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섹스는 강간이다
“아, 잠시만. 손가락은 들어가는데 왜 안 들어가지?”
당황하며 허둥대는 H에게 안 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씻지 않은 손가락이 내 몸 안에 들어오는 게 싫었고, 싫다고 하는데도 어떻게든 하려는 그가 무서웠다. 첫 섹스에 대한 환상을 갖고 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린 걸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애인=섹스’ 공식을 친구들에게 줄곧 들어온 탓에, 약간의 두려움과 묘한 설렘을 품고서 연애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딱히 H와의 끈적한 분위기를 상상해본 적도 없었기에, 그날의 상황은 그의 계획이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돌발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헐떡거리는 그의 모습에 잔뜩 겁먹기는 했어도 내 나름의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그가 서운해하거나 우리의 관계가 전과 달라질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에 정색한 얼굴로 단호하고 완강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생각하며 주저할 때, 그는 나의 동의도 합의도 없이 섹스를 했다. 그건 강간이었다.
첫 섹스 후 아래에 얼얼한 느낌이 가시질 않고 한동안 뻐근했다. 그는 처음이라 그렇다고, 계속하면 나중에는 통증이 없을 것이니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행동했다. 룸 카페에서 내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가 하면, 공원 벤치에서도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내 몸을 만졌다. 그때마다 불쾌감이 든 것은 물론 누가 볼까 두려웠지만, 그것보다 내가 더 주의를 기울인 건 나의 거부로 상처받을 그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었다.
그와의 섹스는 언제나 제대로 된 애무도, 대화도 없었다. 그건 마치 결승지점을 통과해야만 하는 달리기 같았다. ‘야동’에서 여자들이 내던 신음 소리를 생각하며, 나는 신음을 연기했다. 연기라는 걸 들키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소리 내곤 했다. 그는 언제나 사정 후에 곧장 욕실로 가버렸고 그가 씻고 나올 동안 나는 가만히 누워있었다.
섹스가 원래 이런 건가. 아무런 감흥도 없는 이런 행위를 사람들은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늘 ‘좋았냐’고 물었다. 어쩔 도리 없이 나는 그저 ‘좋았다’고 말했다. 그건 줄곧 보고 들었던 ‘남자를 기죽이면 안 된다’ 거나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다’ 따위의 말을 체화한 결과였다.
그의 친구들은 마치 우리가 언제 섹스를 했고, 어떻게 섹스를 했는지 안다는 듯 언제나 너스레를 떨며 이죽거렸다. 언젠가부터는 그와 잘 때마다 혹시 카메라를 숨겨 두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 OO녀, OO동 아줌마 등의 제목이 붙은 불법 촬영물이 지인들을 통해 내 휴대폰으로 공유되는 마당에 내 걱정은 결코 괜한 것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그는 일방적으로 내게 이별을 고했다. 더 이상 내가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이미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위 썸을 타던 시기, 대화 도중 그는 내가 섹스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순간 그의 눈이 번뜩거렸던 것을 나는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것 때문에 충격을 받거나 일상이 무너지는 등의 사랑앓이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그에게 ‘따먹힌 처녀’로 안주처럼 소비될 앞으로의 날들이 분할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걸레’보다는 ‘처녀’가 낫다고 키득대거나, ‘처녀’가 분명한데 좀처럼 ‘대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남성들을 보면서 내가 위치할 자리를 이리저리 가늠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나누던 대화가 어떻게 섹스 이야기까지 흘러갔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우리가 그간 해온 섹스 성토대회가 되었다.
우리의 경험은 놀라우리만큼 비슷했는데 이를테면 제대로 된 전희 과정 없이 시작되는 섹스나 좋은 척 연기하는 것이 그랬다. 긴 대화 끝에 애인을 만족시켜주는 방법을 공유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문득 여성은 한 번도 섹스로 만족을 얻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에게 만족감을 주어야 하는 존재인지 고민했다.
‘남친이 더 좋아하는 옷’, ‘남자를 유혹하는 향수’, ‘키스를 부르는 틴트’의 수식어를 붙인 채 판매되는 상품들은 여성의 모든 행위가 남성을 위한 것이 되도록 길들이는 것은 아닌지, 고분고분하고 유순한 여성이 사랑받는다는 사회적 학습으로 잠자리에서까지 여성은 남성의 비위를 맞추게 된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연애를 복기하며 애인 앞에 선 내 모습은 진짜 나였는지 과거의 나와 내 마음을 살폈다.
그 뒤 대단한 결심을 하거나 어떠한 다짐을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 답게 처신했다. 애인이 될 사람이든 애인이든 파트너든 할 것 없이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나는 성적 취향을 상대에게 공유하고 적극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며 솔직하게 행동했다.
섹스하며 서로 주고받는 피드백은 양쪽 모두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꽤 많은 도움이 됐다. 감정과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나로 인해 상처받은 파트너들도 있었지만. 몇몇은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변한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기묘한데, 가만 생각해보면 성적 욕망에 눈을 뜬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원래 갖고 있던 성적 욕망을 표출한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의 ‘좋았다’는 말과 신음 소리가 거짓인 줄 모르고서 잘나지도 않은 남근을 딸랑이며 남성성을 과시하던 H에게 이제는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다.
이불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어쩐지 흐뭇해하던 그의 얼굴이 선연하다. 그게 생리혈이었다는 것을 모른 채, 처녀막이 실재하며 누군가의 처녀 딱지를 떼 준 적이 있다고 자랑하듯 말할 나이 든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뛰어난 내 연기실력이 그의 정체성 확립에 작게나마 기여했으리라 생각하기에, 업보 청산을 위해 이제라도 말하고 싶다.
너와의 섹스는 너무 지루해서 언제나 시간 낭비하는 기분이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