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그리고 아직도
이번엔 과거 여행을 가고자 해요. 예전 학교에서 월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펼쳐지던 그 광경을 아시나요?
아, 그 시절엔 정말 대단했대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오와 열을 엄격하게 맞춰서 서 있었거든요. 물론 뒷줄에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엄격한 조교, 아니 선생님들의 눈초리에 움찔하며 금방 자세를 바로잡고는 했지요.
작은 체구지만 많은 인원이 줄 맞춰 모여있는 모습은 다시 봐도 장관일 겁니다.
특히 무더운 한여름 땡볕 속이나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에는 왠지 모를 비장미까지 더해져서 그 느낌이 더 배가되는데요. 이제부터는 좀 더 당시 느낌을 살려볼게요.
전교회장 : (마이크 없이 육성만으로 우렁차게) 전체에~ 차렷!
전교 학생들 : (절도 있게 발을 모아 차렷 자세를 취한다)
전교회장 : (여전히 큰 목소리로) 교장선생님께 대하여~
전교 학생들 : (다음 동작과 구령을 대비하며 준비한다)
전교회장 : (가장 큰 목소리로 샤우팅) 경례엣!
전교 학생들 : (우렁찬 목소리로 손끝을 눈썹에 착 붙이는 거수경례를 하면서) 충~성~
교장선생님 : (근엄하신 목소리로 사단장님처럼 경례하시며) 충성.
밴드부원들 : (학생들과 교장선생님이 서로 거수경례 자세를 유지한다. 약 2초 후 멋진 행진곡풍의 군악대 음악이 시작된다)
빰빠바바 빰 빰바바~~ 빰빠바바 빰 빰바바~~
빠라바라바~~ 빠라바라바~~
바라바라 빰빠바 빰빠바 빰 빠라밤 (잠시 멈춤)
빰빠바 빰빠바바 빰빠바 빰빠바바
바라바라 빰빠 빰빠라빰빠라 밤
전교회장 : (떠나가라 우렁차게) 바로!
교장선생님/전교 학생들 : (거수경례를 마치고 차렷자세를 취한다)
전교회장 :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 열중~ 쉬어!
전교 학생들 : (양손을 뒤로 모아 뒤허리에 댄다)
교장선생님 : (헛기침을 몇 번 하신다. 이후 간곡한 어조로 모두가 다 아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주옥같은 말씀을, 아주 아주 천천히 시작하신다. 다들 아시는 전설의 말씀 이제 시작이다. 이하 너무 길어 생략)
여기엔 볼만한 포인트가 여러 곳 있습니다. 학생들이 교장선생님께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 여학생들도 여군 못지않게 훌륭하게 경례를 하는 등 볼거리가 많아요. 간지러운 '안녕하세요~'가 아닌 박력 넘치는 '충성!'이라고 학생들이 입을 모아 용맹스럽게 외치는 모습도 사뭇 멋집니다.
특히 꼭 놓치지 말고 봐야 할 장면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교장선생님과 전교생들이 서로 경례자세를 유지하는 긴장된 순간, 터져 나오는 밴드부원들의 합주곡이 나올 때입니다.
약 30초 정도 길이의 곡인데, 밴드부원들이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이 음악은 웅장하기 이를 때 없으며 장엄한 느낌이 나요. 트럼펫을 선두로 한 금관악기들과 북소리 등이 잘 어우러져요. 설상가상으로 겨울 눈발이라도 살포시 날려준다면 더 엄청난 광경이 되겠죠.
하나 단순히 밴드부원들의 멋진 음악에 빠져 감상하시면 진짜 볼거리를 놓치시는 거예요. 진정한 최고의 장면은 따로 있거든요.
그건 바로 밴드부원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교장선생님과 전교 학생들이 서로 경례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늠름한 모습이에요. 약 30초간 서로 마주 보며 경례자세를 유지하거든요. 정지화면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장면도 한 폭의 그림이지만, 당사자들의 표정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땐 당연히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요.
먼저 교장선생님부터 볼게요. 교내 최고 어르신답게 근엄하고 진지하신 표정을 30초간 늘 잘 유지하십니다.
하나 한 두 번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얼핏 웃으시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때는 엄숙한 조회 중에 왜 저러실까 했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마도 속으로 '음... 이상하게 오늘은 좀 민망한 것 같네. 매주 하는 건데 오늘 좀 이상하군' 이러지 않으셨을까요. 솔직히 교장선생님이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의 귀감이자 훌륭한 어른의 표상인 교장선생님과는 반대로 아직 미성숙한 철부지 학생들의 표정은 짓궂고 다양해요. 살짝 눈동자만 돌려보면 옆 친구들 표정을 볼 수 있거든요.
