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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32회 설악산 종주(1)(미시령-마등령)

06년 10월 21 - 10월 2일

10/21 21:20      일산      출발 

10/22 02:00      용대리   백담사 입구 도착

         02:30      미시령   출발

         03:20      주능선  

         04:40      1318.8(5분 휴식)                           2.5 km

         05:40      황철봉(1381) (10분 휴식)                1.65km

         06:30      저항령

         07:10      북릉 상봉 전망대

         07:30      북릉우회로 안부(아침식사-30분)

         08:00      식사 후 출발

         08:30      1249.5봉

         09:30      마등령 상봉 너덜

         09:50      마등령 상봉 전망대 1326.8-(30분 휴식)

         10:30      마등령(1320)                                4.35km

         12:40      금강굴                                       

         13:00      비선대                                         3.8km

         14:00      설악동 매표소                               3.0km 

                   11시간 30분                         15.3km  

싱싱한 설악골 단풍

10월 21일_토_22:00 

 남은 5구간 중 남설악구간인 점봉산 오름을 시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연구를 마쳤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무책임하고 순 뚱딴지같은 등산로 지정 관리 정책 탓에 여러 가지로 힘든 등산인들의 전철을 또 밟는구나.. 요즘 세상에 비합리적인 정책으로 "악법도 법이다"라는 식의 준법 도덕이 과연 먹혀들겠나 싶다. 대통령의 틀린 정책을 향해 삿대질하고, 부당한 법률에 대해 헌법소원을 심심찮게 제기하는 국민들에게 당치 않는 논리로 우선 지키라고 강요하는 발상은 이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요금 징수를 포기하는 결단을 이룬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존치여부를 잘 생각하여, 국립공원을 국민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로 가꾸고 관리하는 지혜를 촉구한다. 관리란 철조망으로 둘러친 채로 방치하며, 등산객을 적으로 대하듯 하는 경계임무와는 결코 다른 것이다. 

 고심 끝에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미시령에서 설악산 북릉을 먼저 오르기로 결정한다. 토요일 오전의 단풍 관광객 차량에 밀리며 미시령 어귀에서 들머리를 개척하고 있을 선발대가 걱정되고 고마울 뿐이다. 멀리 부산에서 올라올 선배님들과의 조우가 원활하기를 바라며 다소 걱정되기도 한다. 동계 훈련에 들어간다는 배소위를 면회하고 부대 근처에서 식사 후, 11월 말 진부령 등정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세어 보지만 말이라도 고맙다. 1년 반 동안 아비의 밤중 산행 길이 걱정되기도 했을 테고, 졸업 후 군 입대를 통하여 훌쩍 커버린 생각들이 제법 어른스럽게 응원의 힘을 보태니 기분이 좋아지며 나누는 부자간의 이슬이 잔이 가볍다. 

 갑작스런 구간변경으로 몇몇 구간 신청자들이 하차하는 아픔도 있었으나, 지리산에서 출발한 대간걸음의 종착역을 향한 힘찬 행진은 계속되어 양평휴게소에서 간단한 출정식을 마치고, 잘 정비되고 있는 4차선 6번 국도를 거쳐 44번 홍천행 국도를 소리 없이 달리는 산행버스 속에서 선발대와 통화를 마치고, 부산 팀을 연락하니 삼척을 지나고 있다. 7번 동해안 도로.. 내 20대 청춘의 시작이 떠오르며, 어느새 망상 앞바다에서 간성까지 덮개 없는 군용 트럭에 실려 3년을 보낼 배치 부대를 찾아 온종일을 달리는 배이병은 초봄의 추위를  이겨내 보려는 안간힘으로 온기 없는 더플백을 꼭 끌어안아 보지만 점점 마비되어 가는 듯한 몸살 기운이 퍼지기 시작한다. 동해 바닷가의 철 이른 해당화 모진 녹엽은 가시 위로 붉은 꽃이라도 금세 움을 틔울 듯이 모래톱에서 안간힘을 다하고, 찬 바람 속에 펼치는 해안가 도로를 달려 설악의 큰 그림자가 동해 바다에 깊숙이 빠진 저녁을 지나고 한 밤중에야 분단의 철망 앞에 내려 선 배이병은 사방팔방의 총부리를 겨냥받으며 깊은 잠에 빠진 채 의무대로 실려간다.   

