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년 7월 8 - 9일
7/8 21:20 일산 정발산역 출발
7/9 02:30 좌석리
03:00 고치령 출발
950-877-830-854봉
04:05 미내치
05:15 1096.6(헬기장)
05:50 마구령 (810) 10분 휴식 7.6km
894-1057봉
07:00 1057 헬기장(30분간 아침식사)
934봉
08:30 갈곶산 (966) 4.9km
08:50 늦은목이 (10분 휴식) 1.03km
09:50 선달산 (1236) (10분 휴식) 1.77km
1246-1160-1125봉
11:50 박달령 (1009) (20분 휴식) 5.1km
1015-987봉
13:10 주실령 갈림길
13:20 옥돌봉 3.0km
14:20 도래기재 2.8km
11시간 20분 26.2km
7월 8일_토_21:00
4개월 동안의 초급장교 훈련을 마치고, 열흘 전 근무지 부대로 배속받은 배소위가 잠시 외출을 나와 침구와 옷가지를 챙겨 저녁을 일찍 먹고 부대로 복귀를 서두른다. 오늘은 회사랑 약속이 있는데... 경기 북부 지리에 익숙지 않은 물푸레에게 맡기기도 그렇고, 시외버스를 갈아타며 짐을 들고 혼자 보내기는 맘이 편치를 않겠다. 서둘러 산행 배낭을 꾸리고 물푸레와 함께 드라이버를 나선다. 자유로를 지나 금촌과 파주역을 거쳐 1시간 만에 문산 가는 길목의 부대 정문 앞에 내려주니 안심이 된다. 돌아오는 길에 일산에서 산행버스를 기다리며 캔맥주 한 개를 사들고 모처럼 여름밤의 정발산 공원 나들이를 즐긴다. 小暑가 지났으나 아직은 장마가 끝나지 않아 불볕 여름은 좀 더 있어야 시작되겠지만 젊은 처녀들의 나들이 옷차림은 한 여름이다.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가 보기도....
대간행이 없었던 지난 주말은 숙모님의 장례식과 대간 산우의 큰 사고로 인하여 정신없는 며칠을 보내야만 했었다. 무릇 인간의 삶이란 그 생명의 끝을 향한 이어짐이겠으나, 힘겹게 살아오고 아픈 기억 들로 점철된 영혼들이 영원한 휴식을 찾아 떠난 자리에는 항상 크고 많은 恨을 남기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저 공원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젊음의 싱싱함과, 한 여름 밤하늘을 가득 채우며 흩어지는 행복한 웃음들로 가득 찬 삶에 대한 바람이 없으리요만은, 지난 세기의 초반을 살아온 우리 이웃들에게는 질박한 환경과 급류처럼 흐르는 혼란 속에서 웃을 수 있는 시간들도 많지는 않았다. 이제 이 세대의 여유로움을 뒤로한 채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 곁에서 먼저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산에서 출발하는 산우들과 반가움을 나누고, 오랜만에 한강변의 야경을 즐기며 인공의 불빛이 사라질 태백을 향해 떠나는 맘이 설렌다. 양재역에서 탑승한 장포드는 회사랑에서 이슬이 없는 멍게를 힘겹게 즐긴듯하다. 조령산 구간 이후 계속 이어지는 동행에 참 고맙고, 겨울이 시작되는 날 진부령에서 얻어질 우리들의 자유로움을 함께 나누며 얼싸안을 날이 기다려진다. 태풍의 영향으로 우중산행이 예상되는 가운데 단양 부근에서 세차게 내리든 빗줄기가 풍기 I.C를 벗어나 좌석리에 도달하니 매우 가늘어지니 다소간 안심이 된다. 제발 이 정도로만 이어질 수 있어도 다행이다. 태풍이 밀어 올리는 바람보다 빠르게 걸어갈 수밖에.. 고치령 들머리를 향해 1.5톤 추럭에 몸을 실으니 연화골 계곡을 가로지르는 비바람이 얼굴에 차갑다.(7/9 02:30)
7월 9일_일_03:00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고치령 태백장승의 여유로운 환대를 받으며 우의 대신에 방수 자켓으로 작은 비를 피하려 복장을 갖추고 있자니, 단종이 잠든 산신각에서 코골이가 심하다. 비를 피해 비박하는 어느 산객이 전날의 피로한 발품을 소리 내어 고하는 모양이다. 금성대군의 뜻은 이루지 못했으나, 태백산 넘어 있는 고개와 함께 일명 建義嶺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한 많은 고개를 뒤로하고 백두를 향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언덕 위 헬기장을 지나고 950봉을 넘는 첫 워밍업에서 살짝 젖어드는 땀이 꽤 좋은 느낌이다. 이 정도 출발이면 몸 상태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단지 주실령 하산 계획을 1시간 정도 연장하여 옥석산 넘어 도래기재로 바꾸었으니 꽤 긴 거리를 걸어야 하는데 마지막 발걸음이 염려가 된다.
