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왕년에 제 앞에서 여자들이 질질 쌌습니다.”
삶을 운동에 온전히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닌 남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언제나 조합원들 앞에서 자본이 노동자를 어떻게 착취하는지, 노동자가 왜 하나로 뭉쳐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이성적인 모습으로 강단 있게 행동하면서도 적절한 때에는 감성에 호소하던 그는 베테랑 활동가였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칭송해 마지않는 훌륭한 활동가의 입에서 여성은 꽤 자주 성적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단순한 ‘농담’이었다.
그가 하는 말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언제나 진중하고 근엄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그는 자신이 ‘형님’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달랐는데, 이를테면 방금까지 생글생글 잘 웃다가도 내게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건조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 무렵 나는 내가 배울 것이 태산인 그러니까 이도 저도 아닌 무늬만 활동가인 새내기이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는 항상 나를 교정하려 했고 나는 순응하며 그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그런 관계가 지속되자 어느샌가 나는 그의 앞에서는 사소한 말과 행동도 검열하며 그의 눈치를 보게 됐다.
‘동지’의 사전적 의미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다. 어린 사람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씨’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사회 통념처럼 노동조합에서도 자연스럽게 ‘동지’는 나이가 많거나 활동 경력이 오래된 선배들이 젊은 활동가를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됐다. 이름과 직책을 모르는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날 때면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나와는 달리 남성들은 적지 않은 나이 차에도 서로를 형님, 동생이라 불렀고 그것은 흡사 가족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구축한 남성연대는 너무나 공고해서 여성인 데다 갓 대학을 졸업한 내가 낄 틈이 없었다.
한 남성 활동가가 처음 본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을 때 나는 여기에 아가씨가 어디 있느냐며, 이름을 모르면 내 직책으로 호칭하라고 일갈했다. 내 말에 황당해하는 그의 표정과 그 광경이 재미있는지 킥킥대는 주변 남성들은 나를 동지도, 활동가도 아닌 그저 ‘어린 여자’로 보는 듯했다. 나는 그제야 내 위치를 알게 됐다.
직장 내 성폭력 문제 뉴스와 그것을 풍자하는 코미디를 볼 때면, 술자리에서 술을 따르라거나 옆에 앉으라거나 하는 등 나를 노골적으로 성적 대상화하지 않는 기성 활동가들에게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단지 거나하게 술에 취할 때면 난데없이 아줌마를 부르라거나 아가씨를 불러서 노래방에 가자는 그들의 대화가 내가 있을 때도 종종 오갈 뿐이었다. 그 말들은 매번 투명 인간이 된 나를 뚫고 지나갔다.
언젠가 회식 후 귀가하려는 내게 한 남성 활동가가 같은 방향이니 같이 택시를 타자며 내 옆에 섰다. 조금 취한 듯해 보이는 그를 일행 중 누구도 말리지 않았고, 나는 결국 그와 택시를 탔다. 그는 택시 안에서 갑자기 내 손을 주물럭대며 내게 무어라 말했다. 당시의 불쾌했던 감정만 남았을 뿐 그의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날 불 꺼진 집에서 택시 안의 상황을 곱씹다 울어버렸고, 이튿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대했다. 나는 그날 이후 그와 말도 섞지 않으며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야만 뒤탈이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그 일을 회상하면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했다. 당시 나와 나보다 20살 이상 많은 그를 섹슈얼한 관계로 몰아가는 분위기도 심심찮게 있었는데, 그때마다 불편한 내색을 하기가 어려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던 내 탓일까. 술에 취한 그의 탓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옆에만 있어도 둘이 뭐냐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희희낙락했던 다른 남성들의 탓일까. 결국 ‘택시를 같이 타지 말았어야 했다’ 하고 내 탓으로 결론지으며 그 일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4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가로 지내던 중 이따금 남성 활동가를 둘러싼 불미스러운 풍문이 들려왔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할 만큼 심각한 내용과 범죄 사실을 들으며 혼란스러웠다.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논란의 남성 활동가들은 속속들이 복귀했다. 남성 활동가는 개인사가 부도덕하거나 성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있더라도 언제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노동조합에서는 남성 활동가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나도 남자였으면 이럴까?’라는 생각은 ‘내가 남자였으면 좋겠다’로 바뀌었다. 여성으로 살아오며 줄곧 겪은 설움을 진보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노동조합에서 더 크게 느끼게 될 줄 몰랐다.
노동조합 활동가로 일하며 몇 해를 보내면서 어느 정도 ‘짬’이 찼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장소를 불문하고 남성들이 주고받는 농담과 키득대는 웃음소리에 나는 자주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종종 여성 활동가들도 그에 동조하거나 주도적으로 ‘농담’을 했고, 의아함과 불편함 사이를 오가던 감정은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주요 발화자가 운동판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과 농담을 빙자한 모욕적 언사가 그들의 일상이라는 것이 참담했다.