황철봉 너덜 오름

10월 22일_일_02:30  

 용대리 백담사 입구에서 마등령 구름 타기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또 이렇게 대간 길의 새로운 접근로를 개척해 나가는 수고로움을 더해가며 구름을 타기 시작한다. 칠흑의 그믐밤에 숨죽이는 야행치고는 생각보다 한결 마음이 가볍다. 구름도 잘 흐르고 선발대의 정성스런 고생의 보람으로 40여 분만에야 등로 마루금 위를 날은다. 적어도 30분은 알바를 한 셈이다. 간간이 보이던 별빛마저 사라지고, 좌우의 계곡은 어둠 속에서 넓은 바다를 이룬 채 키 낮은 관목 숲으로 이어지는 오름길을 재촉하니 어느새 자켓을 벗어 넣고 땀에 젖은 모자를 훔치며 1092봉 안부에 다다른다.(03:40) 울산바위로 이어지는 학사평 숙영지... 전쟁이 끝나고도 수많은 분단의 희생자들을 양성하던 그 처절한 비극들을 간직한 채 오늘은 깊은 잠이 들었는가.. 그렇게 바래던 평화로운 꿈을 꾸고 있는가.. 

 부산서 올라오신 선배님들을 잠시 구름에서 내리게 하고 그제야 헤드랜턴 속에서 첫 대면의 인사를 나눈다. 환갑들을 머지않은 곳에 밀어 놓은 채, 무슨 영화로움을 바라고서야 저리 가쁜 숨 속에 땀 흘리며 이 보잘것없는 숲 길을 지쳐 오르지는 않으시리라.. 세속의 부귀와 영욕들이야 충분히 맛보았을 엘리트로 살아와 이제 이 땅의 귀한 줄기를 타고 걸으며 지난날의 수많은 애환들을 삼키며 그래도 이 땅의 아름다움을 후배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애정을 담고 싶은 것이리라.. 밀려드는 저 아랫녘의 아귀다툼들을 허허로이 흘려보내며, 간간이 부는 가을바람에 실려오는 정 깊은 고스락에서의 소곤댐을 벗 삼아 한 잔 막걸리에 나눌 수 있는 벗들과의 동행길이 대간 길만큼이나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으리라.. 

 왼쪽 내림길을 잠시 밟으며 간간이 이어지는 암반 길이 예사롭지 않은가 싶더니 곧이어 나타나는 된오름길에서 맞닥뜨린 거대한 암석 너덜길은, 칠흑의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의 범위 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보폭을 더욱 좁히고, 제멋대로 뒹굴며 자릴잡은 채 닳지 않은 모서리들 틈에서 내 작은 발바닥 하나 번갈아 놓으며 골라 디딜 편한 자리 찾기가 쉽질 않아 기어오르는 바짓자락은 온통 흙먼지로 채색된다. 간간이 부딪히는 암반 모서리가 얼얼한 게 다행이다. 제발 큰 미끄럼만 없어다오.. 이럴 때 달빛이라도 조금 비쳐 준다면 평형감각을 유지하고 주변을 살핀다면 한결 쉬울 텐데.. 오래되지 않은 듯한 가늘은 등로 안내 로프가 야광 막대기로 연결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부디 이 작업을 국립 관리 공단이 했기를 바래보며 지나가는 경찰이 넘어진 아이 일으키고 표창받는다고 우스워할 지언 정 칭찬해 주고 싶다.  

황철봉 여명

10월 22일_일_04:40  

 1시간 남짓 어둠을 조심스레 기어오르고 나서야  잠시 광활했던 너덜이 끊어지며 300여 m 고도를 높인 1318.8 안부에서 숨을 고르며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다. 아직도 랜턴 불빛만이 얼굴을 밝히는 칠흑이 이어진다. 비교적 편한 걸음으로 20여분의 작은 오르내림을 거치면서 마루금을 남서로 이어간다. 꽤 울창한 숲 속에서 선두의 무전이 이상스런 교전음을 남긴 채 끊어진 후 응답이 없다. 왠지 불안이 엄습하여 랜턴을 꺼 보기도 하지만 정상 부근에서 달리 뾰족한 대응도 없으니 그냥 걸어 나갈 수밖에.. 잠시 후 작은 너덜과 암릉을 거치고 나서야 선두조의 황철봉 도착 교신을 접하며 맘을 놓는다. 선두와 10여분 멀어지며 또 다른 등산 팀과 섞인 채 밤길을 동행한다. 함께 하는 친구의 랜턴이 이상을 일으켜 빛을 잃으니 눈 없는 장님 신세로 매우 고통스러운 밤을 걷는 게 안타깝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 몸이 되어 조심스런 밤길을 밟아 나간다. 빨리 날이 새어 오기를... 