속리산 이후로 생긴 인대 염증이 잘 낫질 않아 발목 짧은 트래킹화로 버티는 동안, 잘하면 댓재까지는 육산으로 이어져 그런대로 견뎌낼 수 있겠다. 작은 오르내림으로 877,830,854봉을 차례로 넘어 어둠 속의 미내치(美乃峙)를 지나지만(04:05) 안개와 녹음에 가려진 풍광은 그리 아름다운 줄을 모르겠다. 1096봉 오름을 앞두고 공터를 만나(04:25) 잠시 숨을 고르며 물 한 모금을 마신다. 오늘도 날씨가 축축하여 배낭 속의 물병이 또 여유로울 것 같다. 이어지는 1시간 남짓의 오름길에서 제법 된오름을 맛보며 숨이 차기도 하지만 촉촉이 젖어드는 낙엽과 솔잎 덕분에 많이 미끄럽지는 않아 다행이고 폭신함마저 느끼니 우중 산행 치고는 그런대로 괜찮은 조건이다. 아직은 신발도 젖어들지를 않는다.
7월 9일_일_05:15
1096봉 넓은 헬기장 공터에서 차츰 밝아오는 새벽을 느끼며 숨을 고르자니, 선두대원이 멧돼지 6마리 출현을 무전으로 보고한다. 밤길의 멧돼지는 난적이다. 후미조와 합류하여 대열을 뭉치며 조심스럽게 마구령으로 하산길을 밟아 내린다. 차츰 밝아오는 안개 낀 숲 속에서 새벽잠을 깬 새소리들이 부산스레 들려온다. 새로운 목소리의 첫선을 보이는 청아함도 맛보며 춘양목의 멋진 우람함도 함께 즐긴다. 깨끗하게 씻겨진 숲 속을 다소 미끄러운 걸음으로 조심조심 내림길을 걸으니 총대장이 아침 식사하러 보낸 멧돼지는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마구령 잘 다져진 비포장 도로에 내려선다.(05:50) 옛 기록에 馬兒峴으로 기록된 이곳이 마구령으로 불리어 짐은 메기재의 借音說 또한 그럴듯하다.
7월 9일_일_06:00
부석면 임곡리와 남대리를 잇는 이 고개는 비포장이지만 충분히 차량이 다닐 수 있어 어래산 아래 월과 접한 남대리 산중 마을의 면소재지 나들이길은 아쉬운 대로 될만하다. 잠시 휴식하며 땀과 비에 젖은 우의들을 접어 넣고 조금씩 개이는 날씨에 매우 흐뭇해한다. 카메라들을 꺼내 안개가 걷히길 바라며 늘은 몇 장 건지려나 하고 기대도 해 보며 10여분 만에 894봉에 올라서니 걷혀가는 구름 속에서 봉황산 어 멀리 봉화 땅이 멋진 모습으로 파도쳐 밀려온다. 어제저녁 일산에서 처음 뵌 새로운 산우의 첫 대간 나들이에서 페이스 조절에 다소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하여 응급처치를 한 후 다시 마구령으로 돌아가서 탈출을 유도한다. 두 분의 동료들이 우정의 동행을 결정하여 맘이 놓인다. 어느 행이 쉬운 곳이 있을까만은 긴 시간 행로에서 속도를 내는 대간행렬에서는 자기 스스로의 속도 조절이 매우 중요하다.
