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미리 밝히는 결론
올 시월, 가족과의 연을 끊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모님과의 연을 끊었다.
언제까지?
내가 부모님을 마주했을 때 분노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올 추석이었다.
내 어릴 적 엄마의 크고 작은 나쁜 언행들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던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그 시절 나에게 했던 말을 내 엄마가 내 딸에게 그대로 하는 일이 벌어졌다.
눈이 뒤집어지면서 어렸을 때 맞서 말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나 또한 엄마이기에 할 수 있었던 용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엄마와 격렬하게 싸웠다.
EP. 2 어릴 적 상처를 준 상대의 본색
엄마와 싸우면서 어릴 때의 상처들이 자연스레 수면 위로 올라와 마구 쏟아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네가 어릴 때부터 좀 예민했잖아."
"그땐 40대였는데 40대가 어떻게 50대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노."
"엄마는 그때 최선을 다한 거였다."
"니는 상처받은걸 잘 못 잊어버리고 가슴에 담아두잖아."
"니는 그러면 그때 왜 그랬는데!"
내가 소리를 질러도,
애써 진정하고 차분히 얘길 해도,
오히려 엄마를 위해주는 말을 해도
나를 탓하거나 상황을 피하는 말만 할 뿐
"미안하다"는 네 글자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싸움으로 인해 엄마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다.
EP. 3 연을 끊기로 결정하기까지의 과정
그 이후로 집에 돌아와서 혼자 많이도 울었다.
감정들이 시시때때로 올라와 기분 좋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나고 그럴 때마다 속으로 그렇게 쌍시옷 욕을 해댔다.
엄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와 똑같이 연락했다.
문자만 봐도 속이 뒤집어지고 또 눈물꼭지가 틀어졌다. 그래서 '거리두기'를 시작했고 엄마에게도 전달했다. 그랬더니 문자로 '백번이고 천 번이고 미안하다'란 답장이 왔다. 싸울 땐 그렇게나 꼿꼿이 당신의 잘못을 인지조차 안 하더니 내가 뭔가 조치를 취하니 이제야 미안하다?
당연히 진심이 아닌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만든 사과다.
며칠 뒤 편지도 보내왔다.
실로 자기 위주로 쓴 편지를.
읽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렸다.
보관할 가치조차 없는 글들이었다.
그리고는 친정집과 우리 집이 다 같이 3박 4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싸우기 몇 달 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었고 이미 비행기표며 숙박도 예약이 끝난 상태. 중요한 건 아이들의 기대가 컸었다.
예약한 것들이야 다 없는 일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꾸만 눈에 밟혀 두 눈 딱 감고 '아이들을 위해서' 마지막 인내를 쥐어짜며 여행을 마쳤는데, 여행 내내 하루에도 몇 번씩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의외로 다녀온 보람이 있었다.
엄마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30년간 함께 살며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조금은 객관적으로 보인 것이다. 그리고 오랜 생각 끝에 확신이 선 사실은,
'우리 엄마는 심성이 선한 사람이 아니다.'
엄마와 격렬히 싸운 그날 이후, 여행을 가기 전에 2주간 걸쳐 쓴 '글'이 있다. 엄마는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쓴 장문의 글이다. 머릿속에 떠도는 숱한 생각들을 글자로 붙잡아 두고 수정에 수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연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 '글'을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엄마못지않게 아빠 또한 만만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 사그라든 건 몇 년 전 나에게 했던 진심 어린 사과 덕분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나에게 줬던 큼지막한 상처들이 지금의 내 성격으로 형성되어 지금까지도 부정적인 지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아빠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날 당일 저녁 아빠한테서 온 답장은
'평생 속죄하며 살겠다'였다.
EP. 4 내가 앞으로 지켜야 할 '나와의 약속들'
이 정신으로는 나 스스로 온전히 설 자신이 없어서 바로 심리상담센터를 친한 언니에게 추천받아 두 달간 상담을 받기로 했다. 현재까지도 하고 있는데 처음 한 달간은 상처를 드러내는 시간들이었다. 너무 괴로웠다. 상담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멀쩡한 적이 없었다.
어떤 날은 펑펑 울고,
어떤 날은 흐느끼며 울고,
어떤 날은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괴물처럼 소리 지르고,
어떤 날은 분노로 차올라 욕하며 화를 내고.
이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고 이제 나머지 한 달간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해보고 있다.
내가 쓰레기통에 처박은 엄마의 편지 내용에 '엄마는 아마 변하지 않겠지. 앞으로도'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변하기로 했다.
누구를 위해서?
나와 내 남편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나이를 점점 먹을수록 아이들이 커갈수록 내가 점점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고, 내가 아이들에게 대하는 태도도 부모님이 어릴 적 나에게 상처가 됐던 언행들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내가 바뀌어야 한다.
내 안에 이미 물려받은 나쁜 습관과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성격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방향을 잡아 고쳐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의 약속을 잘 지키며 일상을 보내야 한다.
이런저런 다짐을 하고 지켜나가고 있던 중에 지인과 함께 재미로 본 사주풀이에 유독 머리에 남는 게 있었다. 대략 내용이,
'지금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다 갈아엎을 때이고 앞으로 2,3년 후에 대운이 들어오는데 이 운을 잡으려면 현재의 힘든 시기들을 허투루 보내지 말고 자신을 가꾸며 잘 보내야 한다'
실제로 작년에는 친했던 동네사람들과 관계가 산산조각 나고 올해는 부모님과의 관계마저 끊어진 상태여서 조금 믿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이 구절이 조금 위로가 되는 것 같아서 믿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긴 한 것 같다.
정말로 운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