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알았던 한 생의 이야기
1.
태어날 때
울어야 할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입술을 뗐으나
소리는 흐르지 않았다.
형광등 아래,
백색의 손끝이
피부를 가로질렀다.
비린내와 심장 박동이
서로를 덮쳤다.
누구도 거슬러 오르지 못한 강.
모두, 한 번은 건넜다.
유년의 사진,
물결처럼 번지던
부모의 음성.
머물지 못한 첫 설렘.
익숙함은
감동의 결을 풀어내고
남은 건
서늘한 떨림뿐.
2.
첫 유치원.
울음을 삼키는 아이들 곁에서
처음 다툴 자리를
눈치로 짐작했다.
기억은
감정의 뾰족한 면을 마모시키고
실수조차
정해진 대사처럼 지나갔다.
중학교 교실.
질문은 벽에 흡수되었고
형광등의 떨림만
머리 위를 떠돌았다.
초대받은 밤의 문턱,
돌아설 타이밍을 알아
넘지 않았다.
관계는 시작도 전에
침묵으로 닫혔다.
사랑인들 다를까.
첫 말과
마지막 표정까지—
상처는 없었다,
시작하지 않았기에.
그 자리를
기억과 냉기가 채웠다.
겨울 골목.
스쳐간 어깨.
눈 위에 떨어진 빨간 장갑.
주워야 할지 망설이다
그대로 돌아섰던 순간.
기억에 없던 감각이
오히려 오래 남았다.
3.
기억은
삶을 평평하게 눌렀다.
풍경의 굴곡은 지워지고
빛도 어둠도
같은 밀도로 덮였다.
모든 것을 아는 자는
아무것도 겪지 않는다.
기억을 원한 건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그 고요 속에서
불행도,
행복도
흐르듯 지나쳤다.
상처를 피하느라
살아낼 순간마저
놓쳤다.
삶은
뜻밖의 눈물과
예기치 않은 웃음으로
빛났었다.
흔들림 없는 삶은
살아지지 않았다.
흠 없는 유리잔에
물조차 머물지 않듯.
4.
도시는
숫자와 시간의 그물로
감정을 걸러냈다.
빈 캔버스를 벽에 걸고,
예술이라 불렀다.
삭제된 실패,
지워진 발자국.
유리벽 너머
거리의 언어는
반짝이며 가라앉았다.
감정은 ‘비효율’이 되었고
멈춤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은
지워진 것들로부터
되살아났다.
5.
다시 태어난다면
기억 없이
살아보겠다.
울고,
실수하고,
뜻밖의 친절에
덜컥 감동하며.
따뜻해서
더 아픈 이별도
기꺼이 지나가겠다.
삶은
알수록 옅어지고
모를수록 깊어졌다.
흔들릴수록
더 선명했다.
기억은
차가웠고
지워진 뒤에야
손끝에서
따뜻해졌다.
저릿한 감각이
남았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숨결,
기억 이전의 떨림.
그 떨림은
지워진 세계를
다시 부르는
소리 없는 울음처럼
피어올랐다.
그 떨림이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