1057 암릉봉을 지나면서 짧은 구간이지만 모처럼 바위를 밟아 본다. 비에 젖어 조심스레 넘어선 후에, 작은 내림길 풀섶을 헤치고 나가니 헬기장 같은 공터를 만나 아침상을 펼친다.(07:00) 4시간의 행군에 약간 쳐오는 발목을 충분히 휴식하며 훌륭한 식성들을 나누며 안부를 확인하지만, 왠지 꼭 있어야 할 사람들이 끝내 보이지 않는 슬픔 속에서 지나온 길목으로 자꾸만 시선이 머물고, 오지 않을 후미를 상상해 본다. 지리산에서 이곳까지 늘 후미를 챙겨주시던 조대장님의 말없는 모습이 그립고 아쉬운데... 어딘가에서 좋은 산삼을 발견하여 흥분하며 길을 잃었을까... 부디 그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머무시길....
7월 9일_일_07:30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끝내고 휴식 후에 934 안부를 거쳐 1시간여의 트래킹을 거친 뒤 짧은 깔딱 고개를 올라서니 작은 나무들로 가려진 갈곶산 정상에 이른다.(08:30) 남쪽 봉황산(819)으로 이어지는 길과 북쪽 선달산 대간길의 삼거리를 이룬다.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유명한 浮石寺 무량수전을 구경하려 이 대간길을 벗어 나는 수도 많다고 하지만 훗날로 모든 것을 미룰 수밖에.. 갑곳산(甲串山)이라 불리우니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가는 배가 머물렀던 선착장이던가.. 절 이름에서도 돌이 떠다니니, 은하수 건너 멀리 영혼들의 여행을 떠나는 출발지인가.. 봉황산으로 하산하여 안식을 구하려는 종점이던가... 언젠가 우리들의 영혼들도 거침없는 하늘 바다에서 자유로운 여행을 마친 후 이곳에서 닻을 내릴지도...
갈곶산정상에서 북쪽으로 90도 이상 꺾어 내리는 늦은목이재로 내림길은 매우 미끄러워 많은 바지 엉덩이들을 흙칠 한다. 꽤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오니 선달산 큰 오름을 안내하는 팻말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08:50) 그 이름도 정감이 가는 늦은 목이는 오전약수 마을로의 탈출로가 이어지고, 평소에 매우 건강하여 대원들의 사진 촬영과 도움역할을 자처하며 진부령에서 남하 대간을 완주한 대원이 갑작스러운 고통을 호소한다. 결국 총대장과 7기 동지회장이 동행하여 2차 탈출을 시도하고 선달산을 향한 오름길이 더욱 걸음을 무겁게 한다.
장마가 걷혀가는 것일까.. 잠시 맑아지는 듯하던 하늘이 다시 안개구름을 뒤덮으며 흠씬 물에 젖은 춘양목 (금강송) 멋진 곧음이 청청한 태세로 붉게 다가온다. 이 좋은 목재들을 일본으로 무수히 실어가는 춘양역 마당에서 분한 얼굴의 식민지 백성들이 터뜨리는 탄식으로 가득하다. 황장목과 더불어 이 땅에서 대접받는 귀한 보물인데... 1시간여의 가파른 오름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선두와 후미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마지막 체력을 쏟아부어야 할 판인데, 아직도 옥석산(옥돌봉)을 넘어야 할 갈길은 멀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오직 힘닿는 대로 터벅거리며 길섶 싸리나무 작은 꽃들에 위로를 받는다.
