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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22회 소백산 종주(2)(죽령-고치령)

06년 6월 24 - 25일

6/24      22:00    신도림 출발

6/25      02:50    죽령 출발

            04:00    제2 연화봉(1357.3)        10분 휴식

            04:50    연화봉(1,421 천문대)    10분 휴식                          6.25km

            05:40    제1 연화봉(1,394.4)   

            06:30    비로봉(1,439.5)            10분 휴식                         4.43km

            07:00    국망봉 직전 안부          아침식사 30분

            08:15    국망봉(1,420.8)                                                  3.08km

            08:30    상월봉

            09:00    늦은맥이재 (1,272 신선봉 갈림길) 15분 휴식

            09:50    1060 안부

            10:00    좌석리 연화폭포 갈림길         10분 휴식

            11:20    마당치                                                8.27km   

            11:50    형제봉 갈림길

            12:20    고치령                                                2.8km

            13:30   (좌석리)                                             (5.0km)                        

                           총 9시간 30분            24.83km(-5.0km)  

오리풀, 구슬댕댕이


6월 24일_토_22:00

 작년 1월 구정을 앞두고 친구들과 함께 추운 날씨에도 소백산 눈길을  함께했던 물푸레는 이번 대간길을 동행하려 했으나, 또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고, 4개월간의 초임장교 훈련을 마친 배소위는 3일간의 휴가를 받아 바쁜 일정으로 얼굴을 좀체 보여주질 않는다. 다음 월요일 예비군 배병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작은 이슬이 파티를 기대하며, 신도림으로 향하는 마음은 또다시 설레이며 부디 장마철의 변덕을 잘 피해나가길 빌어본다. 다행히 장마전선이 남쪽으로 물러선 듯 무덥긴 하나 비를 뿌리지는 않는 꽤 좋은 날씨의 저녁이다. 

 월드컵 열기로 온통 나라전체를 물들이던 붉은 열정들이 부디 제 갈길을 잘 찾아, 잠깐 동안의 휴식과 즐거운 잔치로 기억되길 바란다. 과연 이러한 열정이 축구경기라는 게임과 운동을 사랑하는 참된 응원으로 이어져야 할 텐데.. 또다시 냄비처럼 식어가는 K-리그에 대한 무관심은 4년 후 어떤 장탄식과 우스꽝스런 대한국민의 모습으로 전 세계에 비춰질 것인가.. 민족이란 결코 국가 지상의 배타적인 뭉침으로 그 영혼을 살찌우지는 않을진대,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피해자의 경계심으로 비춰질 만큼 주관적인 시각으로 이 지상의 여러 세계인들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주 만에 다시 나서는 대간 여행길에 자유인 대원들의 활기가 넘쳐난다. 7월의 태백산 지구 3주 연속 산행과 지리산 특별산행까지 5주간 연속 행군을 위하여 체력을 잘 유지해야 될 것이다. 용인 휴게소를 들러 커피 한잔을 나누며 쳐다보는 하늘엔 여전히 별이 가려져 있다. 단양 톨게이트를 벗어난 산행 버스는 지난 구간 즐거운 하산 장소인 죽령 옛 고갯길에 한 밤을 싣고 멈춘다.(6/25 01:30) 1시간여 동안 피곤한 몸을 의자에 누인 채 짧은 단잠을 더 청해 보지만 설레이는 발길들이 오래 버티질 못한다. 이미 다른 소백산 종주팀 한 팀이 먼저 들머리로 올라선다. 

연화봉 중개소, 천문대


6월 25일_일_02:50

 준비체조를 마친 뒤 죽령 휴게소 음식점 왼편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길 들머리를 올라서는 발걸음은 가볍기는 하나, 왠지 2시간여 밟아 나가야 할 딱딱한 인공의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도 자꾸만 올려다 보이는 오른쪽 대간 마루금이 더욱 또렷이 다가오고, 자연의 길을 차지한 거대한 폭력이 결국 인간 스스로의 자해로 느껴지니, 이 땅, 이 천하의 영혼들이여, 부디 이 밤을 지나고 밝아 오는 새벽에는 저 푸르러진 녹음처럼 풍부한 사랑으로 서로를 맞볼 수 있기를.. 다행히 진부령 지나 향로봉길처럼 마루금을 온통 뒤덮지는 않은 채, 언젠가는 열려질 그 길을 걸음마다 올려다보고 또 본다. 