순진하게도 나는 모든 활동가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한 삶을 사는 것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속단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역과 성별, 나이를 불문한 기성 활동가의 ‘농담’ 때문에 수치감을 느낄 때마다 못 들은 척, 못 알아듣는 척, 못 본 척하며 상황을 모면했다.
그러나 눈과 귀를 막는다고 명백한 여성 혐오를 부정하기란 어려웠다. 남성연대를 비롯한 권위주의가 노동조합 안에서 건재하다는 것과 모든 조직을 통틀어 가장 가부장적인 곳이 어쩌면 노동조합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위선적이고도 기만적인 모습을 여러 사람에게 발견하면서 나는 노동조합을 뛰쳐나왔다.
이후 또래 여성 활동가들과 소통하며 크고 작은 성폭력 문제가 노동조합에 만연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어렴풋이 짐작했던 그것이 구조적 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노조에서는 ‘어리고’, ‘미숙한’, ‘여성’은 대개 필요 없는 존재로 치부됐고, 어떠한 모욕도 받아내는 ‘탱커’ 역할을 했다. 그러다 ‘탱커’가 각성하거나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튕겨 나가듯 스스로 조직을 떠났고, 계속해서 노동조합의 ‘가족 공동체’가 유지됐다.
스트레스로 출근 준비 중 자주 쓰러져 병가를 쓰던 내게 “보기보다 몸이 약하네”라고 말했던 남성 활동가, 애인과 찍은 사진을 보고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왜 너랑 연애하니? 붙잡아서 결혼해라”라고 말하던 여성 활동가, 목에 생긴 상처를 두고 “키스 마크냐?”라고 묻던 남성 활동가. 그들 모두가 노동조합의 주축이자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다.
내가 보고 들었던 모든 내용을 기록하지 못하지만, 꽤 많은 것을 구체적으로 기억한다. 노동조합에서 권력을 나눠 가진 사람들이 나를 겨냥했던 말들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고, 그때를 떠올리면 여러 감정이 교차하며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진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나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나는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며 권력자들 앞에서 납작 엎드려 순응하는 존재였으므로, 그래야만 내가 애정 하는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으므로.
나의 모든 것을 제약했던 노조에서 벗어나자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몸과 마음이 회복됐다. 휴식기 동안 노동계 안에서 외면받았던 페미니즘을 더욱 적극적으로 공부하면서, 기성 활동가들이 내게 강요했던 ‘활동가 다움’과 ‘제대로 된 활동’을 생각했다. 곱씹을수록 우스웠다.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말하면서 여성을 희롱하고 품평하던 그들이 강조한 ‘활동가 다움’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마침내 누구도 내 활동을 잘못되었다고 단정 짓거나 규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짓누르던 억압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노동조합을 나올 때 “활동은 계속할 테지만. 그 공간이 여기는 아닐 겁니다.”라고 했던 내 말이 어느 정도 지켜지는 듯했다. 내가 만든 여성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젠더 이슈는 물론 사회, 경제. 역사 등 다양한 담론을 심도 있게 공부하며 내 활동의 길을 개척했다. 기성 활동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내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일을 했고, 대중과 직접 접촉하며 보란 듯이 내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생계의 어려움에도 동네 책방 B급 취향을 운영하며 그 활동을 이어간다. 그렇게 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를 폄하했던 활동가들에게 묻고 싶다. 자, 이제는 내가 당신들이 말하는 ‘활동가 다움’에 얼만큼 부합하나요?
유시민은 2002년 발생한 당내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여성들을 향해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를 줍고 있다’라는 말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여성이 하는 일은 항상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가치 절하되었고, 이를 증명하듯 유시민은 여성의 일을 ‘조개 줍는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조개를 줍는 일은 존엄의 문제였고, 여성에게 해일은 언제나 다름 아닌 우리 내부에서 권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정치권의 성폭력 문제는 노조 안의 그것과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모양새가 참으로 닮았다. 성폭력 사건을 비롯한 젠더 문제는 대의를 위해 덮어야 하는 작은 일이 돼버린다. 일베의 사회화 시대, 노조 혐오가 팽배한 오늘 노동운동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성찰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늘 거대한 해일 앞에 있었고, 그때마다 조개를 줍고 있었다. 여성이 부차적 존재로 취급받는 한 나는 앞으로도 거대한 해일을 마주하며 조개를 줍겠다. 아니 사실 해일은 여성이고, 조개를 줍는 것은 남성일 지도 모른다. 없던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여성들이 거대한 해일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