서 파랗게 솟아오르는 봄을 느낀다. 생강나무 노란 꽃잎들도 제일 먼저 잘생긴 산꾼들을 유혹하려 든다. 봄은 멀리 산너머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밟고 걸어온 언 땅에서 그렇게 뚫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봄은............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신동엽)
3월 26일_일_09:00
한 시간여의 부드러운 오름 끝에 10분 정도의 된 오름을 맛보고 안부에 올라서니 지키는 이 없는 산불감시초소가(580m) 덩그라니 홀로 서 있다. 예전에는 외로운 아저씨 한 분이 있어 가끔 만나는 대간꾼들과 인사도 나누고 적은 먹거리로 정을 나누곤 했다는 선답자의 설명이다. 아마도 속리산 입구 사대천왕처럼 살아 있는 지킴이로 입산하는 중생들의 안녕을 빌어 주셨으리라.
3월 26일_일_09:40
감시초소 옆을 지나 잠시 편한 8부 능선을 거치고 나니 봉황산 머리가 보이는 지점에서부터 꽤 된오름의 지그재그 능선길이 나타난다. 키 작은 소나무와 관목들 사이로 다음 주면 꽃 피울 진달래 꽃망울들이 가는 가지 끝에서 지나쳐 가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어데선가 휑하니 두견새 날갯짓으로 지난겨울 먼저 떠난 진달래 친구가 노랠 부른다. 응어리진 가슴들도.. 작은 꿈들도... 숱한 욕망들도.. 그렇게 어느 날 다 사라지면 진달래 꽃으로 태어나련만.
간만에 숨이 찰 정도의 빡샌 된오름을 삼십여분 짧게 맛본 후 올라선 봉황산 정상은 그 이름만큼 화려하지도 넓지도 않아 일행들의 휴식을 만족하게 제공하진 못한다. 정상주를 계획하던 모의들을 포기한 채 독도훈련과 잠시 동안의 조망으로 만족한다. 비록 흐미한 안개가 가려져 좋은 사진을 남기지는 못하나, 사방으로 트인 시야가 지나온 상주 땅과 나아갈 속리산 남쪽 자락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으로 대궐터산이 제일 먼저 자릴잡고, 서쪽에는 구병산이 호위하듯 반겨준다. 가히 속리산 입구를 장식하는 첫 용오름으로서 손색이 없다.
북으로 곧은 내리막에서 제법 거친 기암릉 지대를 만나 조심스러운 내림을 맛본다. 이제 육산의 부드러움에서 벗어나 점점 발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용혈의 단단함을 전해주는 듯하다. 대간 산행을 위해서가 아니면 일부러 오르는 명산도 아닌 곳에서 역진행의 산꾼을 두세명 만나니 참 반갑다. 두세 번의 급한 내림길을 밟아 내린 후에야 459.9봉 안부에 다다라 길섶 편평한 솔잎 자락에 앉아 정상주로 남겨둔 복분자주를 한잔 나눠 마시며 발아래 비재로 내려서길 지체한다.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과 함께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새로이 농촌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0년 그해 봄의 소용돌이치는 정치적 관심들을 달래주며 모처럼 결집된 학생들의 의식 집단을 고양시키겠다는 큰 목표를 가지고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농민에 관한 이념은 농민에 의해 형성된 농민에 뿌리내린 이념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봉사 활동을 벌리고 지친 몸으로 시도하는 학습 운동에 귀 기울이는 농민은 아무도 없었다. 녹두장군이란 소설 같은 동학의 이야기도 농민의 이야기가 아닌 비참하고 슬픈 장군의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K노인에게 가장 필요한 대답은 그 자신이 이제 지식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보통 인민 대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 민중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냥 먹고 살아가는 일에 몰두하는 것일까.. 내 가족의 웃음을 지키려던 옛날과 뭐가 다른 것인가.. 도시 노동자의 옷을 입지 않으면 그들의 피로감을 모를 정도로 나는 부유한가.. 한해 온종일을 햇볕에 그을리지 않으면 농민들의 배고픔을 모를 것인가..
“자유롭다는 게.. 만사를 귀찮게 여겨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더구먼....” 그해 여름을 보내며 K노인이 농촌으로 돌아가려 맘을 굳히면서 도시생활을 접으려 했을 때 그의 아내와는 꽤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런대로 서울 생활에 적응해 가며 작은 편물 가게지만 제법 수입이 괜찮아, 두 아이의 뒷바라지에 남편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아도 될 만한 형편에서 별 연고도 없을 농촌행이 그의 아내에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평소 모든 일에 그리 완강하지 않던 아내의 반대로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찾아보겠다던 그의 자유를 위한 행보는 접힌 채 그해 년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처럼 청계천을 뒤덮으며 내리는 눈발 속에서 이제 마흔의 문턱을 넘어서며 스스로의 순탄치 않았던 지난날들을 털어내고 싶은 심정으로 한두 잔 이어지는 막걸리 잔을 벗 삼아 시름을 달랜 후 천천히 귀가 발길을 더듬어 황학동 야산을 돌아 넘고 있었다. 그날 밤 중학생 큰 딸은 저녁 식사 후 평상복으로 잠시 외출한 엄마의 귀가가 이상스레 늦어지는 탓에, 7살 난 동생의 괜시리 아픈 배를 만지며 밤을 새워야만 했다.
3월 26일_일_11:30
여유로운 진행과 포근한 날씨 덕분에, 12:00-13:00 사이에 지내려든 시산제 시간에 단 한 사람의 지체도 없이 비재를 내려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조림목을 배경으로 한 지방도 길옆 510봉 산허리에 제수를 차린다. 구병산 병풍 아래 큰 머리 돼지를 진설하고, 큰 산신령님께 잔 두 개를 바치고 삼배를 절한다.
그렇다. 우리의 고운 정성들은 종교에서의 그러한 믿음의 신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흰 옷 입고 정성스러운 짚신으로 걸어온 이 땅의 영혼들은 그 무엇도 창조하려 하지도 않았고, 누굴 대신해서 죄를 감당할 여력도 없었고, 단지 삶에 닿아 있는 작은 보이는 것들에 깃들어 함께 머물다가 행여 작은 실수를 보듬어 주며 지혜를 일깨워줄 따름이리라. 그러한 영혼들을 불러 함께 나누어 먹고 즐기는 우리의 정성이 무슨 위대한 신들의 명예에 해가 될 것인가, 정령으로.
높은 산을 향해 오르며 속세의 먼지를 터는 맘으로 깊이 절한 후에 고개를 드니 맑은 하늘 위 비조령(飛鳥嶺) 고개 위로 봉황(鳳凰)이 날고 있다.
2006.3.27 배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