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자의 윤리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사람은 끝까지 사람일 수 있을까

by Don Shin

아침마다 벽지 무늬를 바라본다.

분명 늘 보던 벽인데, 오늘의 무늬가 어제와 같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억은 늘 이런 식이다.

정면이 아니라, 옆문으로 슬며시 들어온다.

그래서 언제나 조금 늦고, 조금 낯설다.


사진 속에서는 분명 웃고 있다.

하지만 그 웃음에 어떤 말이 담겨 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은 말보다 먼저

몸으로 잊는다.

움직임이 느려지고, 표정이 굳는다.

기억은 그렇게 설명 없이 사라진다.


컵은 보이지 않지만

손끝에는 아직 물의 차가운 감촉이 남아 있다.

물이 마르면

목마름도 함께 사라진다.

아픈 기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느끼던 감각이 먼저 사라진다.


햇빛은 여전히 손등을 스친다.

온도도, 밝기도 그대로다.

하지만 사과를 건네던 사람의 얼굴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어떤 마음이 오갔는지,

왜 그 장면이 중요했는지도 설명할 수 없다.

기억은 이렇게

맥락부터 먼저 놓아버린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얼굴보다 빈틈이 먼저 보인다.

누가 나를 불렀고

누가 내 곁을 떠났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설명도 남지 않는다.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안쪽으로 접힌다.

그 접힌 자리에 침묵이 쌓이고

몸은 이유 없이 차가워진다.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끔 꿈에서 깨어나면

서랍 속 연필 하나가

아무 글도 쓰지 못한 채 부러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말보다 먼저

말을 만들던 힘이 꺾인 느낌이다.


책은 글자를 잃고

베개 위에는

울음인지 말인지 모를 소리만 남아 있다.

이마에 손을 얹어주던 사람의 이름은

끝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손의 온기만은

이유 없이 남아 있다.


지문은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름도, 주소도

흰 종이처럼 흐려진다.

모든 단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모두 잊었다”는 말이

어느 순간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마음 한쪽에서는

알 수 없는 이름 하나가 계속 맴돈다.


완전히 지워지지 못한 사람이 있다.

아직 말이 되지 못한 숨이

단어보다 먼저,

지워짐보다 늦게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질문을 붙잡게 된다.


기억을 잃어도

사람은 윤리를 가질 수 있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남아 있는 사람은

지워지는 연습을 하면서도

그 안에서 끝까지

누군가로 남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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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자의 윤리〉


1


벽지 무늬는

매일 다른 시간을 토해내고,

기억은 옆문 틈새를 돌아

낯선 이름으로 서서히 굳는다.


사진 속 웃음은

목소리를 잃은 채 얼어붙고,

움직임은 말보다 먼저

주름처럼 접힌다.


컵은 사라지고,

손끝에만 물의 결이 남았다.

물이 마르면

목마름마저도 잊혀진다.


그날의 빛은

여전히 손등을 스치지만,

사과를 건네던 표정은

어느 문장도 되돌리지 못한다.


거울은

형태보다 간극을 비추고,

누가 불렸고

누가 돌아섰는지

아무도 증언하지 않는다.


시간은

속으로 접히고,

그 틈마다

침묵이 내려앉아

몸의 온도를 서서히 낮춘다.


가끔,

꿈이 거꾸로 접히며

종이 울음처럼 튀어 오를 때,

서랍 속 연필 하나가

무언의 문장 없이 부러진다.


말의 뼈대가

따라 꺾이고,

울음 위에는

지워진 이름의 무게가 내려앉는다.


2


책은 활자를 잃었고,

베개 위엔

울음인지 문장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내린다.


공기 한 겹씩 벗겨질 때,

이마에 손을 얹던

그 누군가의 이름은

입술 끝에서 맴돌고 있다.


지문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며,

모든 단어는

흰 종이로 흘러간다.


눈꺼풀 없는 슬픔은

밤을 끝내지 못하고,


“모두 잊었다”는 말이

입 밖으로 새어나가면,

문틈 어둠 속에서

낯선 이름 하나가 되뇐다.


여기,

완전히 지워지지 못한 자가 있다.

그 입 안에는

아직 문장 되지 못한 숨결이,

말보다 먼저,

지워짐보다 늦게

남아 있다.


누군가 묻는다면,

잊힌 자도 윤리를 가질 수 있느냐고.


침묵은

묵묵히 답한다.

남아 있는 자는

끝내 지워지는 연습을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