타쉬겐트에서 머물 수 있는 우즈벡 여행의 일정도 다음날 하루밖에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K노인과의 이틀 동안의 여행이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긴 했으나, 아직도 궁금하기 짝이 없는 60년대 이후의 변화들이 빠른 진도를 보이지 않아 내심으로는 초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스스로의 지난 얘기들에 골몰하고 있는 관계로 다그쳐 캐물어 볼만한 거리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잠시 케밥처럼 생긴 먹거리와 과일 쥬스 비슷한 음료수를 들고 행인들 사이로 오가며 졸라대는 초라한 행색의 소년 때문에 얘기를 중단하고 큰길을 벗어나 보스보 강 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꽤 어두워지는 시각에도 많은 시민들이 나무 아래에서 여기저기 둘러앉아 한가로운 놀이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멘트로 만든 벤치를 차지하고 앉았다.
“비록 환갑을 치르던 때 만나서 6-7년간 거의 매일을 만나 뵙던 분이지만, 막상 곁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직장을 가지겠다는 말하기가 참으로 힘들었지... 사실 그 당시까지도 유림 선생은 스스로 텃밭을 가꾸며 제기동 뒷산을 오르내릴 만큼 건강하긴 했으나, 여러 가지로 힘을 합쳐야 할 야당인사들과의 연락을 위한 젊은 사람이 꼭 필요했으니까... “
무겁게 걸음 하여 유림 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3-4일 후에 시작할 교사생활의 보람과 안정된 직장인으로서의 아침 출근길을 상상하며 제기동에서부터 동대문을 지나 청계천까지의 걸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단지 한동안 당이나 집단으로 도피하듯 감추어 두었던 스스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욕망을 느끼며, 전쟁 후 지금까지 많은 사상들의 혼돈 속에서 그나마 유림 선생으로부터 배워 온 비폭력적 자유주의와 비권력적 아나키즘에 대하여 앞으로 살아나갈 커다란 지침으로 간직하고, 당분간 정치적 환경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밤늦게 대구에서 올라온 동창생과의 만남 약속도 지키질 않았다. 아마도 당분간 만나지 않으면 며칠 전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으로 여기겠지 하면서, 뭔가 큰일을 꾸미고 있는 그들의 주체들에 대한 궁금증마저도 잊기로 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더 이상 격랑 속으로 스스로를 끌고 들어갈 용기도 없었고, 그가 바라는 작은 행복과 자유가 이젠 코앞에 다다른 시점에 어떠한 변화도 원칠 않았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온통 거리를 도배한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들 속에서 과연 그들은 사회정의를 위하여 어떤 수단을 택했던 것인가... 모든 반대파들을 제거해야만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민주사회가 성립되는 것인가.. 양심에 따른다는 그들의 주장은 과연 만인에게 동일한 것일까.. 그들의 집단을 형성하여 새롭게 시도하는 또 다른 폭력이 얼마나 많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할 것인가.. 제외되는 소수의 불행은 또 얼마나 비참한 삶으로 이 땅에 남아 그들의 행복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야 하나... 적어도 의견의 차이로 인해서 적의(敵意)를 느끼는 불행은 없어야 할 텐데...
스스로의 결정으로 영혼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삶을 꾸리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편하게 죽을 수 없다면.. 언월도(偃月刀) 같은 초승달이 청계천 맑은 물에 빠진 채 흘러갈 줄도 모르고 그와 함께 걷는다. K노인은 모처럼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택해 나가는 운명의 결정에 작은 기쁨을 맛보며, 모처럼 마흔 인생에서 뿌듯한 결실을 느끼는 기분이다. 그동안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또는 도당(徒黨)의 견지에서 이루어진 이론들이 이젠 뭔가 사회전체를 위한 봉사의 바다로 나아가는 발걸음에 실려 내일은 행복하리라 꿈꾸며 집으로 향했다.