10월 22일_일_05:30  

 황철봉(1381) 정상 암릉길에 도착하니 선두조는 이미 정상암봉을 거쳐 하산길에 나선 모양이다. 너덜 길 하산 발자국을 놓친 채 어둠 속에서 길 찾기가 쉽질 않아 리본마저 제거한 친절한? 국립 관리공단 나으리들 덕분에 조망바위를 오른쪽으로 잘못 우회하며 위험한 곡예를 시작한다. 소문난 황철봉 북서풍이라도 불어올 듯 꽤 세찬 바람에 모자가 날리기 시작하고, 너덜 바위에 기대선 채 자켓을 꺼내 걸친다. 10여분 큰 암반의 급경사 너덜길을 헤매며 우회한 뒤에야 붉은 페인트 화살 표시를 발견하고 그나마 숨을 돌리며 동쪽하늘을 향하니 동해바다 깊숙한 곳에서 기지개 켜는 일출 여명이 불그레하다.(06:00) 

 다시 조심스레 이어지는 큰 수직 암릉 아래쪽에 표지라기보다는 이상한 붉은색이 보여 다가가니 대형사고의 잔영이 지워지지 않은 채 소름이 끼친다. 등로를 막으며 버려둔 지 한 두해도 아닌데.. 부디 올바른 판단으로 국립공원 등로 관리의 본연의 임무를 자각하여 등산객의 안전을 도모하는 등로시설에 작은 투자라도 관심두기를 간곡히 바래본다. 오늘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복지국가의 임무는 국민의 건강과 자유로운 취미생활마저도 살필 줄 아는 폭넓고 적극적인 안녕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금지만을 능사로 철조망 친다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고에는 네 탓이니 하고 눈감을 수 있을 것인가.. 멀리 저항령 내림길이 숲길로 이어지며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을 느끼며 반갑게 랜턴을 끄니 왼쪽 동해 하늘이 운무 속에서 일출을 준비한다.(06:30)  

저항령 일출

 저항령 백담사 길골 갈림길에서 선두조를 겨우 따라잡자마자, 벌써 20여분을 기다리며 지친 선두조를 위하여 북릉 상봉에 오른 후에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고 다시금 너덜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다행히 후미조가 금세 따라붙는가 싶었는데 부산 선배님들은 저항령에서 휴식을 취할 모양이다. 아무래도 긴 시간의 여행에다, 첫 구름 타기에서 페이스 조절이 걱정이 되었는데..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마등령 정상에선 합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너덜 오름길 시작점에서 일출을 기다려 몇 점 건져본다. 울산바위는 구름 속으로 들어간 뒤 좀체로 나타나질 않는다. 지나온 황철봉 암봉들이 동해의 맑은 햇살을 기다려 하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1249.5봉까지의 북릉 암릉 봉우리들이 대간길 설악 구간의 첫걸음을 디딘 손님에게 반가운 첫인사를 나눈다. 역시.. 매달 물푸레와 한화리조트에서 손끝을 향하며 기다리던 북릉.. 드디어 오늘 그 처녀길을 오르는 감회가 새롭다. 멀리 학사평 콘도 마을은 구름 속에 잠겨 있다.(06:50) 

 30여분 지그재그 너덜길을 기어오르지만 지난 새벽의 칠흑 밤길을 오르내리던 황철봉 구간보다는 한결 여유롭다. 단지 암반의 크기가 꽤 크고, 직벽 오름이 더욱 곧추서니 짧은 다리가 찢어진다. 안간힘을 쓰며 북릉 상봉 전망바위를 넘어서니 용아장성을 타고 내리는 가야동 계곡이 화려하게 단장을 시작한다. 곰골 주황색 산마루가 아침 햇살을 받아 내설악의 색상을 자랑하며 넘나드는 능선 길을 한 동안 안쪽으로 잡아든다. 10여분을 북릉 암봉 아랫자락을 오른쪽 내설악으로 감아 돌아내리다가 작은 길섶에 모여 아침식사를 즐기며 느긋한 휴식을 취한다. 갑작스런 스케줄 변경이라 다소 지체되더라도 여유 있는 시간 계획을 잡아 마지막 회식을 즐기기로 한다. 

