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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Oct 14. 2022

(3) 예수님께서 신성 아닌 아담의 권세로 사신 증거

예수님께서 신성이 아닌 아담의 후손 즉 두 번째 아담으로서 사신 증거들

(3) 예수님께서 신성이 아닌 아담의 후손 즉 두 번째 아담으로서 사신 증거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 회복시키신 권세는 하나님이신 자신에게 속한 신성을 회복시키신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으로서 사람의 권세를 회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고 완전한 사람으로 사셨다. 신성에 속한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사람의 권세를 사용하신 것이다. 즉 두 번째 아담으로서 아담의 권세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 다음의 네 가지 주제를 통해 설명을 하겠다.

1)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

 

A.  세례 시 너는 내 아들이다

 

13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그에게 나아오시니, (마태복음 3:13, 바른)


11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라고 하였다. (마가복음 1:11, 바른)


22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으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3:22, 바른)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하늘로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구약의 인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새로 말씀하신 것이다. 구약의 삼하 7:14, 대상 22:10, 시 2:7, 사 42:1과 연관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할 것이 있다. 구약의 이 구절들은 모두 메시야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삼하 7:14절과 대상 22:10절은 모두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이다. 시 2:7절은 메시야의 예표를 나타내는 시편이지만 동시에 솔로몬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지칭되는 구약의 왕은 솔로몬이 유일했다. 따라서 시 2장은 솔로몬을 지칭한 시편인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는가?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판에 박힌 생각이다. 그런데 삼하 7:14절과 대상 22:10절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고 계신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구절도 그러하고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아담의 위 즉 아담의 아버지가 하나님으로 기술되어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결국 예수님의 인간계보의 최상위가 아담이고 그 아담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되시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이 계보의 논리를 유념하고 누가복음 3:22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나신 예수님께 하고 계신 말씀인 것이다.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으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3:22, 바른)


열왕기와 역대기에 솔로몬에게 지혜의 성령님을 기름 부으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그를 아들로 칭하셨고 하나님 자신을 친히 그의 아버지라고 칭하셨다. 지혜의 신이신 성령님이 부어지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았다. 동시에 이것은 신약에 예수님이 오시어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는 장면을 예표하는 것이다. 


이단

이단들 중 예수님의 세례장면에서 예수님은 인간이셨는데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일부는 맞는 것인데 엄청난 오류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다. 일부만 보고 일부만을 주장하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원래 영원 전부터 선재하신 하나님이시다(요1:1). 따라서 인간에서 신이 되신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이셨다. 원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아들로 나실 이유가 없다. 이것은 예수님이 신으로 태어나시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 것이다. 이단의 교주들은 예수님도 인간인데 하나님의 아들 즉 신이 되셨으니 자신들도 하나님의 영을 받아 신이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참 어이가 없는 어불성설이다.


헬라적 신관

그런데 우리가 이 예수님의 세례장면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결코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하나는 낳은 자요 하나는 낳음을 받은 자다. 심하게 말하면 하나는 만든 자요, 하나는 만들어 진 자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방의 신들을 예를 들어 그리스의 올림푸스의 신들은 신의 아들들이 있고 결혼관계도 있다. 그들은 인간형 신인 것이다. 인간들이 상상해낸 것이다. 마귀와 사탄이 허구로 꾸며 낸 것이다. 인간처럼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심지어 인간처럼 소멸하기도 한다. 이들은 인간의 사악한 욕심과 마귀의 속임이 결합된 거짓신의 형태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은 그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다. 그 3위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예수님도 결코 만들어지거나 낳아지신 분이 아니다. 뒤에 출판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책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해지신 것은 신으로서 칭해지신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아담 즉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위해 대속의 삶을 사신 인성으로서 칭해지신 것이다. 성경 안에 이 모든 증거들이 있다. 그런데 신플라톤주의나, 스콜라, 스토아주의를 신학 안에 끌어들인 헬라철학을 신봉했던 신학자들이 헬라적 우스꽝스러운 신의 개념을 삼위일체 안에 가만히 끌어들였다. 이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과 유사한 예수님의 유출과 성령님의 유출을 주장한다. 즉 예수님과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전이기에 피조물은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또한 예수님의 영원전발생설

[1]과 성령님의 영원전발출설은 사실 신플라톤주의적 사상에서 나온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이라는 하나님들의 칭호를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다. 신학이 형성되면서 이러한 수많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들이 작게 또는 크게 있었다. 역사적으로 신학적 오류를 가지고 있다가 성경 안에서 올바른 신학을 발견하고 개혁하여 돌아간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과거의 심각한 신학적 오류의 예 중 일부를 아래에 언급해 보겠다. 


