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식어버린 자리에서
기억은 늘 따뜻할 것이라고 믿었다.
되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어느 정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지나온 시간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어딘가에 닿아 있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그래서 오래도록 모아두었다.
버리지 못한 물건처럼,
낡은 영수증처럼,
이유도 모른 채 남겨 둔 이름들처럼.
하지만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기억은 쌓이는 것이 아니라
식어 간다는 것을.
처음의 감정은 사라지고
설명만 남는다.
웃었던 이유보다
왜 웃었는지에 대한 해석이 먼저 떠오르고,
울었던 순간보다
그 일이 지나갔다는 사실이 더 또렷해진다.
어쩌면 기억은
삶을 보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정리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기억한다.
그러나 길을 잃지 않는 삶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쩌면 단 한순간도 설레일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은 그렇게 차갑다.
이 연재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기억을 찬양하려는 기록은 아니다.
오히려 기억이 남긴 빈자리와
그 빈자리에서 되살아나는 감각에 관한 이야기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들이 아니라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느껴지는 것들.
그때는 몰랐고
돌아온 뒤에야 알아차린 순간들.
누구에게나 그런 장면이 있다.
돌아서고 나서야
붙잡지 못한 손이 떠오르는 밤.
사라진 뒤에야
그곳이 따뜻했다는 것을 아는 자리.
어쩌면 우리는
기억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식어버린 자리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떤 장면들은 끝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어떤 감정들은 이름을 갖지 못한 채 머물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기억이 지워진 자리에서도
무언가는 계속 남는다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감각,
말로 옮겨지지 않는 떨림 같은 것들.
그 떨림을 따라가려 한다.
기억이 시작되는 곳이 아니라,
기억이 끝난 자리에서.
그리고 그곳에서
아직 식지 않은 무엇을
조금씩 발견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