07월 9일_일_09:50
길고도 힘든 오름 길을 거쳐 드디어 강원도 경계선에 올라선다. 무릎이 뻐근한 채로 선달산 정상(1,236) 헬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후미를 기다리나, 꽤 힘든 모양이다. 임시 선두대장을 맡은 장대장의 웃음이 공허하다. 항상 후미에서 함께 즐기던 그분을 잊을 수가 없을 테니... 일부러 선두로 책임 우는 총대장의 배려도 고맙기만 하다. 쉴 새 없이 오가는 무전 속에서 늦은목이에서 오전약수로의 2차 탈출은 무사한 모양이다. 정상다운 표지석 하나 없는 게 아쉽다. 비록 소백, 태백의 명성에 가려진 발길 드문 봉우리 일지라도 양백지간의 대표봉인데.. 그나마 산악회에서 세워 놓은 표지목 아래 높이를 표기해 놓은 것이 다행이다. 궂은 날씨에다 한 여름의 녹음에 가려진 조망은 안갯속으로 묻어 놓은 채 先達山인지 仙達山인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신선 쪽이 마음에 든다.
10여분 충분한 휴식을 마치고 박달령으로의 긴 내림길이 이어진다. 선달산에서 잠시 내려 선 후 다시 20여 분 만에 1246봉에 올라선다. 선달산 보다 높으면서 정상을 뺏긴 것은 아무래도 험한 바위를 안고 발길을 부한 탓도 있겠지만 북으로의 내림길이 평탄하여 뚜렷한 봉(峰)을 형성하질 못한 이유인 것 같다. 병풍바위에 붙은 질긴 생명의 뿌리들에 감탄하고 내 두발을 곧추 세워 힘을 주어 본다. 이후 1160-1125봉을 거치는 지루한 오르내림이 계속되며 박달령까지의 행렬이 많이 늘어진다. 아무래도 박달령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겠다. 왕바위골 하산길을 지나면서 조금씩 내림길에 속도가 붙으며 선두의 박달령 도착을 무전으로 받는다.
점점 안개가 깊어지는가 싶더니 제법 굵은 빗방울을 후두둑거린다. 다시 비가 내릴 모양이지만 우의를 꺼내기가 싫어 그냥 비에 젖기로 한다. 단지 경사진 길섶의 드러난 흙탕 속에서 온통 바지가 더럽혀지고 있으니 남이 보면 참 가관인 행색이다. 온통 세계를 시끄럽게 하는 북의 미사일 발사에 대하여 오직 이 땅의 초들만 의견이 대립되니, 참 큰일이다. 공포와 기만으로 무슨 해결을 시도할 수는 없을진대, 그 또한 강자의 그것이 아니라 약자의 무기라면 다소 그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부디 직접 부딪치고 이미 경험한 민족의 비극을 피할 수 있는 설명이라야 그 정당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희생을 무릅쓸 수 있는 민족통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또 하나의 비극일 뿐 아무런 바램도 될 없을 것이 자명하니까... 북의 동포도 내 형제이지만, 그리고 우리가 감싸 안아야 할 이데올로기라 할지라도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고집하며 모든 희생을 무릅쓴다는 일부 지도자들의 그릇된 논리를 합리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7월 9일_일_11:50
길고도 지루한 하산을 디뎌 박달령 넓은 헬기장에 도착하여 길 건너 山靈閣을 마주 보니 빗속에서 혀진 채로 오늘 누군가의 방문을 접하지 않은 외로운 느낌이다. 문을 열고 영혼들의 안부를 물어본다. 배지붕의 기와가 우람하고 탱화 없이 단장된 커다란 신령 위폐가 엄숙하고 단정해 보인다. 박(밝고 큰) 달(산, 언덕) 재는 제천의 금봉/박달도령 쪽이 알려져 있지만 높이로는 이곳이 더 높은 고개다.(1009) 또한 박달나무의 단목령(檀木嶺)도 같은 의미겠지만 억지 한역보다는 우리말이 정겹다. 선달산과 옥석산 사이에서 수많은 보부상들을 맞이하며 봉화와 영월의 소식을 물어보던 영혼들이 이젠 마루금 지나다니는 대간 꾼들에게서 무슨 소식을 들으려 할 것인가.