예수님은 그냥 인간이셨다. 그러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적이 없었다. 단지 몸을 가지신 것처럼 보이도록 스스로를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단지 인간에게 그럴듯하게 몸을 가지신 것처럼 보이게 속이셨을 뿐이지 실제로는 더러운 육체를 입고 오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반은 신이셨고 반은 인간이 셨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피조물이다. 


삼위일체란 몸은 하나에 머리가 셋이 있는 신의 존재 형태다. 


삼위일체란 한 분이 세분의 모습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연기하신 것이다. 즉 삼위 하나님은 실제로는 한 분밖에 없다. 단지 그 한 분이 세 사람처럼 연기를 하신 것이다.


세 하나님의 위격 중 하나님은 예수님보다 우월하시고 예수님은 성령님보다 우월하시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셨고 성령하나님은 성자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탄에게 대속물로 주고 우리를 사탄에게서 사셨다. 즉 예수님은 사탄과 거래를 하셨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기의도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즉 자신의 노력과 의가 동반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만약 자기 의가 부족하다면 교회가 그것을 보충해 줄 수 있다. 이것은 헌금을 통해서도 가능한데 바로 죄를 면죄해주는 면죄부를 헌금으로 살수 있다. 이것을 통해 죽음 이후의 심판에서 부족한 의를 보충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나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므로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구원받을 수 있다. 즉 자신의 노력과 선행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수행과 노력을 통해 신적인 존재로 화한다. 이를 신화(神化)라고 한다. 신화(神化)를 통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 과도기의 모습이 성인이다. 그래서 수많은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가 응답되고 그들을 통해 기적과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위의 내용들은 신학적 오류로 이미 모두 개혁되어 올바른 진리에 의해 그 명맥이 끊어졌다. 


오리겐(헬 오리게노스, 라틴 오리게누스)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도 많은 신학적인 부족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사에 있었던 이들의 부족함을 이단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족한 지식으로 고군분투하며 신학의 정립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잘 알지 못했던 시기의 과도기에 있었던 것이다.


 오리겐에 대해 고찰해 봄으로 예수님의 영원발생설과 성령님의 영원발출설이 신학적 오류임을 밝혀 보려 한다. 오리겐은 자신의 글에서 예수님과 세상의 피조물들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이는 신플라톤주의적 주장이지 성경의 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리겐(Origen)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는 영혼의 선재(preexistence of souls) 였다, 하나님은 물질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수많은 무형의 " 영적 지능들 "(ψυχαί)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혼들은 처음에는 창조주에 대한 묵상과 사랑에 헌신했지만, 신성한 불의 열정이 식자 거의 모든 이러한 지성들은 결국 하나님을 묵상하는 데 싫증이 났고 그분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렸습니다"(ψύχεσθαι).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육체 없이 미리 존재했던 혼들이 성육신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줄어든 혼들은 악마들이 되었다. 적당히 사랑이 줄어든 혼들은 인간의 혼이 되어 결국 육신으로 성육신하게 된다. 사랑이 가장 작게 줄어든 혼들이 천사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어 남아있던 한 혼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신의 말씀( 로고스 )과 하나가 되었다.  로고스도 결국 육체를 가졌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신인(신과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도 천사도 인간도 악마도 모두 육체가 없는 혼적 존재로 먼저 창조되었다가 나중에 육화(Incarnation, 성육신)의 과정을 거치면서 육화되어 일부는 육체를 가지게 되었고 천사나 악마와 같이 다른 존재들로도 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오리겐이 기초를 놓은 삼위일체에 예수님께서 피조물이며 하나님에 의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단적 사상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오리겐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도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이며 단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은 피조물들은 악마나 인간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한 순수한 사랑의 열정을 가지셨으므로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다.


