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15회 속리산 종주(밤티재-천왕봉-비재)

06년 4월 8 - 9일

4/8   22:00   신도림 출발

4/9   03:30   밤티재출발

        06:00   문장대 (1,54m, 20분 휴식)                              4.45km

        06:20   문장대 출발                            

        07:00   신선대                                               1.17km

        08:00   천황봉 (1,057m , 아침식사)                         2.58km 

        08:30   천황봉 출발-703봉-726봉-667봉-639봉

        10:45   피앗재 (5분 휴식)                                 5.66km

        11:40   형제봉                                               1.56km

        12:00   갈령     (5분 휴식)                                0.7 km

        12:50   못제  -510봉                          

        14:00   비재                                                 4.15km               

                           10시간 30분             20.27km

문장대 암송

4월 8일_토_22:00

 지난주 남해를 다녀온 후 몇 가지 바쁜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한식날 산소에서 봉분을 다시 올리는 일을 형님께서 홀로 마쳤다는 소식에 무척 미안하다. 마음으로만 조상 섬기면 무슨 복 받을 일인가. 아직도 게으른 내 행동들을 채찍 질 하며 조금 더 내 주변을 챙겨야겠다. 주말 외출 나온 작은놈 덕분에 군납용 지리산 복분자 두어 잔을 마시니 꽤 기분이 올라온다. "대간 끝나기 전에 꼭 한번 같이 해야 될 텐데.." 현역 군 복무하면서  말이라도 참 고맙고 좋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심한 황사로 주말 준비 운동도 못한 채 뻐근한 몸으로 신도림으로 향한다. 속리산 국립공원의 화려함을 물푸레와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맛보려니 참 아쉽긴 하지만 아무래도 암릉구간들이 많아 강권하고 싶진 않다. 어차피 화려한 경치 구경과는 거리가 먼 대간 길이니 훗날 군데군데라도 손잡고 거닐 기회가 있으리라. 조금 일찍 도착한 산 친구들이 황사를 피해 은행 24시 창구에 몸을 숨긴 채 산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일념으로 내딛는 그들의 발걸음이 진부령 지나고 이 땅 곳곳으로 이어져, 自由人의 진정함을 땅에서 함께 캐내길 빌어본다.  

 국립공원 속리산의 명성만큼이나 많은 출정 인원으로, 의자수를 줄이고 편하게 이동하려던 계획이 수고하시는 대장님들을 버스 복도 바닥에 눕게 하니 영 맘이 편치 않다. 아무튼 속세를 탈출하려는 야간 산행 버스는 어둠 속으로 달려 경부-영동-중부내륙을 달려 연풍 I.C. 를 벗어난다. 화북면을 거쳐 상주 고을 최 북쪽으로 내달아 화양구곡으로 넘는 고갯길 밤티재에 닻을 내린다.(02:00)

 오늘 대간 북행 길은 역순 진행이다.(밤티재-> 비재) 경방 기간(-5/15). 며칠 동안 (비재-> 밤티재) 시간대별 체력 안배를 고려하며 연구한 준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한 채 어둠 속에서 가파른 기암 개구멍과 로프를 구름 타고 올라야 한다. 학창 시절 담 넘어 수원지를 드나들듯이. 

밤티재-문장대 기암 능선


4월 9일_일_03:00

 08:00 이전 천황봉 구름 탈출계획에 따라 서둘러 고달픈 자리 잠에서 깨어 산행 준비를 마치고 마루금 들머리에 마주하니 음력 보름이 가까운 달이 구름인지 황사인지 모르는 안갯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오늘 정상에서의 해맞음은 그리 찬란한 일출은 아닐 것 같다. 다행히 봄날의 새벽바람은 잔잔하고 적당히 차가움을 안겨줘 오름길 땀방울을 식힐 정도다. 간단한 준비체조를 마치고 세속의 도로금을 한 걸음 건너뛰니, 진표율사께서 어서 벗어나라는 손짓과 함께(사人離俗) 문장대행 구름 열차가 연중무휴로 운행한다는 푯말 옆에 서 있다.(03:30) 