 북쪽 방향의 꽤 가파른 포장길을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1시간여를 밟아 오르는 동안 왼쪽 단양 시가지의 밝은 삶들이 골마다 소담스런 불빛을 반짝이며 연화골을 따라 함께 오른다. 兩白之間 生人之地(정감록)라 했던가..蓮花浮水 명당터(풍수지리서)라 했던가.. 신라 진덕여왕 때 삭주도독사 술종공이 竹旨郞을 노래하며 죽령으로부터 날아오른다. 30여 분 만에 1,012봉 안부를 지나고 선두조의 걸음이 유난히 속력을 내는가 싶으며 1시간 만에 중개소 갈림길에 도착하여, 마루금 진행을 아쉽게도 포기하고 왼쪽으로 우회하는 제2 연화봉 단양 쪽 전망대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바람이 심상치 않게 이는가 싶더니 이내 꽤 굵은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한다. 

 (04:00) 배낭커버를 씌우고 우의를 꺼내 입으니 다소 쌀쌀하던 高地의 바람을 막아주며 따뜻함을 느끼긴 하지만 빨리 비구름이 걷혀지길 간절히 바래본다. 후미조를 기다린 후 송신소 중개탑을 우회하여 북동으로 꺾여지는 평탄한 내림길에서 가득 준비한 배낭 속의 호스달린 물통에서 넘쳐흐른 물이 바지 뒤를 적시는 바람에 우의 안쪽에서 폭우를 맞은 꼴이 되어 가늘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우의를 도로 벗어 배낭에 집어넣는다. 이미 선두조의 빠른 행렬은 사라지고 서너 명의 다른 팀 후미조와 동행을 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녘을 열어주는 밝음이 사위에 퍼지면서 오른쪽 어깨 위로 첨성대 모양의 천문대 관측소 건물이 검은 능선길에 우뚝 솟는다. 천문대 정문 못 미쳐 길가 공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동트는 단양 시가지를 굽어 보니 불빛이 맑게 다가와, 흐린 날씨에도 다행히 안개가 없는 탓에 오늘은 꽤 좋은 시야를 확보하는 행운이 예감된다.   

연화봉에서


6월 25일_일_04:50

 이미 날이 밝은 연화봉 아래 천체 관측소의 웅장하고 꽤 멋들어진 시설물을 잠시 둘러본 후 가로지기 나무 담장을 넘어 연화봉 정상으로 올라서서 표지탑에서 사위를 둘러보니 조망이 깨끗하고 멀리 남으로부터 지난 구간의 두솔봉이 뚜렷하게 다가온다. 오른쪽 희방사 지구의 새벽은 아직도 고요한 잠에 빠져 있는 듯, 스님의 새벽 독경은 멀고, 잠시 검은 능선을 타고, 月江大師의 영혼이 호랑이 등을 타고 예쁜 처녀의 치맛자락과 함께 날아오른다. 아까운 '月引釋譜'의 화염 속에서 적과 아군의 구별도 없는 전장이 타오르고, 불쌍한 이 민족의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은 6.25 발생 56년째 날이다. 잊어서도 안될 비극과 잊어야 할 이데올로기가 오늘도 이 땅의 잠들지 못하는 영혼들을 듬뿍 눈물 적시게 하는데, 지금 이곳 연화봉의 새벽은 시리도록 푸르다.  

 전망대에서 북쪽 험산골골 단양 땅과 남쪽의 비옥한 영주 땅을 차례로 조망한 후, 잠시 내림길을 거치니 제1 연화봉 오름길 계단이 길게 뻗어 누운 채 새벽의 젖은 풀섶에서 흙냄새가 섞인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싸아한 6월의 여름을 풍긴다. 멀리 소백산 최고봉 비로봉이 새벽 동녘을 배경으로 멋진 구름을 머리에 휘 감싸고 , 일출마저 잠시 보여줌을 망설이며 어서 오라는 듯 밝아온다. 디카를 잡은 손이 발걸음을 더디게 하며 오른쪽 철쭉 군락지는 한 껏 뽐냈을 초여름의 화려함을 감춘 채 녹음 속으로 짙어져만 간다. 멀리 삼가지구 저수지가 크게 들어오는 계곡에서 새벽안개가 옅게 자리한 채 서늘한 바람만 올려 보내는 상쾌한 산행 날씨에 계속 감탄하며 계단을 세어본다.  