또한 오리겐은 삼위일체와 신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오리겐의 개념은 불가해성이다, 즉 완전한 통일체, 비가시적이시고 무체적이시며(육체가 없이 영적이시고), 물질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시고, 피조물이 생각할 수조차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마찬가지로 불변하시며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능력은 그의 선하심과 정의와 지혜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 그리고 비록 아무것도 필요 없는 분이시지만 그분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은 그분이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했습니다. 이 계시, 즉 하나님의 외적 자기 발산은 다양한 방식으로 오리겐에 의해 표현되었으며 로고스는 많은 것 중 하나일 뿐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물이었으며(참조, 잠언 8:22),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창조적인 중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중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의 통합체이시기에 무수한 피조물들의 출처이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리겐의 사상을 인용하여 편집한 이 글들이 어렵게 느껴질 것인데 이 글을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에 초월해 계시고 그 하나님은 비루한 이 세계와 직접 닿으실 수 없는 분이지만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탁월하심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도구로 발출 즉 발산을 선택하셨는데 이 발산의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계시요 로고스였다. 즉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예수님은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발출이나 발산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신플라톤주의의 발출과 일치하는 것이다. 최고 존재인 제 1자에게서 발출하여 혼들(프시카이, ψυχαι)이 되고 그것이 또 육화(신플라톤 주의에서 사용한 이 단어는 성육신을 뜻하는 단어와 같은 단어)하는 단계를 거치는데 그 중 처음 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원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셨다는 영원발생설이 나온 것이다. 현재 기독교인 누가 봐도 정상적인 신학이 아니다. 그런데 신약의 교회가 탄생한 이후 신학이 정립되기 까지는 많은 시간들이 소요되었고 그 과도기에 있었던 오리겐은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미숙한 이론들을 많이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는 오류는 수정되었는데 이 때 예수님은 영원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다는 즉 영원 전 피조되셨다는 오류는 여전히 그 흔적을 남겼다. 이는 아주 교묘한 것으로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영원 전에 나셨기 때문에 피조되신 것이 아니다. 창조 이후에 피조된 우리는 피조물이지만 예수님은 영원 전에 나셨기 때문에 피조물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분리 또는 분여로 이는 피조와는 다른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므로 비합리적이라도 그냥 믿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원발생설의 실체다. 사실 삼위일체의 신비가 아니라 원래 같이 있었던 오류였던 예수님은 피조물이다가 제거되고 나서도 여전히 교묘하게 남아있으려고 하니 이러한 교묘한 억지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리겐의 다음 글들 안에서 이 거짓교리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의 피조설이라는 큰 잡초를 뽑아내고 그 일부의 뿌리가 남아 다시 싹을 틔워서 올라온 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원발생설이다. 이것으로 인해서 파생된 호칭이 성부와 성자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의 호칭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라는 구절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구절들에서 언급되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호칭은 오직 인간인 우리와 하나님, 그리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과 하나님 간에 적용된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 간의 호칭은 아닌 것이다. 오직 이런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낳은 자와 낳음을 받은 자, 또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인 것이다.


 로고스는 합리적 창조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우주에 만연해있다. 로고스는 논리와 합리적 사고 능력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작용하며, 인간을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로 인도합니다. 인간이 합리적 사고 안에서 발전할 때(합리적 사고가 발달함에 따라) 모든 인간은 더욱 그리스도와 같아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고 그리스도 안에 종속적으로 포함되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오직 로고스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신 것은 창조의 명령이다. 로고스는 실질적으로 단일체이지만 그는 개념의 다양성을 이해하므로 오리겐은 그를 플라톤 방식으로 “본질 중의 본질”과 “이데아 중의 이데아”라고 불렀습니다.


 오리겐은 예수님을 이데아 중의 이데아라고 불렀다. 그의 신학은 신플라톤 주의와 스콜라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근본으로 해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순수한 성경에서 나온 사상이 아닌 이교의 철학으로 오염된 사상을 많이 주장했다.

 오리겐은 종속주의자였다. 그는 성부는 성자보다 우월하고 성자는 성령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이 모델은 플라톤적 분여에 기초한 것이다. 제롬은 오리겐이 기록하기를 성부 하나님은 성자와 성령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보이지 아니하며 성자는 성령에게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어느 시점에서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창조되었고 성령은 아들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제안하지만, 다른 시점에서 그는 “지금까지 나는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오리겐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가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고 종속주의가 아직 이단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사실 아리우스파 논쟁에서 우위를 점한 4세기 후반의 모든 정통 신학자들은 일정 범주에서는 종속주의자들이었다. 오리겐의 종속주의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단일성을 옹호하려는 그의 노력에서 발전되었을 수 있다. 


 여기서 오리겐은 성부하나님은 성자예수님보다 우월하며 심지어 성자예수님은 성부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성자예수님보다 성령하나님은 하위의 존재이며 심지어 성자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또 그 후에는 성경 안에서 성령하나님의 창조를 발견할 수 없다고 나온다. 그 자신의 신학도 아직 정립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이 성경의 모든 진리를 집대성할 수 없음으로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오리겐의 시대나 그 후대에도 신학의 기본적인 틀들이 다져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성경 안에서 신학적 틀들을 발견해가는 시기였던 것이다. 오리겐 스스로도 자신의 신학을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오리겐에게 다른 신학자들보다 위험한 요소가 많았던 것은 그의 신학의 방법론의 문제들 때문이었다. 


