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에 총량이 있다면
"구름아, 엄마의 정원에 놀러 와!"
해남 시골집 마당에 좋아하는 꽃을 잔뜩 심어둔 엄마가 강아지 구름을 안고 건넨 말이다. 그 모습과 말이 너무 웃겨서 당시에는 하하 웃고 말았는데, 계속 여운이 남아 메아리처럼 내 머릿속을 울리는 말이기도 하다.
어릴 적 기억에 엄마는 늘 꽃이나 식물을 좋아했다. 이층집 주택에 살았을 때에는 마당에 작은 화단이 있어 계절마다 꽃과 나무가 자랐고, 집안 곳곳에는 화분이 여러 개 있었다. 엄마는 늘 화분에 물을 주거나 식물의 이파리를 소중히 닦아주고는 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파리가 큰 화분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대신해 온갖 장식을 둘러야 했는데, 나는 사실 그게 조금 못마땅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자고로 뾰족뾰족한 나뭇잎 사이에 화려한 각종 오너먼트들을 둘러야 느낌이 나는데, 우리 집 트리는 널따란 이파리에 어정쩡하게 장식을 둘러서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은 듯한 느낌이었달까. 형편이 어려워지며 크리스마스트리는커녕 단칸방에 네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나중에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엄마는 식물을 곁에 두고 사랑을 주는 여인이었다.
그런 엄마와 달리 나와 내 동생, 우리 자매는 손재주가 영 없고 식물을 키우고 가꾸는데 늘 젬병이었다. 아예 관심조차 없다고 하는 게 맞겠다. 가끔 엄마가 며칠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늘 마주했던 건 바싹 말라 시들어버린 화분들. 애지중지하던 화분이 죽거나 죽기 직전인 모습을 보며 엄마는 무척이나 속상해하셨다. 조금만 들여다 봐주지, 조금만 더 신경 써주지 하는 마음이 딸들에 대한 서운함으로 마주하셨을 게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때 잠시뿐. 애석하게도 엄마의 식물 가꾸기 유전자를 전해 받지 못한 듯한 우리 자매는 이후에도 엄마가 며칠 집을 비우게 되면 화분들을 처참히 보내주곤 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물을 주고 돌봐 주어야 하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일 뿐이라 변명해 본다.)
나는 여전히 식물 키우는 데엔 소질이 없다. 아이가 태어나 함께 키우기 시작한 화분이 벌써 여러 개인데 늘 결과는 낭패다. 남들은 잘만 키우는 방울토마토 화분도 벌써 두 해 모두 실패. 그나마 작년 여름에는 꽃이 여럿 피어 이제 곧 열매가 달리려나 기대했는데, 결국은 바짝 말라 버렸다. 남편에게 가끔 받는 꽃 선물도 역시 처치 곤란. 받을 때 기분 좋았던 잠시 빼고는 이걸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시들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식물도 아이를 돌보듯이 계속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해 주고, 필요한 것을 챙겨 주어야 하는데, 나는 내 아이 하나만 챙기는 것도 사실 버겁다. 식물에게까지 나누어 줄 관심과 애정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엄마는 내가 지금 아이에게 쏟는 애정과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애정과 관심, 정성을 우리 자매에게 쏟고 남편과 형제들, 부모님들까지 챙기면서 살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엄마와 나는 애정의 총량 자체가 다른 사람인 걸까? 사람마다 품을 수 있는 애정의 총량이 다르다면 아마 엄마가 훨씬 앞서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지금 엄마는 시골집 마당에 엄마만의 정원을 꾸며 실컷 꽃을 가꾸고 계절 별로 그 변화를 즐기고 있다. 가끔 꽃 사진을 잔뜩 찍어 단톡방에 보내주는데 "예쁘네" 말고는 별 다른 리액션이 없는 딸들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엄마가 이제라도 실컷 식물을 가까이 두고 지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게 무슨 꽃이라고 얘기해 줘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딸들과는 달리, 꽃을 예뻐라 하고 궁금해하고 또 함께 열렬히 반응하는 손녀딸도 있으니 더욱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