 (05:40) 북쪽으로 이어지는 긴 계단을 밟고 올라선 연화 제1봉은 짙은 녹음에 가려진 채 공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이렇게 높은 고도에서 관목 숲을 이룬 고스락은 대간 길에서 그리 흔치 않다. 시간이 적당하다면 피곤한 여름 발길을 충분히 쉴 수 있을 법하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북동쪽 비로봉으로 향하는 마루금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작은 오르내림으로 여러 가지 야생화와 함께 아름다운 들길을 보여주고 있다. 소백산의 여성스러움에 못생긴 남성네도 한 껏 부드러운 애무를 맛보는 아침이다. 간간이 장식처럼 솟아있는 거친 살결의 바위들이 제각 끔 조각작품을 이루며 그 이름 짓기를 바라면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비로봉 가는 길의 아름다운 형제바위


6월 25일_일_06:00

 제1연화봉을 지나 짧은 내림 후에 1382봉을 지나면서 점점 걸음이 늦어지며 다가오는 비로봉의 구름배경에 감탄하고, 길섶을 장식하는 야생화들과 사귀다 보니 어느새 홀로 산행을 하고 있다. 빼어난 꽃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는 포근한 능선길에서 넓은 초원의 아량을 배우고, 도회에서 온갖 풍상으로 각진 마음을 포근히 적셔 담아낸다. 어디선가 새벽잠을 깬 찌르레기 소리마저 청아하게 들려온다. 내 무엇을 크게 바라고 전력을 투구하며 각박한 서울 살이를 애써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진대,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내 한 몸을 이끌고 자릴 잡을 그곳은 이처럼 포근한 풀섶을 가까이에 두고 있겠지.. 꿈도 녹아들고 한도 녹아들은 우리네 땅 어느 한 귀퉁이에서, 미련 없는 한 생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걸어 오를 산이라도 가까이 있으면 더욱 좋으리라.. 