7월 9일_일_12:10
긴 휴식으로 많이 회복된 다리를 끌고 옥석산을 향해 오른다. 박달령에서 두 사람의 3차 탈출을 남겨둔 채 올라서는 마음이 무겁다. 1015봉과 987봉까지는 그런대로 오를만했으나, 이후 옥돌봉 직전 주실령 갈림길까지의 1시간 오름길은 매우 힘이 든다. 왼쪽으로 줄 쳐진 흰색 보호 로프가 더욱 힘든 느낌을 가져다주고, 다시 시작된 빗줄기 속에서 매우 미끄럽고 질척거리는 된오름에 기진맥진이다. 다행히 발바닥 통증은 거의 없으니 그나마 마지막까지 무난하게 버텨 도래기재에 당당히 내려서리라. 금년도 벌써 반이 지난 오늘 이제 10개월을 거치며 얻어진 대간길의 자신감이, 남은 5개월을 즐거운 마무리로 가져갈 수 있으리라 확신해 본다.
며칠간의 복잡한 갈등으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따뜻한 얘기들을 나눠주질 못했음이 미안하고, 이젠 새 학년 준비에 들떠 있을 막내가 떠올라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잠시 주춤거리며 주머니를 뒤진다. 얼마 전 새로 개업한 중화반점의 진열장에 놓여있는 커다란 바람빵이 하얀 분가루를 단장한 채 줄을 서 있다. 해방 전 구포역 부근의 중국음식점에도 똑같은 모양이었는데.. 결국 먹어보지 못한 채 그곳을 떠나곤 했었다. 크고 누런 봉지에 바람빵 세 개를 넣으니 한아름 가득이다. 아내는 아직도 주문받은 일이 남았는지 가게 쪽 백열등이 켜진 채 덧문 사이로 전등 빛이 새어 나온다.
즐거워하는 딸아이와 막내는 옆방에서 재잘거리며 오늘 하루를 나누고 있다. 새 학기 시작 전의 며칠간 방학임에도 어디 먼 곳으로 놀러 가지도 못한 채, 아이들의 주제는 늘 그렇듯이 아랫동네 교회당에서 하루 종일 벌어지는 여러 사람들의 얘기다. 오늘은 미국에서 새로 온 선교사가 떠듬거리며 내뱉는 한국말을 흉내 내며 깔깔거림이 계속된다. 마땅히 찾아갈 만한 친척집이 없는 것이 맘에 걸린다. “우리 외갓집은 어디야..”하는 질문에 머뭇거리던 아내의 한 숨이 늘 맘속에서 맴을 돈다.
억지로 수동 편직기계를 멈추게 하고 하루종일 힘들었을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며 모처럼 얼굴에서 미소를 보았다. 이젠 얼마 후 이 가게가 딸린 집이 팔리고 나면, 학교 가까운 한적한 동네에서 자그마한 마당 딸린 집을 가꾸며 여유롭게 남편을 맞이할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며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우아한 모습을 그리느라 한참을 애먹었다. 안방으로 들어오니 낮에 동대문 쪽 시장에서 구입했다는 양복이 아직도 새것처럼 깨끗하다. 첫 출근에 입고 나갈 정장을 마련한 모양이다. 잘 다림질되어 걸려있는 양복을 자꾸만 입어보라곤 하지만 왠지 어색하여 내일로 미룬다.