 그동안 추풍령을 지난 후 순탄한 마루금을 밟으며, 가난하지만 따뜻한 우리네 산골의 영혼들과 많은 기쁨과 설움들을 함께 나누며, 밤길과 풍랑과 햇살을 마주하며 걸어왔다. 이제 오늘 밤 우리는 속탈(俗脫)의 기쁨을 맛보고자 거대 용혈의 마루금을 구름 타고 소리 없이 오르고 있다. 산수유 릿지 등반길, 아름답기로 이름난 이 기암 능선을 달빛마저 사라진 어둠 속에서 촛불 심지 아래 여인의 옷을 벗기듯, 하얀 바위의 속살을 헤드랜턴 하나로 더듬어 올라야 한다니.

 오 분여 숨을 고르니 잘 가꾸어진 묘 1기를 만나니 儒人洪川龍氏라 멀리 강원도 땅에서 상주로 시집와서 그런대로 후손들을 잘 가꾼 덕택으로 명당 자릴 차지하고 오며 가며 산꾼들의 칭찬을 받으니 그 영혼의 평안함이 돋보인다. 594봉 안부에 올라서서 윈드자켓을 벗어 넣고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대 기암들을 마주하며, 왼쪽 장암 마을의 불빛이 아직은 못 벗어난 속세의 인연으로 따라붙는다. 작은 오르내림과 거암을 피해 나아가는 지그재그 오름길을 거듭하니 커다란 입석 바위에 다다르고(698봉) 비교적 여유로운 바위틈을 지나면서 스틱을 접어 넣고 본격적인 암릉 된오름을 준비한다.(04:30)

(좌) 바다 곰-신선대 오름길 (우) 거북바위-천황봉 가는 길

이후 853봉 안부까지 개구멍인지 게구멍인지 구별할 수 없는 직벽 암릉 사이를 두세 번, 로프 잡이를 기다리며 한 사람씩 조심스레 오르자니, 점점 지체시간이 늘어나고 고도가 높아지며 서서히 찬 기운을 느껴 윈드자켓을 다시 꺼내 걸친다. 어둠 속에서 랜턴의 불빛만이 유일한 보조자로 긴 암벽들을 기어오르고 이어지는 암릉들을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새 새벽의 기운을 느끼며 이마의 불빛이 흐려져 간다. 어차피 이젠 감각이다. 비싼 랜턴 벗겨져 깨질라 얼른 벗어 주머니에 챙기고 문장대 통신탑 빨간 불빛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05:10) 

 희미하게나마 기암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어 다행스럽지만 차라리 전체를 보지 못한 채 좁은 로프 크랙에 매달려 정신없이 기어 오른 지금까지가 되려 맘이 편하다. 점점 뚜렷이 비춰지는 긴 거대 암군들에 점점 더 압도되어 기가 질릴 지경이다. 꽤 많은 인원들이 한 명씩 조심스레 차례를 지키며 네 번째 긴 로프 잡이를 기다리는 바위 계곡엔, 누가 톱질하여 쓰러뜨려 설치한 디딜방아 타입의 굵은 나무다리 덕분에 한결 통과하기가 편하다. 7-8m의 긴 로프를 잡고 별로 우아하지 못한 모습으로 안부에 올라서서 정신없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리본을 따라 크랙을 올라  큰 바위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지나온 암릉들의 희미한 자취들을  담아본다.(05:40) 

 오 분여를 기다려도 일행들이 올라오질 않는다. 다시 내려가자니 십여 미터 바위 밑이 내가 봐도 어떻게 올라왔는지 아찔하다. 문득 지난주 설흘산에서의 박교수 일행이 떠오른다. 분명 돌아가라 했는데, 좌우를 살피다가 정상 쪽으로 계속 작은 바위를 두 개 조심스레 넘어가니 왼쪽 아래쪽 우회길에서 여유롭게 돌아 나오는 일행들을 발견하고는 체면 불고하고 바위 슬랩을  미끄러진다. 