 타쉬겐트 브로드웨이 한가운데의 노변 가라오케에서 귀에 익은 한국노래의 가락이 울려 나온다. 이국적인 젊은 처녀들이 한국노래를 흥얼거림이 왠지 신기하기도 하고, 한류의 큰 힘을 느끼긴 하지만 어색한 느낌이다. 내 스스로 내 조국의 강대함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지금 K노인과 1960년대를 회상하고 있기 때문일까.. 타쉬겐트에 억류되었던 일본 병사들의 강제노동으로 지어졌다는 나보이극장 앞에서 경복궁 앞에 자리하던 중앙청 모습과 많이도 닮은 느낌을 받으며, 지난날 베옷 적삼을 입은 채 돌을 쌓던 우리 민족과 일본 군복의 병사들이 오버랩되어 혼란스럽다. 이것이 현대 역사의 징표라면, 중앙청으로 쓰이던 슬픈 역사의 산물도 증거로서 보존했어야만 옳지 않았을까...
 “마르크스의 몇 마디가 5.16 군사혁명을 정당화시켰다면.. 참 우스운 얘기가 되겠지... 소위 민족 지도자로 자처하는 정치꾼들은 자유를 부르조아적인 속임수라는 말꼬리로 그의 이론을 써먹었지.. 부르조아적인 자유가 속임수가 될지언정 결코 모든 자유가 빵을 위해 유보되어서는 아니 되었는데.... “
 자유보다는 먹고사는 일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는 ‘우선 큰 케이크’ 담론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경제 개발을 위한 자유의 유보라는 논리가 서서히 힘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겠다는 밀실에서의 공약은, 소위 좌익 공산주의 지성인들이 불신하는 문화 지배 논리, 즉 노동자와 배치된다는 의미에서 자유의 유보를 받아들이는 모순된 정치질서를 적어나가고 있었으니 훗날 비극의 모태가 될 수밖에...
 그렇다, 우리가 바라는 자유는 특권적인 무질서가 아니다. 노동자의 희생 아래 이루어진 19세기적인 부르조아적 자유가 결코 아니다. 정의로운 질서를 가지고 모든 국민들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비특권적인 출발이 필요한 것이다.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마저도.. 물론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특히 이웃들의 자유와 충돌할 경우에는.. 절대적인 자유란 없을 것이다. 단지 그렇다고 하여 국가와 민족과 또는 집단의 강령들에 의해서 그 대의(大義)의 명분으로 자유의 유보를 주장하거나 정당화 시킴은 결국 독재자의 논리로 전환되는 정치적 폭력을 경험했던 것이다. 
1961년 3월, 새 학기를 한 달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새로 설립된 공업학교에서 설계를 가르치기로 되어있던 K노인은, 학교 사정상 영어도 맡을 만큼 모자라는 교사직을 다행스레 배치받아 여러 가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불과 한해도 지나지 않은 학생 혁명의 완성을 위해 혁신 동지 총연맹을 결성하고 노심초사하던 유림 선생은 다음 달 고려대에서 있을 1주년 기념식에서 새로운 정치 노선의 발표를 위하여 온 겨울을 칩거하며 골몰하고 있었고, K노인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당의 업무들을 정리하여 후배에게 인계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해방 후 내가 쫓아다녔던 소위 정치적인 엘리트로서의 자유를 위한 행동들이, 어린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를 위한 외침에 비해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하는 회의를 느낀 게지... “ 그가 회의하는 관념적인 자유를 위한 노력들이 현실적인 자유를 위한 투쟁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꼈고, 결국 소수 엘리트에 의한 혁명적인 리더쉽이라는 것이 20세기의 민주국가에서 허망한 외침이 되어가고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성숙한 40대로서 한 가장으로서 조용한 교사 생활을 꿈꾸며 작은 행복을 꿈꾸는 소시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1시간 남짓을 걸어 나가 비로봉이 마주 보이는 안부에서 작년 겨울 하산길로 택했던 천동 계곡길이 나눠지고, 그 당시 연화봉으로 향하던 종주 팀들을 부러워하던 기억이 새롭다. 녹아드는 눈길에서 아이젠을 신었다 벗었다 하며 참 힘들게 내려갔던 기억들.. 오늘 물푸레와 함께 하질 못한 것이 더욱 아쉽다. 넓은 주목 군락지가 초원처럼 평원을 이루고 있고, 빨간색 관리사 겸 대피소 지붕이 초록을 배경으로 환히 눈에 띈다. 갈라지는 보호 목재 계단길에서 대간 마루금에 한 치라도 가까운 오른쪽 길을 택해 비로봉을 향한 발걸음을 빨리하니 양손의 스틱이 힘차게 저어진다. 500년 주목들이 부디 잘 보호되어 천년 세월을 아름답게 간직하기를... 무심한 발길에 수줍은 솜다리꽃(에델바이스) 한 움큼이 계단 밑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비로봉 일출 직후-구름에 가려진 태양아래


6월 25일_일_06:30

 小白山 毘盧峰.. 그 이름만큼이나 이 땅을 두루 잘 비추이며, 빛나는 봉우리.. 뽐내지 않고 부드러이 여러 봉우리를 보살피는 法神佛 毘盧蔗那佛의 이름이 어울리는 고스락에서 잠시 생각에 젖어본다. 무릇 중생을 이끌어 줄 진정한 등대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힘차게 고함치며 그 옛날 충심으로 받들어 따르던 이 땅의 선각자들이 일구어 놓은 오늘의 역사는, 질곡 된 아픔을 죄다 치료해 낼 그날이 가까이 와 있는 것일까.. 자연의 섭리대로 말없이 웃으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밝혀줄 부처는 곳곳에 있을진대.. 오늘 전쟁의 비극을 생각하는 걸음 내내, 못된 이른바 지도자들의 그릇된 자기 이론이 선한 이 땅의 백성들을 얼마나 궁핍하고 혼란스런 역사로 몰아가고 있는지.. 인간이 인간을 계도할 수 있는 것일까.. 

