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역주행
오랜만에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정말 오랜만이다.
예전에 시골 외할머니 댁에 갈 때나 타던 그 시절 기차. 그때처럼 기차는 여전히 넉넉하고 포근했다.
평소와 달리 자리에 앉고 보니 내 좌석이 기차의 진행 방향과는 반대였다. 어렸을 때 역방향으로 타고 가다가 멀미를 했던 기억이 났다.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자리를 바꿀까 좀 고민했지만, 이제는 그때의 어린애도 아니라는 생각에 그대로 앉기로 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에 기대고 창밖을 바라봤다. 평온했지만 곧 낯선 감각이 밀려왔다. 흔하게 보던 창밖의 풍경인데 왜 이리 달라 보이는 걸까.
앞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뒤를 바라보는 이 특별한 시점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다가오는 풍경을 기다리는 대신,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점점 멀어져 가는 모습은 이상했다.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진다.
보면 볼수록 멀어져 가는 풍경은 다가오는 풍경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평소 기차를 탈 때면 보이는 풍경들은 점점 가까워지다가, 내 머리 뒤로 지나가는 그 순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곤 했다.
마치 예전 기억 속의 기다림과 만남, 그리고 이별이 어느 한순간에 급격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반면 지난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인연들도, 영원할 것 같았던 친숙했던 장소와 즐거웠던 시기도, 가장 편안하고 익숙해진 순간에 예상치 못하게 끝나버린 경험들이 떠올랐다.
가장 가깝고 자세히 보인다고 안심했던 그때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때였다.
그러나 지금 보고 있는 멀어져 가는 풍경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희미해지면서도, 마치 긴 인사를 나누듯 천천히, 아스라이 멀어지며 사라졌다.
헤어질 시간을 충분히 주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창밖의 풍경들이 모두 끝까지 남았다가 오래전 내렸던 눈이 서서히 녹듯 조금씩 조금씩 사그라져갔다.
전봇대, 가로수, 건물들이 지나가고 이어 논과 다양한 모양의 농막들, 나지막한 산들이 하나둘 차례로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평소라면 스쳐갔을 일상 풍경이 오늘은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 천천히 멀어져 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구나. 현재 시점에서 과거는 이렇게 조금씩 멀어져 가고
우린 그저 이렇게 처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구나. 뭐 아쉽지만 그리 나쁘지 않다.
보다 보니 이 역방향 자리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앞만 보고 달리던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꽃밭, 시골길의 여유로운 풍경들, 뒤뜰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와 부지런히 일하는 아주머니와 신나게 뛰어다니는 동네 개를 평소보다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었다.
아울러 당연히 긴 시간 동안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 보다 보니 보면 볼수록 더 정겨웠고 더... 아련했다.
같은 길, 같은 속도로 달리는 기차였지만 별생각 없이 방향을 반대로 돌린 시선은 내게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때로는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이 특별하고 새롭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이란 어쩌면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때로는 뒤도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균형을 찾아가는 이래저래 참 복잡한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기차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렸지만 내 시선은 끊임없이 기차방향과 반대로 향했다.
그리고 그 낯선 시간 속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도 의미 있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큼이나 지나온 길을 자세히 되돌아보고, 동시에 현재의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재인식.
우연히 만난 역방향 기차여행은 그런 상념으로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