동트는 문장대

4월 9일_일_06:00

 문장대가 바라보이는  안부에서 마지막 긴 크랙을 미끄럼 타며 개구멍을 빠져 내리니 오른쪽으로 평탄하게 돌아 오르는 길에서 키 낮은 산죽과 피지 않은 진달래 잡목들의 사열을 받으며 스틱을 꺼내 여유로운 트래킹을 준비한다. 헬기장을 지나 잘 정비된 문장대 산장에서의 오름길에 올라서니 통신소 건물이 어떤 필요성이 있다 한 들 아름답고 신비로운 성터 곁에 너무나 용감하게 철조망을 감고 자릴 잡았다. 경방 기간은 고사하고 년 중으로 구름 타고 다녀야 하는 대간 꾼들의 안전시설인 로프 줄들은 흉하다고 잘라버리면서, 내가 하면 생활 편의시설이고 남이 하면 자연훼손인가.

 동트오는 문장대 큰 바위 정상에는 벌써 일행들이 바삐 오르내린다. 文藏臺라 써진 표지석이 좀 헷갈린다. 차라리 그 옆에 크게 한글로 문장대 표지석을 만든 게 다행이다. 본디 구름에 가려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라 불리다가 세조가 글월을 읊어 문장대(文莊臺)로 바뀐 전설이 있고, 운장대(雲莊臺)로 불리다 세조가 책을 발견하여 문장대(文藏臺)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어느 것이 옳든 여러 가지로 상상해도 다 좋다. 아무튼 세 번 올라 극락 가고 싶은데 아직 한 번 남았으니 가까운 봄날 물푸레와 우아하게 시어동 매표소에서 표를 끊을까, 겨울날 상고암에서 하룻밤 지새며 月光太子라도 만나  문장대 알바위에서 예쁜 막내딸 하나 점지받을까.

 또 하나의 거대한 흉물인 문장대 휴게소 너럭바위 앞에서, 그나마 풍취를 간직한 채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암송 한 그루를 담고, 후미조가 그리 길어지지 않은 탓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목을 축인다. 막걸리라도 한 사발 하고 싶으나 대열이 길고 어려운 사정으로, 천황봉-문장대 화려한 구간을 오전 나절에 밝은 햇살 속에서 얼큰하게 즐기려던 꿈은 꿈처럼 사라지고 새벽의 인적 없는 주능선을 밟아 천황봉까지 08:00전에 통과해야 한다.(구름을 타고..) 

문수봉 일출


4월 9일_일_06:20

 멀리 구름인지 황사인지 분간 되질 않는 시야 속에서 천황봉까지의 주능선을 조망하며 천천히 여유로운 트래킹을 즐긴다. 조금 옅어지는 구름 속에서 어느새 솟아오른 일출을 담으며, 기기묘묘한 자태로 능선들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는 주능선과 서쪽으로 가지 친 관음봉 능선을 번갈아 눈길 돌리며 신선대로 향한다. 청법대와 경업대를 지나는 동안 후두둑 거리는 봄비가 차라리 한바탕 쏟아진 후 시야를 맑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대간 길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아름다운 이 경관들을 담아 벗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도무지 회색뿐이니. 어느새 청법대 산수유릿지 끝을 지나 북쪽 경사면을 돌아 오르는 길에서 신선대 휴게소를 지나니 그 또한 국립공원에 어울리지 않는, 산장도 아닌 제멋대로의 편의점이 눈살 찌푸리게 만든다. 

 천천히 비로봉(1,032m)을 향해 걸으며 상념에 잠겨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과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동안 수많은 부정(否定)에 의해 새로움을 만들어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불일치 없는 완전한 조화는 없을지라도, 행여 나 스스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개인적, 가족적, 민족적 이기심을 이 산중까지도 짊어지고 오르는 건 아닐까. 어느 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배움을 느낀다면, 지나오고 나아갈 행로가 힘들고 고독할지라도 내가 서 있는 이 대간길에서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남은 삶의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만 있다면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으리라.