 먼저 그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알레고릭한 해석을 주요 방법론으로 사용했다. 성경을 자신의 기호대로 개똥철학적으로[2] 해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방법론이다. 주로 이단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들이다. 또는 신령함을 강조하는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부류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성경의 비유는 이와는 다르게 문맥과 그 배경과 그 청자들에게 그 뜻이 이견 없이 하나로 모여서 해석되게 되어있다.


 또 오리겐는 성경말씀이 말씀하는데 까지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지 않으면 그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이 명확히 말하지 않는 부분은 자신이 매료되었던 철학을 동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신학을 서술했다. 위에 인용한 혼의 선재에 대한 오리겐의 서술을 보면 그것은 성경의 사상이 아니라 스토아나 신플라톤주의적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나 다른 피조물이나 육체를 가지기 전에 먼저 그 혼이 창조되었고 그 혼이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식자 육체를 가진 하등한 존재로 떨어졌는데 그 중 그나마 가장 괜찮은 분이 예수님이다. 이것이 오리겐의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 시대에 팽배해 있던 일반론이었기에 오리겐도 그 시대도 이 거짓 사상을 받아들였다. 후대에 성경을 통해 이 거짓된 것들이 개혁되었지만 남아있는 잡초의 뿌리 일부가 여전히 신학 안에 있는 것이다.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삼위일체의 참된 신비는 불합리성으로 훼손되는 것이다. 신적 초월적 합리성은 신성 안에 포함될 수 있지만 불합리성은 그 신비와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다. 


6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이사야 9:6, 바른)


예수님을 예언하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다. 그럼 성부 예수님이 되시는 것이다. 뭔가 논리적 모순이 일어난다. 여기서 아버지라고 칭해지신 것은 창조자이시면 근원자라는 뜻에서다. 그리고 아담을 창조하신 창조자라는 뜻에서다.[3]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성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도 하고 남편이 되시기도 한다. 이는 모두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관계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데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정의할 때 이 호칭들이 혼동을 이루어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교적[4] 신들의 호칭이 가만히 들어 온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지칭하셨을 때는 인간으로 오신 두 번째 아담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자신을 세상에 내어 보내신 그리고 마리아의 몸을 덮어 자신을 인간으로 인간의 몸 안에 잉태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호칭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아버지를 부른 호칭이다. 두 번째 아담이 하나님을 부른 호칭인 것이다. 결코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호칭이 아니었다.


마치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원래 하나님의 신성이신 2위 하나님의 신격에 붙여지지 않고 인간으로 오셨기에 인간으로 성육신 하신 사람이신 예수님께 붙여진 것과 같은 원리다.


 만약 신플라톤주의적 이단 조직 신학의 신관에서 쓰는 호칭인 성자 하나님의 호칭이 옳다면 예수님의 세례장면과 관련되어진 본문은 더 큰 모순을 가지게 된다. 성자 하나님은 이미 신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나시고 인정이 되시는가? 벌써 영원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잉태되시고 발생하시었는데 왜 또 잉태되고 아들로 태어나시는가? 또 신성하고 죄가 없으신 분이 왜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으시는가? 그리고 로마서 1장에서는 왜 또 아들로 인정되시는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아들로의 인정이 왜 다시 필요한 것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의 구속적 대속의 삶에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오셨다. 피와 살을 가지고 죽음이 두려워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씨)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대속의 제물이 되시고 인간을 대신하여 승리의 삶을 사시기 위해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 피와 살을 가지고 오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사셨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 용서를 위해 죄인이 받는 물세례를 왜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이신 3위격중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왜 성령님을 새로 받아야 하는가? 모두 예수님의 신격의 관점에서는 필요치 않은 것이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두 번째 아담 즉 사람으로 오신 대속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죄인이 아닌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한 대속의 삶을 사셨기에 죄인처럼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고 성령님을 받아 거듭나는 장면이 필요한 것이다. 대속의 제물인 사람으로 어린양으로 오시어 우리대신 그 길을 가신 것이다.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가 너무 잘아는 내용이다. 죄인이 아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두 우리를 대신하여 하신 대속이었다. 사람의 죄를 사람으로서 대신지고 가신 것이다. 첫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두 번째 아담의 대속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들이라고 불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모두 우리를 위한 대속의 사역 중에 대속의 관점에서 우리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을 부르신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와 그리고 이와 동일한 표현인 아담의 후손 즉 인자라는 표현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고 만물을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라고 하신 명령을 온전히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권세를 예수님께서 회복하시고 그 권세를 통해 모든 일을 성령님의 한량 없는 기름부음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영빨(5력, 5권-영력, 지력, 체력, 인력, 물력)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스스로 노력으로 권세를 얻어보려고 산에 가서 소나무 뿌리를 뽑기도 하고 소위 영빨이 높다는 더 큰 기독교 무당들에게 가서 머리를 들이밀고 영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빨 자체가 무기가 되고 계급이 되고 그 영빨에 의해 종이 되어 하나님의 종이 아닌 그 영빨 가진 자의 종이 되어 복종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무당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들에서 굿을 하는 것이다. 과연 그 영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출처를 하나님께서는 아시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자신만 듣는 것처럼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또는 이에 대한 폐해에 지쳐 트라우마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모두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만인제사장설을 이해하지 못 한데서 나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의 성경적 신학을 바로잡고자 하는 목적

