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녹두빈대떡

by 좋은나무

나는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에는 어김없이 녹두 빈대떡을 만든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레시피로 만드는 일품 빈대떡이다. 전국 어디를 가서도 녹두빈대떡이 보이면 주저하지 않고 얼른 사 먹어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 빈대떡이, 아니 아버지의 빈대떡이 얼마나 더 맛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속셈이다.

“역시 우리 아버지 빈대떡이 최고야!”

매번 엄지와 중지를 “딱”하고 마주치고 의기양양하게 웃곤 한다.

아버지는 소심한 분이었다. 충남 금산에서 꽤 괜찮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처럼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인물로 떵떵거리며 살지는 못했지만 건실한 삶으로 바른생활의 모범이었다. 농업학교 원예교사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군산에서 농장을 운영하면서 김장 300 포기를 담가 직원들을 먹일 정도로 꽤 넉넉히 살았는데 그 시절에 내가 태어났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그때가 가장 풍요로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나를 유난히 예뻐하여 동네 아주머니들이

“딸딸이 아버지”

라고 놀려대도 개의치 않고 둘째 딸인 나를 업고 다니셨단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아버지의 농장 운영은 실패했고 이후 엄마가 생활 전선으로 나서 재봉일로 작은 사업을 시작하여 아버지는 보조적인 일로 함께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즐거워하며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은 거의 없었는데 그래도 때마다 주어진 상황에서 성실한 모습으로 자식들에게 알뜰하고 바른생활을 보여주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컴컴한 새벽에 체력장 연습을 시켜주었던 아버지는 마치 운동 코치 같았다. 일일교사로 우리 교실에서 수업하시던 아버지를 바라볼 때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여고 때 밥을 잘 안 먹는 나를 위해 아버지표 도시락으로 싸주었던 참기름과 깨소금이 많이 들어간 볶음밥 맛은 지금도 군침을 돌게 한다. 특별히 녹두 빈대떡은 아버지에게로 향하는 나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불쏘시개 같다.


아버지의 빈대떡으로 말하자면 만들기에 족히 삼일은 걸린다. 우선 중간 크기의 절인 알배기 배추 두 개를 쫑쫑 썰은 다음 마늘 생강으로 버무려 이틀 정도 실온에서 익힌다. 주재료인 녹두 한 되에 멥쌀가루 한 주먹의 비율이 중요하다. 녹두와 멥쌀을 섞어 하룻밤 물에 담가 불린 다음 믹서에 갈아 놓는다. 여기에 미리 잘 숙성된 알배기 배추를 꼭 짜서 엄지손톱 크기의 돼지고기와 함께 소금 간을 맞추고 기름을 넉넉히 둘러가며 바삭하게 구워 내면, 노릇노릇한 바탕에 갈색 빛으로 그을린듯한 먹음직스러운 빈대떡이 완성된다. 60개 정도의 빈대떡이 한 번에 만들어지면 일부는 따뜻할 때 바로 먹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보관하여 곶감 빼먹듯 수개월 동안을 든든하게 먹는다.

아버지는 자주 화를 내셨다. 이전의 사업 실패와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여 엄마에게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장이었지만 생계를 주도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조금은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집안에서의 요리 아니 어쩌면 요리에 대한 잔소리는 성취감과 안정감을 주었나 보다. 실제로 음식을 만들기보다는 이러이러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엄마에게 훈수두기를 좋아하셨으니 엄마는 얼마나 마뜩잖았을까. 그러다가 급기야 손수 음식 만들기를 시작한 아버지는 당신의 레시피 대로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녹두 빈대떡 이외에도 아버지는 몇 가지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녹두빈대떡이 단연코 1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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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힐링푸드인 아버지의 녹두 빈대떡은 우리 식구들 모두, 손녀들에게까지도 인기가 대단하다. 지금까지 집에 식사 초대하여 맛 보일 때마다 극찬을 안 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녹두 빈대떡은 나의 대표 메뉴이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엄마 음식이 맛있으면 꼭 하는 말이 있다.

“엄마, 장사해도 되겠어요!”

이처럼 나를 부추기곤 했는데 덕분에 장사할 음식이 녹두 빈대떡 말고도 몇 개가 더 있기는 하다. 반찬 없을 때 냉동실의 빈대떡은 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구제 식량이다. 지난해 설에는 자전거 실내 훈련장인 로라방 사장님에게 빈대떡 넉 장을 드렸더니 오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제까지 먹어본 빈대떡 중 최고로 맛있었다고 했다. 이번 추석에도 빈대떡 할 거냐고 재촉하듯 기다리기에 또 다섯 장을 해드렸더니 이게 웬일인가. 3달치 로라방 이용료를 면제해 주시겠단다.

“오 예스! 아부지 덕에 돈도 벌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먹었던 빈대떡은 잊을 수가 없다. 외손자가 자취하고 있던 집으로 오시던 날, 지하철역으로 마중 나갔는데 그때도 아버지 손에는 빈대떡이 들려 있었다.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일산에서 서울 봉천역까지 힘겹게 빈대떡을 들고 왔던 아버지는 그것이 우리에게 직접 해주신 마지막 빈대떡이었음을 알기라도 하셨던 것일까. 당시 대구에 살고 있던 나는 자취 생활하는 아들 집에 올라와 아버지를 만났고 그 빈대떡을 받아서 프라이팬에 따뜻하게 데워 얼마나 맛나게 먹었었는지….

그날 이후로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는 걷기 힘들어지게 되었고 여러 번의 수술과 요양 병원 생활을 하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가시기 전

“내 영옥이 소원을 들어 줄란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일주일 후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는 나의 오랜 소원을 알고 계셨고 마지막 시간에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아버지표 녹두 빈대떡을 따뜻한 선물로 남겨 주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