       

타쉬겐트의 브로드웨이로 향하는 박물관 정문 쪽에 자리한 호수 부근에서 카레이스키 상인이 파는 작은 수레 앞에서 면화 기름에 볶은밥과 양고기로 싼 도시락을 사들고 잔디밭 부근의 벤취에 앉아 K노인과 함께 허기를 때우면서 긴 얘기를 이어간다. 
시리도록 아픈 1960년의 겨울이 깊어가는 12월 초, 숱한 젊음들의 희생을 딛고 싹을 틔우려는 이 땅의 새로운 민중들의 자각들이, 요란한 정치구호에 절여지며 낮밤을 모르고 동서남북을 잊은 채 동네마다 골골마다 어지러운 비판의 집회들로 어수선한 민주주의의 실험이 난무하는 눈발만큼 나라의 앞을 가리고 있었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크고 작은 단체들의 목소리와, 자유당 정권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그 가족들마저도 전쟁 중에 배운 인민재판식의 공개 비판이 공원 등지에서 무질서하게 진행되니 K노인으로서는 과연 이것이 참 자유이며 정부 권력의 독재를 거부한 목표였든 가 하고 회의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즈음 국회에서 가장 크고 위험한 논의로 대두된 문제는 농지개혁에 관한 이슈였다. 극단적인 토지 공개념을 들고 나올 정도로 사회주의적 정책을 수용하라는 재야파들의 요구에 이 땅의 기득권으로 자릴 잡은 지식인 권력층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해방 후 단행된 소작농 개혁의 차원이 아니라, 러시아식 공개념의 도입은 38선 이북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할 수도 있는 정치적 의도가 있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과연 이 땅의 농민들은 그와 같은 집단주의적 사고에 익숙한 것일까.. 결코 거부될 수 없는 사실은 이 땅의 소박한 농민들은 사유 경작의 작은 꿈을 이루어 가면서 지극히 정의로운 경제적 독립을 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정책에 의한 봉기나 혁명을 시도할 만큼 역사적인 특성을 가지질 못했다. 단지 동학의 시절과 같은 권력에 의한 수탈만 없다면...
이 시점에서 정치권 언저리를 맴돌며 그 정강들을 훑어야만 하는 K노인의 갈등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권력이라는 거대한 압력에서 벗어나려는 소극적인 자유의 개념으로 맞아들여 반권위주의의 이상을 바라던 현실이 정치적인 행동의 선택을 요구하게 되어 피할 수 없는 이념의 굴레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입석대 햇살

4월 9일_일_07:00

 신선대를 지나 비교적 한가로운 국립공원의 잘 정비된 능선길을 밟으며 화려한 좌우 기암봉들을 디카에 담으려 애를 써지만 흐린 회색으로 감싸고 있는 아침의 사위가 못내 아쉽다. 입석대를 지나는 계단길에서 모처럼 약하지만 밝은 햇살을 잠시 느끼니, 이처럼 고맙고 반가운 햇살을 평소에는 도회의 성냥갑 속에서 블라인드로 가리고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멀리 안타깝게 타인처럼 비춰온다. 우린 얼마나 대자연의 우람하고 큰 힘을 모른 채 속세의 늪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 일까. 

 비로봉(毘盧峰)에 올라서니(07:30) 장각 마을로는 입산금지 표지가 크게 눈에 띄고 그 이름만큼이나 밝고 넓은 정상터에 모양 좋은 헬기장을 구성해 놓았다. 발걸음을 서둘러 오른쪽 상고암사면을 비스듬히 걸어 내리며, 고사목과 백암에 어우러진 이끼마저도 멋드러진 황홀경을 연출함에 연속 감탄스러워하다 보니 거암으로 이루어진 천황석문을 통과한다. 법주사로 향하는 상고암 갈림길에서 오른쪽 계곡을 내려다보니, 옅은 안갯속에서도 멀리 비경의 직벽 암릉 위에 드문드문 세워진 암자들이 자연에 심어 놓은 영혼들의 안식처 마냥 정겹다. 

 잠시 능선 안부의 오름길을 넘어서니 속리산 주봉인 천황봉(天皇峰 1,058m)이 앞자락에 거북바위를 비롯한 기암 미석을 장식한 채 산죽밭을 일구며 아침 일찍 찾아 오르는 산행객 들을 옅은 햇살마저 분칠 하며 반가이 맞아준다. 걸음을 지체하며 열심히 아름다움을 담으며 허기를 채운다. 십여 분 만에 잠시 된오름을 맛본 후 천황봉 정상에 올라서니 사위가 온통 별유천지다. 그 명칭이 천왕(天王)에서 천황(天皇)으로 바뀌어 혹시 일제의 잔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그냥 드높임말로 넘어가도 좋겠다.