 비로봉 표지석 뒷면에서 剛中 徐拒正이 쓴 한시를 <小白山>을 읽어본다. 


小白山連太白山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透이*百里揷雲間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사이로 솟아있네*(비스듬히 이어질 이)分明畵盡東南界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地設天成鬼破간*     하늘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아낄 간)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입을 다물고 현실과 타협하여 그가 누렸던 부귀영화와 넘쳐나는 여유가 소백정상까지 그 풍요로움을 이어 왔던가.. 그들의 스승 이계전에 동문 수학한 梅月堂 金時習이 생육신으로 어려운 삶을 여위 하고서도 훗날 역사의 조명을 받을 수 있었음에 어떤 보람을 배우고, 내 아들들에게 어떤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 아니 우선 나의 삶은 어느 쪽에 가까운 것일까.. 天惠夢遊處 소백산 기슭에는 그 시대의 삶이 혼돈스런 대립자들이 훗날 이 공간의 영원한 영혼들의 어울림마저도 대립되는 것일까.. 

 남으로 비로사를 거쳐 비로폭포에서 올라오는 삼가지구 오름길을 바라보다가 멀리 순흥면 소수서원이 있음 직한 곳을 향해 무언의 찬사를 보낸다. 예나 지금이나 학문도 먹고살만한 여유가 바쳐주는 곳에서 잉태되는 것인가.. 비옥한 영주땅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이 풍요로운 삶을 이어가고 잘 먹고 잘 배우고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와 지기를.. 6.25 날 빌어본다. 

국망봉에서


6월 25일_일_07:00

 비로봉에서 광활한 주변을 한 껏 조망하고 5분여 북쪽으로 난 보호 계단 길을 밟아내리니, 작년 어의계곡에서 올라오던 삼거리길에 다다른다. 오른쪽 대간길부터 보호 계단이 사라지면서 모처럼 자연의 흙길로 바뀌어 걸어가니 한결 산행의 즐거움이 더해지고, 지지난 해 겨울 그리도 멀어 보이던 국망봉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모처럼 꽤 긴 내리막을 밟으며 경등산화 발바닥에 모래가 밟힌다. 잠시 길섶에 주저앉아 신발을 고쳐 신고 예정보다 빨라지는 걸음에 종주 등산길의 단련되고 향상된 내 자신을 느끼며, 새삼 앞으로의 더 많은 대간 정맥 길에서 밟아 나갈 이 땅의 역사들이 더욱더 가까워짐을 느낀다. 

 국망봉이 올려다 보이는 안부에서 비로봉 내림길을 조망하며 느긋한 아침 식사를 즐긴다. 지난겨울 동안 식사 때마다 추위에 떨면서 한 잔 따스한 물을 끓이던 수고로움이 없어지고 간편한 도시락으로 배고픔과 먼 길의 힘을 채우는 식사시간이 즐겁기만 하다. 이제 대간길 반을 훨씬 넘어서고 태백을 지나며 강원도에 들어서니 더욱 진부령이 가깝게 느껴지고, 이렇게 다정하고 살가운 산행 친구들과 계속 이어질 정맥길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캔 막걸리 한잔이 덥지 않은 날씨 탓에 그 효과가 반감되지만 역시 땀 흘린 뒤의 한 잔 막걸리는 내 기쁨들 중의 하나다. 

 식사를 마친 후 1328 안부를 올라서니 국망봉으로 오름길이 잘 정비되어 반겨주고, 초암사 갈림길을 지나 아름다운 바위들로 장식된 정상을 빠른 걸음으로 내딛으며 올라선다. 멋진 정상 암릉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자리한 정상표지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옆에 있는 안내문에서 영혼을 접해본다.(08:15)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제천 백운면에 '東京邸'를 짓고 칩거할 때, 월악산의 덕주 공주를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슬퍼하던 마의태자의 영혼을 적고 있다. 한편 조선 선조 때 수천 장 배 순이 돌아가신 임금을 그리워하던 장소로도 전해지기도 한다. 


