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의도라기보다는, 그저 스쳐 간 숨의 무게였을 뿐
설명보다 먼저 일어나는 변화들
돌멩이는 늘 그 자리에 있지 않는다.
어제 분명히 밟았던 발자국도, 오늘 다시 보면 흔적만 남기고 방향을 잃는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남아 있어야 할 것들은 제각각 흩어진다.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하려 애쓰지만, 많은 변화는 설명이 붙기 전에 이미 일어나 있다.
삶의 중요한 순간들은 대개 이해의 영역 밖에서 먼저 몸을 움직인다.
번개가 풀밭을 스칠 때, 누군가는 생각할 틈도 없이 불씨를 움켜쥔다.
그것은 계산된 선택이라기보다, 살아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일어난 행동에 가깝다.
생존은 전략의 결과가 아니라, 지나간 뒤에야 의미를 부여받는 흔적일지도 모른다.
오해에서 시작된 것들
물결은 많은 몸을 삼켰지만, 한 조각의 숨은 끝내 빠져나와 다음을 흔들었다.
역사는 그렇게 이어진다.
완전한 단절 없이, 작은 잔여들이 서로를 밀며 흐름을 만든다.
언어도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울음을 잘못 굴린 혀에서 튀어나온 소리가 단어가 되었고, 단어는 문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문장을 믿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구조가 되었다.
우연히 생긴 말이 진리가 되고, 진리는 신전처럼 보호된다.
철과 전기, 별빛의 회로 위에 우리는 탑을 세운다.
더 높이 쌓을수록 안전하다고 믿지만, 균열은 언제나 가장 낮은 그림자에서부터 조용히 번진다.
의미는 늘 늦게 온다
기억은 정확하게 남지 않는다.
뼈에 남은 금, 모래 위에 그어진 발자국, 사라진 것을 불러내기 위한 여러 설명들.
우리는 과거를 보존하기보다, 현재를 견디기 위해 기억을 고쳐 쓴다.
지도에 없는 길 위에서 누군가는 도착지를 먼저 정해둔다.
그러나 도착은 늘 예상보다 늦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성취보다 연기일 때가 많다.
이 무너짐을 우리는 실패라 부를까, 아니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시작이라 할까.
불씨가 먼저 흩어지고, 말은 그 뒤를 따라온다.
사건이 지나간 뒤에야 의미가 붙는다.
언제나 해석은 한 박자 늦다.
남으려 하지 않았던 것들
결국 오래 남는 것은 지키려 애쓴 것들이 아니라, 붙잡지 않았던 것들이다.
의도하지 않았고, 계획하지 않았으며, 그저 스쳐 지나간 순간들. 그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성취라 부르던 많은 장면들 역시 거대한 설계의 결과라기보다, 잠시 지나간 움직임의 흔적이었을지 모른다.
삶은 치밀한 구조물이라기보다, 자리가 바뀐 뒤에도 다시 숨을 내쉬는 과정에 가깝다.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의 증거라기보다,
잠시 머물다 사라진 흔적의 무게였을 뿐이다.
모든 것은, 결국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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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바꾼 자리〉
돌멩이는 제 자리에 없었다
발자국은 바람의 궤적에 흩어졌다
번개가 풀밭을 핥을 때
어떤 손이 불씨를 움켜쥐었다
살아남음은 계획의 언어가 아니었다
물결은 몸들을 삼켰으나
한 조각 숨이 빠져나와
다음 세대를 흔들었다
울음을 잘못 굴린 혀에서
첫 단어가 미끄러졌고
그 단어는 곧 문장이 되었으며
문장은 신전으로 오해되었다
철, 전기, 별빛의 회로,
탑 위에 세운 또 다른 탑은
자기 그림자에 균열을 키워가고 있었다
기억은 언제나 엇나가 새겨졌다
뼈에 남은 금,
모래에 그은 발자국,
사라진 것을 부르는 거짓 증언들
지도에 없는 길 위에서
누군가는 도착지를 새겨 넣었으나
도착은 언제나 늦게 왔다
불탄 재 위에서
남은 것은 연기뿐이었다
무너짐은 추락이었을까
아직 발음되지 않은 시작이었을까
말보다 먼저 불씨가 흩날리고
뒤늦게 그림자가 따라 썼다
남아 있는 것은 언제나
남으려 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모든 것은,
우연히 스쳐간 숨의 무게였을 뿐.
바람의 의도라기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