천황봉

4월 9일_일_08:00

 천황봉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방을 조망하며 삼파수(三派水)의 갈래를 훑어본다. 대간길 동쪽 장각 마을로 흐르는 물은 농암천(籠岩川)을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고, 남쪽 대목리로 흐르는 물은 삼가저수지(三街貯水池)를 거쳐 금강을 이루겠지. 서쪽의 은폭동 폭포에서 놀던 물은 사내천(舍乃川)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질 것이고.

 항상 대간길에서 아쉽게 내려다보는 계곡의 절경들을 훗날로 미루며, 삼십여 년 전 고교시절 수학여행 때 법주사 선물가게의 예쁜 아가씨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녀 때문에 구입한 대나무 등긁기가 집에 돌아오니 내 어머님의 작은 감격을 일구어 내기도 하고..  

 5시간 동안의 긴 암릉 구간 행진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서둘러 하산길을 택해 주봉 아래 대목리 갈림길 안부에서 아침식사를 펼친다. 대간 15회 차, 지난해 가을이 시작되던 9월 초에 내딛기 시작한 지리산 중산리에서의 발걸음이 반년이 훨씬 넘다 보니 그동안의 동고동락이 마련해 준 식단들이 이젠 自由人의 화기애애한 동료애를 나타내 준다. 막걸리 한잔에 온갖 바램이 씻긴다. 지난겨울 동안 추위 속에서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때우던 식단과는 비교도 안된다. 봄은 역시 먹는 일에서 먼저 느끼는가, 산나물 무침의 향기가 입가에 맴돈다. 

 법주사에서 주능선으로 올라오는 서너 갈래의 계곡 능선길에 펼쳐질 비경들을 상상해본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입구에는 정 2품 송이 있겠지. 세심정에서 내 더럽혀진 세속의 마음을 씻은 후에 멀리 관음봉을 향하는 복천암 쪽 긴 등산로가 좋을듯하다. 세조의 흔적이 유난히도 이곳에 많은 것은 그가 얽매인 속세의 지난한 고통들을 벗어나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탓일까. 

천황봉에서

4월 9일_일_08:30

 또다시 구름을 타야 하는 천황봉-형제봉 구간의 여섯 봉우리를 내려다보며 갈길이 아득하다. 급경사 내리막을 조심스레 밟아 내리다 보니 오른쪽 천황봉 남사면이 눈길을 붙잡아 매고 내림길을 지체하게 만든다. 야간 흐린 날씨에도 직벽 백색 암봉마다 암송(岩松)들이 자태를 뽐낸다. 뒤로 펼쳐지는 주능선의 석화성(石火星)을 바라보며 다시금 뒤돌아서서 내려 밟아야 하는 속세로의 인연이 참 질기다. 진작 이곳을 맛보았더라면 쌓지 말았을 인연들인가.

 시간 남짓 긴 내림길을 천천히 구름 타고(?) 내리다 보니 어째 오른 다리 바깥쪽 복숭아뼈 위에서 통증이 시작되는데 뼈도 이상 없고, 피부도 괜찮은데, 그 중간 어느 힘줄 부분에서 뭔가 압박을 느끼면서 눈물이 나도록 통증은 심한데 웃음이 나온다. 표현을 할 수도 없는 이상한 현상이다. 내림길 풀섶에 앉아 파스를 바르고 압박붕대를 감아 보았지만 되려 더 심해 십여분 만에 다시 풀섶에 주저앉는다. 전망바위(800 고지)를 지나면서 발아래 펼쳐진 봉우리들을 세어보고 고도표로 짚어 보니 멀리 예닐곱의 봉우리 끝에 가장 아물거리는 곳이 형제봉이다. 그 이후로 두 시간 이상 서너 개 남았는데, 걱정이다. 앞으로는 비상용 샌들을 꼭 지참해야겠다. 