여름과 겨울은 폭염에 지치거나 추위에 몸을 떠는 학생들이 많아요. 늘 불만 가득한 표정도 있었고 권태로움에 항상 멍 때리는 친구도 있었지요. 아예 눈을 감고 있는 친구도 있고 끊임없이 하품하는 학생도, 그리고 도무지 해석 불가능한 괴상한 표정을 짓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참, 눈을 가운데로 모으는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도 있었어요. 긴 교장선생님 말씀이 끝나고 조회가 끝날 때까지 용맹정진 눈알 모으기 연습하던 그 학생. 지금 생각해 보니 대단했었네요.
그 당시는 미성년이라 참을성이 없고 노오력도 부족해서 그리 산만했겠죠. 하나 분명 중년이 된 지금은 모두 멋진 어른들이 되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근데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린 학생만 참을성이 없고 노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선생님 중 몸을 자꾸만 뒤트시는 분, 한 곳만 멍하게 보시는 분도 계셨거든요. 그 시절 수학선생님, 아무도 없는 빈 공터를 왜 그리 슬픈 눈빛으로 보고 계셨나요. 그리고 운동장 바닥을 무의식적으로 발로 파시던 선생님도 계셨고요. 나중에 보니 은근 많이 파셨더군요. 학생이었으면 혼났을 텐데.
아무튼 다시 볼 수 있다면 그 시절 락커처럼 샤우팅 하며 고생한 학생회장과, 겨울에 언 손 녹여가며 연주하던 밴드부원에게 뜨끈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고 싶네요.
자, 그 시절 교장선생님 훈화 내용은 아시다시피 너무 방대하기에 핵심만 요약할게요.
주제는 대략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어요.
첫째, 공부 열심히 해라 - 뒷바라지해 주시는 부모님 은혜에 보답해라. 그건 학생의 의무이다.
둘째, 경쟁에서 승리해라 - 치열하게 노력해서 도전하고 경쟁에서 이겨라. 그건 젊은이의 의무이다.
셋째, 낙오자가 되지 마라 - 필요한 사람이 돼라. 잉여인간 되면 결혼도 못한다. 그건 인간의 의무이다.
요약한 3가지 주제는 결국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공부 잘해서 이겨라. 아니면 결혼 못하는 잉여인간이 된다] 였죠. 다시 보니 특히 결혼에 웃음 나오네요.
위는 실제로 당시 경기도 어느 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 보면 그땐 매주 미니 군사훈련과 공부 전쟁을 위한 정신교육을 주기적으로 받은 것 같아요.
당시 중진국이란 말을 많이 썼어요. 선진국도 아니고 후진국도 아닌 우리는 중진국이다. 더 노력해야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교는 공장에서 나오는 공산품 같은, 상명하복 교육이 깊게 체화된 말 잘 듣는 학생들을 대량으로 배출했었죠. 졸업 이후 기업에 입사했고, 기업 역시 군대식으로 운영되고 상사의 지시에 직원은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행동했어요. 이는 당시의 고속성장과 재벌이 주도하는 대량생산의 시기에는 통했던 전략이었어요. 그 결과, 아시다시피 경제적인 부문에선 성과를 거두었죠.
그때는 학교에서 배려, 존중, 공감 등의 가치는 배운 기억이 없어요. 마찬가지로 가정도, 동네분들도, 친척분들도 학교와 다르지 않은 그 시대의 가치를 강조했었고요. 인성, 상호존중, 커뮤니케이션 등 요즘에 강조되는 가치 대신에 배운 건 한 마디로 '주어진 질서에 잘 순응하라' 였어요.
전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의식과 다수가 원하던 가치를 따르신 것이라고요. 그 격동의 시대에서 열심히 사셨던 분들이라고 좋게 추억하고 싶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시대 태어났다면 지금과 달리 다른 정보를 받아들이기 힘든 당시 환경에서 과연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요. 자신할 수 없네요.
근데 그때는 그렇다고 쳐요. 문제는 이렇게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도 그 '순응의 태도'가 바뀌지 않고 아직 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에요. 회사에서, 단톡방에서, 회식자리, 심지어 사석에서도 그 흔적은 넓고도 깊기만 합니다. 때론 겸양의 형태로, 미덕으로 뜻하지 않게 포장이 되고요.
이제 시대는 변했고 학교에서는 당연히 더는 충성을 외치진 않아요. 하지만 그 시절 우리의 DNA 속에 각인된 권위주의와 전제주의는 잘 훈련된 조건반사처럼 여전히 우리 일상 곳곳에 있습니다.
여전히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임만 있으면 나이부터 확인하고 형, 누나, 동생으로 구분하는 문화는 아쉽기만 해요. 세계 어디보다 우리가 유난히 심하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더욱 안타깝습니다.
출근길 겨울 매서운 찬바람에 그시절 조회를 떠올리며 조금 오버스럽게 연기하듯 속으로 중얼거렸어요.
"차렷... 일상에 권위 버림 나 먼저 실천. '존중!' 외치며 경례!"
하지만 추워서 그런지 얼떨결에 익숙했던 '충성!'이라고 해버렸어요.
인생 참 아이러니합니다. 과거를 웃으며 그 과거를 여전히 반복하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