 지리산에서 출발하여 항상 선두를 이끌던 초반의 두총무가 오늘따라 그립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중단된 걸음이지만 진부령은 가까워 오는데 마지막 날은 함께 할 수 있을래나.. 후반을 이어받은 지금의 두 분이 점점 열기를 더해가며 순조로운 진행과 봉사를 맡아줄수록 살림꾼들에 대한 고마움이 더해지고 벌써 한 해를 훌쩍 넘어 눈 쌓인 진부령을 기대하고 있는가.. 부디 건강을 회복하고, 밝은 웃음으로 남은 대간길 마무리하는 날 우리 동기들의 이름으로 꽃다발을 안겨줄 수 있기를.. 산을 사랑하고 이 땅을 사랑하기에 한 주일의 모든 잡다함을 씻은 채 주말을 기꺼이 함께하면서 2000리 산길을 동행할 수 있었겠지만 진한 우정을 쌓으며 격려와 신뢰를 아끼지 않는 산꾼들의 모임으로 거듭나 한반도 금수강산 산산 골골을 걸어 통일의 그날을 함께 맛볼 수 있기를... 

설악북릉

10월 22일_일_08:00  

 아침 식사 후 1249.5봉까지의 지그재그 암봉 타고 넘기가 이어진다. 내설악과 외설악이 번갈아 멋을 부리지만 등로를 벗어난 암봉 오르기는 매우 위험하여 운무에 휩싸인 양쪽 계곡들에 대한 조망보다는 기기묘묘한 암봉들의 연속을 담기에도 바쁘다. 철 모르고 피어난 진달래꽃 몇 송이가 내설악 양지볕에 외롭다. 마지막 1249.5 암봉을 우회하여 내림길 직전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물 한 모금 마신 후 마주 보는 마등령 오름길이 만만치 않으나 대간 구간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힘이 솟는다.(08:30)

 그 아래쪽에는 부드러운 오세암 내림길과는 달리 공룡능선이 숨어 있겠지.. 금강산이 보이는 철책선 앞에서 2주일을 보내는 동안 의무실 신세만 졌던 배이병은 곧 속초 부근으로 다시 쫓겨 내려와? 어느새 일등병을 달고 화려한 동해안 외출?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우즈벡에서의 휴식을 위한 친구 방문의 일정을 엉뚱하게도 K노인과의 농장 구경으로 보낸 채 카타르로 떠나기 위해 타쉬겐트 공항으로 이동하는 짚차 안에서, K노인의 편지 한 통을 받아 넣은 채 마지막이 될 지난날 이야기로, 신호등도 없는 거리에서 빨라지는 운전 속도만큼이나 그의 이어지는 마무리가 빠르게 쏟아지며 진행된다. 호텔과 공항을 거쳐 다시 당분간 꽤 오랫동안 머물 것 같은 사마르칸트로 돌아갈 차량을 이용하여 배웅해 주는 보살핌 속에서 한국 땅에 살고 있을 나와 같은 또래의 그의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읽었다. 
“개혁이란 것이 무슨 정권 유지나 정치 수단을 위한 구호로만 남아서는 그 의미가 왜곡되지.. 공산주의적 취향의 견해에 의한 숙련된 노동운동의 지도자들... 그들은 상당히 리더쉽이 강하겠지.. 평생을 싸움과 투쟁의 일념으로 경험을 쌓아 왔고 사실 지도층이라 봐도 되겠지.. 그런데.. 대통령을 바라보는 정당과 노동 개혁의 명분을 쌓는 정당은 근본적으로 다른 그룹이지.. 개혁을 제도적 운운하며 국회의사당 내에서 해보겠다니.. 어느 세월에 다수당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 그들이 바라는 개혁을 위한 바탕을 마련할 것인지.. “
제도란 다수결이라는 명분으로 개혁의 씨앗을 원천적으로 없애는 기관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개혁 정당 운운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진보적 성향으로 지지층의 확산을 꾀하여 정치적 다수당이 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한 것이나 아닌지.. 오늘의 이 땅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상황이 꼭 무슨 개혁 세력에 의해 탄탄한 발전이라도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개혁이란 공산주의적 체제마저도 용인할 수 있다는 통일지상주의도 아니고, 결코 계획적인 지도층들의 수직 하향적 노동조직 운동의 목표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진보란 끊임없는 것이고, 그들이 지향하는 마지막 종착점이란 있을 수도 없는 허무맹랑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좁은 땅의 한민족의 운명이 무슨 진보개념으로 영원한 자유를 맞이하고 평화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 되겠는가.. 통일만 되면 미국, 중국 등과도 겨룰 수 있다는 것인가.. 지금 개혁의 목표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을 운운하지만, 실제로 중산층을 꿈꾸는 노동조합원들의 방어적 노동운동의 틀 속에서, 지난날 중앙집권적인 기업과 권력에 맞서 싸우던 조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장 비민주적이고 반개혁적인 밥그릇 싸움으로 세월 보내면서... “
스스로의 빈곤에 대한 자책감을 불어넣으며 개인의 운명과 하느님의 뜻으로 치부하는 개신교의 설교만큼이나 무책임한 오늘날의 노동귀족들.. 그들이 저임금 비조합원이나, 절대 빈곤층의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진정한 개혁을 위해 스스로 제도적 희생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땅의 비극이 강대 세력들의 틀 속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민족의 생존을 위한 국제적 영세중립을 표방하고, 같은 민족인 남북한을 통틀어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웃들을 사회계층의 운명으로 감싸주는 개혁으로 나아가야 할 이 길에 좌우의 이념이 차라리 걸림돌이라 여겨진다.  
북릉길 암봉