4월 9일_일_10:00

 703봉을 지나 왼쪽의 대간 길 묘를 지나니 완만한 내림길을 만나고 고지에서 볼 수 없었던 진달래가 한 두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비재에 가까워지면 봄을 피울 것인가. 질긴 생명과 경이로운 꽃 피움에서, 고도와 일조량을 따라 질서 있는 영혼들의 자리매김을 상상해 본다. 지난겨울 떠났던 진달래 친구는 지금 어느 산 중턱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있을까, 계절이 길어지는 속리산이다. 봄이라서 꽃이 피는가, 꽃이 피니 봄인가. 새벽에 문장대 오름길에는 응달 녘에 숨어 있는 겨울에서 춘한(春寒)을 느꼈는데.

 다시 726봉을 지나고 잠시 급경사 내리막에서 다시 통증을 참으며 천천히 피앗재까지 가보기로 한다. 오른쪽 만수동 첫 갈림길을 지나 667봉 오름길에선 오히려 통증이 훨씬 덜하여 어느 정도 안심이 된다. 적어도 심한 부상은 아니라는 확신이 서니 맘이 한결 가볍다. 단지 웃음과 눈물이 반복될 만큼 쓰라린 고통이 무슨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다. 667봉 정상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오른쪽으로 급히 방향을 바꾸어 내리니 갑작스러운 급경사에서 현저히 속도를 늦춘다. 피앗재로 내려서는 급경사 내리막길에서 십여분 살금 거리며 간신히 일행의 꽁무니에 다가선다.(10:45)

형제봉


4월 9일_일_10:50

 피앗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발목에 파스를 듬뿍 바르니 한결 시원하고, 비슷한 고통을 경험한 산우의 가르침을 따라 신발끈을 거의 풀다시피 하고 걸어 오르니 훨씬 통증이 덜하다. 한 시간 여 동안의 형제봉 오름길은 제법 급경사를 이루며 호흡을 힘들게 하나 차라리 발목 통증은 오름길이 훨씬 덜하니 계속 오르고 싶을 지경이다. 마주 보이는 형제봉의 아름다운 형상을 조금씩 걷혀가는 시야 속에서 확인하니 이제 마지막 고비를 넘는 기분이다. 

 급경사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가니 할매바위를 지나 형제봉 정상에서 선두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11:40) 바위 위로 올라가고 싶으나 엄두가 나질 않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볼 겸 먼저 갈령을 향해 왼쪽 경사길을 90도 크게 돌아 내린다. 고도 표시나 지도상엔 803.3m로 마주 보이는 828봉 보다 낮은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형제봉 바위 위에 나무 표지 말뚝엔 832m로 적혀 혼돈을 일으킨다. 다시금 828봉을 힘겹게 넘어 왼쪽 갈령 마을을 내려다보며 동쪽으로 크게 돌아 내리니 표지 리본이 어지럽게 삼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갈령 삼거리 안부에 다다른다.(721m, 12:00)

 구병산 쪽 대간길 표지 리본과 갈령 쪽 탈출로 리본이 초행자들을 알바시키기에 알맞게 달려있다. 갈령 쪽 리본을 몇 개 제거하고 큰 가지로 대간 길 벗어남을 표시해 둔다. 이번 구간은 일반적으로 이곳에서 마감을 하고 있으나 우리는 비재까지 앞으로도 두 시간 정도는 충분히 남았고 서너 개의 큰 오름을 맛보아야 한다. 제법 많은 인원이 갈령으로 탈출을 계획하지만 계속 진행하기로 맘을 굳힌다. 분명 큰 부상은 아니고 오름길은 문제가 없다. 천천히 평탄한 오름길을 뒤처지며 따라 오른다. 삼십여 분 만에 작은 암봉 두세 개를 올라서니 못제로 향하는 내림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헬기장을 만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신발을 벗어 본다. 왼쪽 대궐터산 봉우리 위에 구름이 몰려오며 제법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거린다.

못제

4월 9일_일_12:50

 못제로 내려가는 급경사 길에서 맨 후미를 놓친 채 평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풀어 제친 신발을 끌어내리다 보니 이젠 발끝 자락이 엉망으로 아파오기 시작한다. 남쪽 사면 양지바른 내림길에서 힘차게 피기 시작하는 진달래를 벗 삼아 육신에서 벗어나려 한다. 봄을 아직도 기다리는 참나무 숲 아래서 수줍은 듯 앞다투어 피어나는 청순함에 허드러지는 도회의 그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맛본다. 

