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두통

하루의 온도

by 유담연

유난히 일어나기 힘든 날이 있다.

대부분 이유는 단순하다.

기분이 울적해 하루 종일 누워있고 싶거나 혹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애써 무시하며 게으름 피우고 싶은 날, 그게 오늘이었다.

일주일 전 신청한 회계 자격증 시험을 보러 남대문까지 가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침대에 더 누워있게 했다. 자격증을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딸 수 있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시험을 신청해 놓은 이상 가야 했다.

난 이제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5일 동안 벼락치기로 회계를 공부했다.

무슨 정신으로 공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통째로 외워버렸다.

그리고 오늘 시험장에 가서야 깨달았다.

'아 회계는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사실 시험장에 가는 것도 힘들었다.

밥 먹고 소파에 앉아 널브러져 한참을 멍때리고 있다가 설거지를 하다 보니 이미 나가기로 마음먹었던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설거지를 멈추고 급하게 옷을 입고 준비해 나갔다. 그때부터 시험장까지는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시험장까지 갈 때는 가관이었다. 서울에서 몇 년의 대학과 직장 생활을 보내 서울 지리에는 자신이 있다고 거만하게 믿고 있던 내가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만 것이다.

한 십여 분간 시험장 근처를 뺑뺑이 돌았던 것 같다.

결국 시험 시작 2분 전에 도착해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교실 안 사람 중 마지막으로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다시 시험을 보러 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해 신중하게 찍었다.

객관식 시험이라 다행이었다.


서울에 나간 김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며칠 전 '세기말의 사랑'이라는 영화를 예매했다.

시험을 끝내고 낭비하는 시간 없이 바로 영화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맞는 시간이 없었다.

극장을 다 뒤지다가 괜찮은 시간대를 찾아 예매했었는데 알고 보니 gv였다.

누가 나오나 찾아보니 변영주 감독이 온다고 했다.

방구석1열의 열렬한 팬인 나로서는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사실 '세기말의 사랑'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감독과 한 배우였다.

69세를 통해 감독은 알고 있었고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봤던 노재원 배우가 나온다고 해서 궁금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이상하지 않았다.

포스터의 배우 머리 색깔이 강렬했기에 정말 독특한 영화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상하다기보다는 현실적이었다.

주인공인 영미가 좋았다.

사회에서는 소외당한 사람이라고 구분 지어지지만 그가 가진 따뜻함과 굳센 마음이 좋다.

사랑스럽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무언가를 아니면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해 본 적이 있을까.

끝을 모르지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본 적이 있었나.

영미를 잘 알게 된 사람들은 아마 결국 영미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gv에서 유진 역을 맡은 임선우 배우가 했던 말이 인상 깊었다.

유진은 구도영보다는 영미를 더 그리워할 거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누구라도 유진과의 대화는 불편하다.

사회적 약자라는 불편한 시선에 대항하기라도 하는 듯 얕보이지 않으려 말을 세게 내뱉는다.

하지만 영미와는 그 단계를 넘어버린 것 같다.

자신의 진정한 마음속 그 약한 마음을 들켜버렸다.

진정한 관계의 시작은 그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유진은 영미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영미를 그리워할 것 같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 채 영화가 끝나버렸다.

독립영화는 늘 그렇듯 그저 질문만을 던져 버리고 나를 생각과 고민에 잠기게 한다.

좋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해서 너무 여러 번 고민한 끝에 결국엔 처음 생각했던 것들이 희미해져 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좋았던 장면들이 꽤 있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호텔에서 영미와 도영의 대화이다.

새천년이 밝아오는 날 관람차를 바라보며 유진을 떠올리는 도영이 좋았다.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따뜻하지만 약간은 씁쓸한 마음.


영화가 끝나고 두통이 시작됐다.

아침부터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런 걸까.

두통이 와도 토요일 밤의 맥주를 포기할 수는 없다.

글을 쓰며 맥주 한 캔을 다 비웠다.


202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