상월봉 가는 길-첩첩산경


6월 25일_일_08:30

 국망봉을 지나 펼쳐지는 상월봉 내림길은 멀리 동쪽으로부터 밀려오는 겹겹의 산마루 파도들로 장관을 이룬다. 다소 흐린 날씨가 일구어 내는 또 다른 절경이요, 이것이 바로 이 땅의 영혼들이 골마다 살아 있는 진정한 산수화임에 틀림이 없다. 10여분을 밟아 내린 후 왼쪽 우회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상월봉 정상을  올라서니 멀리 신선봉 갈림길의 늦은 맥이재를 향하는 행렬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 천태종 구인사의 上月大師가 이곳에서 절터를 골랐던 모양이나, 좋은 전망에 비해 정상표지석은 없고 단지 내림길이 고약하게 위험하여 우회길을 만든 모양이다. 간이 로프라도 하나쯤 설치했으면 좋겠다. 

 (09:00) 신선봉 갈림길의 늦은맥이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후미조와 합류한다. 비교적 빠른 진행에 날씨마저 여름을 식혀주니 배낭 속의 식수가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는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여유로운 내림길에서 한결 발걸음이 가볍다. 오른쪽 안부를 올라서니 구인사 길은 출입을 통제하고, 오른쪽으로 서서히 내림길을 밟으니 1시간여의 잡목 숲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후반 구간의 발길이 더욱 편하고, 발아래 묵은 낙엽이 양탄자를 밟는 기분으로 발바닥에 쿠션을 더해준다. 대간 초반에 고생스럽게 괴롭히던 평발바닥의 화끈거림과 따가움이 대미산 이후로 없어지며 긴 시간의 행군에 많은 개선을 느끼니 새삼 신기함을 느낀다.  

 (10:00) 1,060봉을 지난 후 연화폭포 쪽 좌석리 갈림길에서 10여분 휴식을 취한 후, 탈출로 점검차 일부 인원은 계곡으로 향하고,잡목 숲을 지나 1시간여의 지루한 숲 속에서의 전망 없는 트래킹을 계속하여 1032봉을 내려서니 마당치에 도달하고 꽤 넓은 공터에 이름 모를 잡초만 가득하여 움푹 파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11:20) 스쳐오는 녹엽에 피곤해져 오는 시선을 멈춘 채 잠시 휴식을 취한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금성대군의 영혼이 몸을 누이고 이곳 숲 속으로 피신했음직하다. 