10월 22일_일_09:00  

 다소 지루한 내림길을 밟으며 잡목 우거진 능선을 지그재그로 마루금을 그어 간다. 함께 걷는 친구는 이제야 지난 새벽어둠 속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듯 "내가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걸까.." 후회도 했던 상황을 내뱉는다. " 이 땅에 살다가 이 길 걷지 않고서는 죽을 수가 없어서.." 그냥 나오는 대답이다. 아름다운 이 땅을 멀리서 지켜만 보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있기에.. 매주 주말을 이용하여 밤길을 나서는 산꾼들의 엄숙함에도 종교적 신성함이 깃들 수 있으리라.. 그것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을 얻어 갈 수 있는 유일한 샘물일지도.. 소위 대간병이라 일컬었던가.. 내설악 곰골을 타고 오르는 백담사의 아침 연기에 회한의 역사가 피어오르고 부처님 곁으로 다가앉아 영혼을 세탁하는 중생들을 독려하는 목탁소리가 실려 오른다. 

 마등령 상봉(1326.8) 조망처가 보이는 북사면 오름길에 주목 몇 그루가 짙은 녹음을 뽐내는가 싶더니 다시금 시작되는 너덜길 초입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발아래 저항령 계곡을 향해서니 운무에 휩싸인 황철봉이 외설악 자락으로 손을 내밀며 다시 오라 손짓한다. "다시 가나 봐라.... 밤에는..." 돌아 서서 오르는 너덜길이 다행히도 비교적 작은 크기의 너덜 암반에 짧은 구간이라 된오름에도 불구하고 쉽게 고스락에 이어지는 관목 숲에 발을 옮긴다. 오늘의 마지막 오름이다.(09:50) 문제는 대간길을 벗어난 설악동까지의 1000m 내림길을 무슨 사연을 담으며 견뎌 낼 것인가.. 차라리 어딘가 길섶에서 비박이라도 견뎌내고 한계령으로 이어가고 싶다. 


 30여분의 긴 휴식을 즐기며 부산서 오신 선배들을 모두 만나 뵙고 기념사진을 남긴다. 중년의 세월을 넘어 산행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정분을 쌓은 끝에 오늘 이렇게 보람된 만남을 가질 수 있음에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것도 설악의 정상에서.. 뉴욕에서 지켜보는 친구에게 보여줄 사진도 남긴다. 이곳에서 회식을 기대하며 준비했던 정성스런 위스키와 안주는 내림길의 안전을 위하여 그냥 배낭에 넣은 채 내려가기로 한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할 무게가 가볍게 여겨지니 참으로 기분이 좋은 탓인가 보다. 공룡능선의 배경들은 운무에 휩싸인 채로 다음 주 직접 다가와서 만나기를 청하며 베일을 벗질 않는다.(10:20) 

1249봉 넘어 마등령을 바라보며

10월 22일_일_10:30  

 10여분의 평탄한 능선을 걸어 마등령 고갯길 삼거리에 닿는다. 30년 전 배일병은 군화를 등산화 삼아 백담사에서 올라와 희운각에서 1박 한 후 무너미 고개에서 천불동 내림길을 잠시 놓친 탓에 공룡능선을 넘어 이곳 마등령 내림길을 걸어야 했었다. 참 무섭고도 허망한 한 달 휴가를 설악 언저리에서 보내고 있었으니.. 비선대까지의 긴 내림길을 조심스레 줄잡으며 다음 주 다시 올 대간 마루금에 작별을 고한다. 후미로 완전히 뒤처진 탓에 걸음을 조금 빨리하여 꽁무니를 잡기로 한다. 금강문을 지나기 직전 상봉계곡을 타고 내리는 작은 물줄기가 맑아 물병을 채운다. 