 대궐터산에 자릴 잡은 견훤이 목욕재계하며 승승장구하던 못제 터는 5-600평 정도로 움푹 파여 산중소(山中沼)를 이루곤 있으나, 소금물을 타서 지렁이 자손의 힘을 빼앗았던 삼년산성의 황충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낮의 고요만이 못제 터를 감돌고, 어데선가 날아온 까마귀 울음 한 번 울고 서쪽 동관리 마을로 사라진다. 인적 없는 암릉길을 오르며 마지막 510봉으로 안간힘을 다하지만 이젠 오름길마저도 다리에 힘이 빠진다.


전례 없이 하룻밤을 말없이 바깥에서 보내고 들어온 아내의 눈가에 피로와 충혈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으나, 평소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성격의 아내에게 어떤 질문으로 궁금함과 섭섭함을 풀어 나가야 할지, K노인은 이불속에서 벽을 향해 등을 돌린 채 어려운 해답을 상상해 가며 누운 채로 아침상을 받았다.
이미 등교한 큰 딸애를 뒤좇아서 벌써 청계천가 교회 놀이방으로 작은 아들마저 집을 나간 늦은 아침 상 머리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없이 앉아 죄스러움을 빌고 있는 아내에게서 스스로 말머리가 이어지길 기다리며 묵묵히 수저를 놀려 반 그릇 정도의 식사를 끝낸 후 상을 밀치고 아내의 손을 마주 잡았다.
“미안해요... 어쩌지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수 시간으로 느껴질 듯한 침묵 끝에 고개를 들다 말고 엎어지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내의 등을 보듬으며, K노인은 아무런 상상이 일지 않는 스스로의 무감각에 더한층 놀라고 있었다. 전쟁 중에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천우신조로 만난 아내와 10년이 채 못된 고통의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단 한 번도 서로의 마음에 상채기를 남길 만한 말 한마디, 행동거지를 보이지 않았던 조용한 아내였다. 너무나 익숙해진 생활로 그렇게 무디어진 그로서는 갑작스런 일로 그동안의 서로 믿고 의지함에 의심을 일으킬 만큼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서둘지 말고... 그냥 천천히... 차분히....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그렇게 답답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계속 흐느끼는 아내의 등을 쓰다듬고만 있었다. 바깥에서 편물을 맡긴 손님의 가게문 두들김으로 밥상을 들고나가는 아내의 발걸음이 쓰러질 듯 힘이 없어 보였다. 
비재 진달래


4월 9일_일_13:40

 510봉 급경사 된비알을 힘겹게 올라서니 구병산 아래로 펼쳐지는 비재 고갯길이 낭떠러지 같은 내림길 아래 한 줄을 긋고 있다.  벌써 도착하여 즐겁게 상을 펼치고 즐기는 선두조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참 길어 보이는 구간이었다. 일찍 나서 암중모색으로 기어오른 문장대 기암 능선의 밤길이 새로운 느낌으로 되살아 나고 살금 거리는 발끝 아래서 피어나는 노란 야생화 꽃잎을 바라보며 고통의 웃음을 흘린다. 벌써 다음 구간 2박 3일의 속리산 국립공원 대야산이 그립고, 희양산, 조령산을 4주 연속으로 넘어야 할 텐데, 부디 빨리 낫기를 바라본다. 

 옆으로 번갈아 서며 게걸음을 걸어 급경사 내림길을 걸어 내려 철계단을 딛고 지난 구간에서 시산제를 지냈던 공터에 다다르니 건네주는 미역국을 마실 힘도 없다. 그냥 멍하니 앉아 동동주 두어 잔을 들이켜니 그런대로 살만하다. 

 "친구여, 가슴을 펴라, 하늘은 저기에 퍼렇게 있질 않은가.."  (신동엽) 

 잔뜩 흐리던 하늘이, 비재를 벗어나고 삼가저수지를 지날 무렵엔 맑게 개이고, 대간 길의 마지막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울이라는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2006.4.11 배 기호

(집안 喪事로 인하여 기록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두 14회 화령지구 종주_3 :신의터재-비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