밤이 꽤 깊어가는 모양이다. 대문 쪽 골목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림이 다소 거칠다. 이내 빗장을 걸지 않은 대문을 열고 서너 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들이닥치고, 놀란 얼굴로 내다보는 두 부부의 얼굴엔 핏기가 가셔진다. 도대체 경찰 제복의 사람은 왜 섞여 있을까... 또다시 엄습해 오는 한기에 온몸이 떨려오고 있었다. 봄은 아직 오질 않았는가..
7월 9일_일_13:10
이미 지친 다리를 밟아 1시간 만에 주실령 갈림길에 올라서니 몇몇 옥석산행객들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점심을 즐기고 있다. 아직 한 시간여를 더 내려가야 할 뱃속에서 쪼르륵 신호를 보낸다. 참 부러운 맘으로 인사하고 얼른 방향을 왼쪽으로 돌려 북쪽 옥석산 정상(1,242)에 10분여 만에 올라선다. 작은 바위들과 잡목 사이에서 이번 구간 처음으로 제대로 세워진 정상석을 대하니 봉화 산악회에 고맙다. 빗물에 젖은 디카가 잠시 말썽을 부려 제대로 담지도 못하고, 점점 젖어오는 옷 속에서 한기를 느껴 서둘러 도래기재로 향한 마지막 내림길을 밟는다.
10분 정도 급경사를 내려가니 왼쪽 40m 지점에 최근 발견했다는 550년 왕철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줄 처져 있으나 잡목숲들로 가려져 있어 제대로 관람도 되질 않고 사진도 힘들다. 진정 어떤 방법이 보호차원에서 좋을지는 생태학자들의 의견이 필요하겠지만, 좀 더 옆에서 뻗어 나오는 일부 잡목들의 제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꽃피는 봄의 대간길에서 다시 볼 수 있을는지... 잘 정비된 하산길 계단길이 미끄러움은 덜하나, 지친 발걸음의 보폭에 잘 맞질 않아 되려 귀찮은 스텝을 연출한다. 용기를 내어 마지막 힘을 다하며 보폭을 계단폭에 맞추어 걸어가니 산행 대장의 칭찬이 함께 한다. 지리산 출발때와 비교해서 많이 컸다는 평가일 테지.... 내가 생각해도 그럴진대...
1시간여의 내림길이 진달래터널을 통과하고 88번 국도가 지나는 도래기재가 보이는 절개면 언덕 위에서 다음 구간의 태백을 조망하려 하나 비구름 속에서 미리 보여 주길 꺼린다. 일주일 후에 힘찬 모습으로 태백의 품에 안기리라... 이젠 강원도의 험한 비탈을 걸으며 진부령까지 힘찬 북진을 해야 한다. 언젠가 다시 내려오는 대간길을 밟는 날은 좀 더 여유로운 걸음으로 산천을 두루 살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또다시 아쉬운 심정으로 대간의 한 구간을 왼쪽 계단을 밟고 내려설 때는 날머리 고갯길을 다시금 올려다보게 된다.
7월 9일_일_14:20
1시간의 내림길도 끝이 나고 먼저 내려간 산우들의 반김과 탈출자들의 건강한 웃음에 안도하며 도래기재를 떠나 남쪽 서벽리 송어 양식장으로 향하는 마음이 급하다. 우구치(牛口峙)라고도 불리는 도래기재는 서벽리에서 2km 북쪽에 있으며, 옛날 역촌(驛村) 마을의 도역리(道驛里)에서 연유하는 이름이다. 북으로 난길 아래쪽 신기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로 수많은 젊음들이 쓰러져 간 우구치 전투로 유명하다 하니 다음 주 새벽에는 젊은 영혼들을 이끌고 태백산에 함께 올라 못된 지도자들의 잘못을 빌고 죄 없는 그들끼리의 총질에 화해를 구해야겠다.
서벽리 태백양식장의 맑은 분수처럼 한 구간을 마치고 태백을 향하는 자유인들의 브라보가 힘차다.
2006.7.10 배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