 즐비한 기암괴석과 암송들의 화려함을 맛보며, 대간 마루금 밟기와는 또 다른 계곡 산행의 진수를 즐긴다. 제법 높은 지대의 단풍마저도 협곡의 운무 속에서 싱싱함을 간직한 채 힘 좋은 산객들을 맞고 있다. 1시간 여만에야 후미와 합류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천천히 단풍놀이에 빠져들지만, 오랜만에 신어 본 목 긴 등산화 속이 뜨겁다. 웬만하면 트래킹화가 내겐 적당한데.. 오늘 너덜길엔 발목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기도 하다. 빨리 비선대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싶다.(12:00) 


1965년 9월,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때라,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연이어 터져 나오는 사건들의 중심에서 김형욱이 이끄는 중앙정보부의 활약이 지나치다 싶어 당정 협의회에서도 어느 정도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늦게 퇴근하여 광화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K노인의 발길은 꽤 무거웠다. 이제 내년쯤 어디 지방에라도 내려가서 교직의 꿈을 키우면서 조용한 여생을 마련해야 되겠다는 계획인데도, 점점 복잡하게 얽매이며 정책적 갈등과 충돌하는 자신의 하루하루 생활이 중압감을 더해 갔다.
대학 생활에 충실한 딸아이와 내년도 중학교 입학시험에 자신감이 붙어 자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건강이 좋지 못한 아내를 위해서라도 아이들은 서울에 남겨 놓는 채 지방으로 자리를 옮겨야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다행히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 결정하는 자신감 속에서 결단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자기에 대한 작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음에 근래의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마저도 곧 벗어버릴 수 있으리라 여기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경복궁 뒷 켠의 북악산 그늘이 평소 무섭게 짓눌려 오던 것이 오늘따라 조금은 포근하게 여겨진다.
점점 짧아지는 한낮의 길이를 느낄 만큼 어느새 사직동 골목길이 어둡게 다가온다. 갑자기 나타난 2명의 젊은이에 의해 또다시 운명의 찦차에 태워질 때까지 K노인의 신분상 위상은 40세 중반의 정치인으로서 그리 무시당할 위치는 아니었다. 적어도 제3공화국의 정치 실세들을 독대하며 오히려 그들의 이념적 논리들에 대한 상담자 역할을 할 정도로 해방 후 민족적 사상들의 복잡한 흐름을 정리해 나가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함께 혁명의 성공적인 기반을 마련하고, 민족의 앞날을 진정으로 걱정하던 현직 교수,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민족주의, 반독재의 연구 활동을 한 것이 어떤 세력에 의해 감지되어, 단지 학생 데모의 주동세력이 많이 배출된 대학 동아리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간첩혐의를 받은 채 징역살이를 벗어나는 서대문길이 이 땅의 통일만큼이나 멀고 참담했다. 훗날 모두 무죄로 풀려날 사건들로 길게는 2년여 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동안에 헤어날 수 없게 망가져 버린 K노인의 꿈은 멀리 삼각산 기슭을 넘고 있었다. 
마등령에서

10월 22일_일_13:00  

 비선대를 지나 잠시 발을 식힌 후 빠른 걸음으로 설악동 매표소로 향하는 발길이 가볍다. 공원 깊숙이 자릴 잡은 식당들의 음식값은 다소 비싸겠지만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막걸리가 자꾸만 유혹한다. 꾹 참고 발길을 서두른다. 신흥사를 지나 매표소 부근에 거대한 불상을 지어 놓은 채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고 있지만 일주문도 아닌 대문 안에 식당을 차려 놓고 부처님을 절 밖에 모시는 것이 옳은가.. 

 한낮을 어둡게 감싸는 낙락장송길 구름 속에서 간간이 뿌려지는 을씨년스런 가을비가 매표소를 벗어나니 차라리  상큼함을 느낀다.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면서.. 미련 없는 발길을 돌린다. 


2006.10.23 배기호 

비선대 천불동 계곡

 (비선대 천불동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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