마당치 가는 길에서


6월 25일_일_11:50

 마당치를 지나 형제봉 갈림길까지 꽤 가파른 오름길을 모처럼 트래바스 하면서 30여분을 마지막 힘을 쏟는다. 소백의 큰 줄기를 벗어나기가 그리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며 부드러운 발길로 이어진 종주길을 마지막 큰 오르내림으로 마감을 지어준다. 왼쪽 형제봉으로의 오름길을 버리고 급경사 내림길로 이어지며 잠시 칼바위 봉우리를 올라섰다가 다시 우회길로 내려선다. 헬기장을 지나 고치령 0.9km 이정표가 반갑다. 길섶의 야생화들이 작별을 아쉬워하며 작은 몸짓으로 눈 맞춤을 하고 오늘 구간 처음으로 검은 등 뻐꾸기 네박자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겨울 옷을 벗지 못한 3월 말, 새 학기에 여고에 진학하는 기쁨으로 제 어머니와 함께 동대문 부근에서 잘 골라온, 헌 옷이지만 깨끗한 검정 교복에 하얀 칼라를 떼었다 부쳤다 하는 큰 딸아이의 얼굴에서 만족함을 느끼며 K노인은 잠시 행복감에 젖어 보기도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며 이내 머리를 돌린다. 다행히 구김살 없이 잘 커서 이젠 제법 어른티가 날 정도로 훌륭한 여고생이 되고, 게다가 광화문 부근 일류학교에 합격을 했으니 더 이상 걱정될 일은 없을 것이다. 어린 남동생을 업어 키우던 4,5년 전의 정릉시절에서, 이젠 개구쟁이 국민학생이 된 이후로 함께 공부를 돌보아 주며 가게일로 바쁜 제 어머니를 충분히 도와주는 착한 딸이 대견스럽다.
 단지 K노인이 새로 다니게 될 영등포와 딸아이의 학교가 꽤나 거리가 멀어 집을 노량진 부근으로 옮기려 하나 가게 일거리가 걱정되는 관계로 차일피일 미루며 결론을 내질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이젠 내 월급도 고정적으로 잘 나올 테고.. 당신 몸도 너무 야위고... 요즘 특히 안색이 좋질 않으니 당분간 가게 일은 접는 게... “
 가까스로 아내를 설득하여 2,3개월 후에는 가게를 정리하고 이사를 하기로 했지만, 아내는 재봉틀과 편직기를 매일매일 기름칠하고 닦으며 애써 섭섭함을 감추고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작은 보금자리를 지탱해 주고 행복을 짜깁든 유일한 생산설비였다.
 개학을 불과 일주일도 남겨두지 않은 휴일 저녁, 대구에서 올라온 사범학교 동창생의 연락을 받고 모처럼 명동 부근에서 만남을 가지기로 하고 홀가분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평소 K노인의 학교 복직과 대구에서의 선거활동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구인지라 별 거리낌은 없었으나, 왠지 동행한 낯선 이가 깡마른 얼굴에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데도 짧은 머리를 하고 친구에게 형님이라 부르는 것이 마음에 다소 걸리는 기분으로 몇 달 동안의 안부를 나누며 한 순배 막걸리 잔을 돌렸다.
 “K, 자네 학교로 돌아가는 것, 한 학기쯤 미루면 안 되겠나?”
 엉뚱한 요청에 K노인으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물론 좋은 일자리를 알선해 줄 것이라고는 짐작이 가지만,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고 불과 며칠을 앞둔 시점에서 그러한 제안을 할 사려 없는 친구는 결코 아닐터인데.. 뭔가 그의 어려움이 짐작되면서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K노인의 발걸음은 천근 만근이 되었다. 명동에서부터 청계천을 따라 하염없는 발걸음이 이어지며, 문득 전쟁 중 뒤쫓는 이 없는 도망길에서 경험했던 덕유산 자락의 밤길이 다시 살아났다.
 한 인생에서 밀려왔다 쓸어가는 큰 파도들이 수없이 반복이 되겠고 모진 생명은 살아 있겠으나, 해일 같은 급랑 속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운명들을 그냥 받아들여야 할지 마주쳐 헤쳐 나가야 할지, 그로서는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혁명.. 혁명....”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빵... 자유... 부패... 빨갱이... 국가... 민족... 참으로 익숙하고 많은 외침과 담론으로 잘 정리되어 가고 있던 단어들이 하루아침에 생소하고 결코 입에 오르내릴 수 없는 단어들과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무서운 용어들로 바뀌어 뇌리를 맴돌고 있으니.., 벌써 일 년 동안 진행된 혁명에서 또다시 무슨 혁명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마지막 급경사길을 내려서니 힘겹게 고갯길을 올라오는 작은 차량들의 안간힘이 들려오고 다시 인간의 삶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짐을 느낀다.


고치령 산신각


6월 25일_일_12:20

 긴 소백산 종주의 마지막 발걸음을 수수하게 생긴 소백지장군 장승과 그 수졸 장승이 반겨준다. 고갯길 건너편에 새롭게 단장된 산신각이 꽤 화려하다. 북쪽 영월 땅에서 생을 접은 단종은 태백산 신령이 되어 태백천장군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에 모셔져 있고, 남쪽 순흥 땅에서 복위를 도모하다 안동에서 생을 마감한 금성대군은 소백산 신령이 되어 소백지장군의 호위를 받는다. 

 북쪽 영월 하동면에 김삿갓(金 笠) 묘 부근의 곰봉을  오르고 있을 산케 친구들에게 핸펀을 날리려 시도해 보지만 높은 고개까지 아직은 전파가 오르기가 힘든 모양이다. 고치령(천적령) , 절터고개 아래쪽 샘물터에서 한 모금 물을 마시며 좌석리까지의 발품을 들어줄 멋진 1.5톤 트럭을 기다려 짐같은 몸을 실으니 십리길 내림길이 단숨에 접어진다. 

 좌석리 신작로 옆 맑은 개울에서 땀을 씻으니 한 여름의 더위가 가져다준 행복을 느낀다. 


2006.6.26 배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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