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벽에 부딪혔는데, 그 벽 중에 하나가 나에겐 영어였다. 고등학교 1학년말, 문과와 이과 반으로 나뉠 때 아무래도 수학에는 자신이 없어 문과를 선택했다. 숫자의 학문인 차가운 수학보다는 우리나라 말로 써진 따뜻한 국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영어도 다른 나라의 국어 아닌가. 2학년 1학기 첫 시험을 치르고 난 뒤, 나의 순진한 상상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대학 입시의 당락을 결정짓는다는 국영수 중에서 수학이 약하면 국어, 영어는 무조건 잘해야만 했다. 영어를 암기과목처럼 닥치는 대로 외우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시간에도 수첩만 한 조그만 단어장을 꺼내 중얼중얼거리며 외웠다. 당시에는 성문영어와 맨투맨이 인기 학습 교재였는데, 책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외웠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입시 영어에서 효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는 읽고 쓰기보다는 말하고 듣기가 중요하다고 해서 군 제대 후 영어회화 학원을 다녔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분명히 보케블러리 22000을 다 외웠는데 막상 외국인 영어강사와 대화할 때는 외웠던 단어가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결심 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영어를 배우자!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고모, 삼촌들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금 살고 있는 청주 같이 아담한 도시인 캔자스시티였다. 미국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ESL 코스를 거쳐야 했다. 나처럼 영어 못하는 아시안계 학생들 위주로 반이 꾸려졌다. 방과 후에는 선생님이 조언해 준 대로 미국 코미디 TV 프로를 시청했다. 이렇게 1년여를 보냈지만 영어 실력은 많이 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촌들과 삭막한 미국 생활이 싫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다시는 미국으로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3학년으로 복학하는데 새로운 유형의 영어 시험이라는 토익이 대세였다. 내가 알던 토플이 아니었다. 대기업에 취직하려면 토익 고득점을 받는 게 유리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학생들은 시험 문제를 잘 몰라도 정답을 맞히는 신비의 기술이 있다. 토익도 어쨌든 시험이다. 주위의 토익 고수들이 귀띔해 준 대로 시험 문제와 유사한 '문제지'만 수차례 풀었는데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왔다. 이런 토익점수 덕분에 학점은 별로였지만 지금 회사에 들어올 수 있었다.
회사에 들어와서도 영어를 비롯한 어학 공부가 필요했다. 회사는 토익점수 등급을 나눠 직원들을 관리했다. 어느 날 나는 이 토익점수를 기반으로 미국 주재원으로 발탁되었다. 주위에서는 내가 미국 유학 생활을 하고 토익점수도 어느 정도 나오니까 영어를 잘하는 줄 알았다.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찔린다.
하와이에서 해외지점 개설 업무를 하면서 내 진짜 영어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를 대표해서 하와이 현지인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해야 할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설문 쪽지를 들고 다니면서 외우고 또 외웠다. 그렇게 하면서 터득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임계점'이다.
악기를 배우던, 어떤 새로운 운동을 배우던, 어느 한 종목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 임계점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실력이 느는지 거의 느낄 수가 없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영어수업을 들었는데도 잘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실제로 영어와 접한 시간은 임계점에 다다르기까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최근 나는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어느 작가님의 일어 공부하시는 글을 읽고 자극을 받았다. '프렌즈'라는 미국 코미디 프로를 자주 본다. 처음에는 그냥 보고, 두 번째는 자막을 띄우고 보고, 세 번째는 또 그냥 본다. 이전보다 영어 공부 자료가 훨씬 많고 환경도 좋아졌다. 어떤 분야이든 고수가 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사진 by 인프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