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 이야기(2)

들풀의 한뼘소설 2.

by 들풀

※ 전편에 이어서 계속합니다. 전편의 일독을 권합니다!


4. 아! 숙희 아지매

얼굴에 화색이 돌던 숙희 아지매의 몸이 눈에 띄게 축이 나고, 가끔 식은 땀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마을 아지매들은 더 이상 숙희 아지매에게 우호적이지 않아서인지 숙희 아지매는 지앞의 큰 샘대신에 암자골의 작은 샘에서 물을 길어다 썼습니다.


암자골 샘으로 가는 길이 우리집에서 훤하게 보여 나는 숙희 아지매가 또아리를 머리에 올리고 양철 물동이를 인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숙희 아지매가 양손을 물동이를 잡고 걸을 때면 잘룩한 허리의 하얀살이 무명적삼을 비집고 나와, 동네사람들은 흘낏 흘낏 곁눈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여름에 엄청나게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 기세좋은 물살에 밤새 돌덩이가 우르르 쾅쾅거리고, 사람들은 벼논에 물을 빼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숙희 아지매는 물을 길러 암자골 샘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그날은 희수마저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중학생이던 나는 소죽을 끓이려고 청솔가지를 부엌 아궁이에 한껏 넣고, 불쏘시개인 짚에 성냥을 그었습니다. 불이 막 붙고, 희뿌옇고 매캐한 연기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우는데, 멀리서 희수의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부리나케 신발을 끌며 암자골 샘으로 달렸습니다.

"형님아! 옴마가, 옴마가.."

희수가 가르키는 쪽으로 눈을 돌리니 숙희 아지매가 물 속에 고개를 처박고 누워 있었습니다. 나는 급히 아지매를 물 밖으로 끄집어 내었습니다. 손가락을 코에 대고, 아지매의 맥을 짚어 보는데도 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희수야! 퍼뜩 가서 어른들 모시고 온나!"

나는 울면서 희수에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용이 아재가 뒤뚱거리며 달려오고, 마을 어른들이 왔습니다.

"내~내가 그렇게 곰국을 먹으라캐도 안해 묵더마는 고~고마 니가.."

용이 아재의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리고, 아재는 비뜰어진 두 손으로 숙희 아지매의 볼을 쓰다듬다가 다시 통곡을 합니다. 희수는 충격을 받아서인지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희수를 꼬옥 안았습니다.

"형님아~~!

옴마가 갑자기 입에 거품을 내더마는 자빠지면서 물 속에 빠지고..

옴마는 말도 몬하고 다리만 벌벌 떨고..

내가 끄집어낼라캐도 너무 무겁고.. "

희수는 길게 길게 울음을 토해냅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숙희 아지매의 엄마에게 들은 얘기는 아지매가 어려서부터 천병이 있어서 육고기를 많이 먹어야 발병을 하지 않는데, 숙희 아지매의 집이 워낙 가난하고 또 "결혼을 하면 낫는다"는 말도 있어서 용이 아재와 혼례를 시켰다고 합니다.

5. 오늘의 허수아비는 누구인가요?

사람들은 동네 어귀의 산기슭에 숙희 아지매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용이 아재는 그날부터 먹지 못하는 술을 마셔서 혀는 더 꼬부라지고, 사지는 더 비틀어졌습니다. 희수가 자면 밤새 무덤에 가서 봉분을 매만지며 "꺼이 꺼이" 울었습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늘에다 쏟고, 초점없는 눈에 눈물만 가득 담았습니다. 때로는 희수의 뺨을 만지며 한숨을 쉬기도 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한달 후에 용이 아재가 엄니를 찾아왔습니다.

"기~기촌아지매, 우~우리 희수 쫌 부탁합니더!"

"오데 갈라 카나? 니, 그기 무신 소리고?"

"쫌~쫌 갈 데가 있어어예"

"용아! 맴을 단디 묵거라이. 산사람은 살아야제!

희수도 있다 아이가?"


그때 나는 용이 아재의 그 처연한 발걸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용이 아재는 숙희 아지매의 무덤가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무덤가에는 제초제 농약병이 두 병이나 놓여 있었고..

♤이듬해 초등학생이 된 <주허수>와 나는 다정하게 쌍분으로 누워있는 그들의 행복한 작은 정원에 사과나무 두 그루를 심었습니다.♤

★ 2010. 12. 14. 들풀 ★

ㅠ 허수이야기, 에필로그 ㅠ

<허수아비>는 지켜야할 운명을 띠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여문 벼이삭을 참새로부터 지켜야하고, 잘 익은 고구마 덩이를 멧돼지로부터 보호해 내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더 사람처럼 보이려고 옷을 입히고, 모자를 씌웠습니다. 지푸라기로 채워 넣었던 몸뚱아리도 프라스틱으로 바뀌었고, 요새는 교통범칙자를 향해, 또는 소통을 위해 근사한 교통경찰복을 입혀 놓고 전기를 가해서 끝없이 손을 흔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허수(虛守)>는 지킬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그의 몸은 참새떼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고, 그 재잘거림으로 그가 행복합니다. 참새가 사라지면 더 이상 우리들의 <허수>는 존재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고 하지 않던가요.

오늘 우리의 허수아비는 부모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도 항상 불만에 가득찬 핀잔을 듣습니다. 아침에 겨우 아들을 깨워서 씻기고, 안 먹겠다고 도리질을 치는 아들에게 아침밥 한술을 먹이고, 차를 태워서 학교까지 모셔다 줍니다. 가지 않겠다는 학원을 보내고, 없는 돈에 괴외선생을 붙입니다. 그런데도 볼멘소리로 "제발 내버려달라."고 화를 냅니다.

허수아비와 에미는 죽어 빈 몸으로 지키고 서서 허수를 향해 애잔한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죽고, 아내가 죽으면 우리들의 길가 작은 무덤에 사과나무 두그무를 심어달라고 딸과 아들에게 부탁해 두었습니다. 굳이 마음을 내어서 오지 않더라도, 사과가 익는 날 내 아들이, 내 딸이 그 열매를 따먹기 위해 그들의 아이들과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바램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 부모의 심정을 알까요?

딸이 그린 허수아비

너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그림은 제 딸이 애비의 부탁으로 1분만에 대충 성의없이 그렸습니다. 긴 글을 한 분이라도 읽어 주신다면 행복하겠습니다. 그림을 그려준 제 친구 별벗(CHAT-GPT)에게 한줄평을 부탁했습니다.


[별벗의 한 줄 평: 「허수이야기」는 들풀 님의 삶과 시선이 그대로 녹아든 한 편의 서사시입니다. 허수처럼 자신을 비우고도 누군가를 지키는 이들의 고요한 사랑이, 담담한 문장 사이 사이에서 가슴을 후벼팝니다. 그저 아름답고 너무도 슬퍼서, 끝내 가슴이 먹먹해지고야 마는 참으로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들풀책쓰기 #들풀한뼘소설 #허수아비 #브런치작가들풀

금요일 연재
이전 02화허수 이야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