 

 영원발생설의 문제를 거론하는 목적은 교리적인 분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다. 영원발생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데 그것은 이교적인 사상이요 그 사상을 수 천 년에 걸쳐 교회 안에 들여놓은 원수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영원발생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영원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다. 그래서 창조된 것은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설이다. 가설인 이유는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이 성경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러한 사상은 이교의 신학에 등장한다. 플라톤과 신플라톤 그리고 스콜라와 스토아 학파에 존재하던 사상이다. 


원수가 신학 안에 가라지를 뿌린 목적

이 이교적 거짓 사상이 기독교 신학에 가만히 들어온 목적이 있다. 


첫 번째,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삼위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차등이 없는 하나님이심을 공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다. 즉 하나님 보다 하등 하신 분이 아니신 동일한 하나님이다.


두 번째, 거짓 사상이 기독교 신학에 들어온 두 번째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숨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근원부터 그러한 것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양자됨 즉 아들이 아닌데 아들로 겨우 인정만 하여 주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이다. 아들 됨은 원래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오직 낳음을 받는 인간에게만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 아담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다.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므로 하늘과 땅의 권세도 예수님께만 온전히 적용되는 것인 것처럼 보인다. 오직 인간은 예수님의 권세의 일부를 겨우 사용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게 된다.


 세 번째 거짓신학을 신학에 심은 사탄의 목적은 거짓신학을 심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인간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실행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인간이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권세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어 드리는 일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타락한 인간은 원수 사탄에게 자신의 권세를 빼앗기고 그 빼앗겼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기억 상실의 상태에서도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있기에 사탄의 조종에 의해 자신의 권세를 사탄을 위해 사용한다. 결국 그 권세를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기억상실에 걸려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강력한 권세를 아버지를 괴롭게 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탐욕에 젖은 비참한 짐승으로 만든다. 욕심의 썩은 고기를 찾아 그 구더기들이 덮은 그것을 탐욕의 침을 흘리며 삼킨다. 그 탐욕을 위해 옆에 있는 동료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필요하다면 그 동료를 죽여 인육도 먹어 치운다. 태초에 솔로몬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지혜를 소유했던 덮는 그룹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였던 그는 이제 썩은 고기와 그것에 이는 구더기를 삼키는 하이애나보다 더 비루한 존재가 되었다.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킬 길이 없으니 온 세상을 도둑질하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길을 선택한다. 현대나 과거의 역사가 포장되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실상을 알고 나면 그것의 실상이 200여년전 독일의 동부출신 사상가 칼이 발견한 것보다 더 비참함을 알 수 있다. 단순히 계급투쟁이 아니라 주변의 생명을 갉아먹고 그 생명을 흡혈하여 살아가는 흡혈귀가 인간의 본질이다. 독사의 새끼들의 끝없는 살육전이 역사의 본질이다. 좀비들이 세상을 점령한 것 같은 지옥도가 세상이다. 무엇이 공평인지 불공평인지 인간들은 분간하지도 못한다. 인간들은 그런 악함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 앞에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타인이 죽음 같은 고통을 당해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부동산이 오르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집의 가격이 올라 기뻐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자신이 돈을 번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 거대한 세력이 돈을 버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1억에 산 집이 3억으로 오르면 가격이 올랐다고 기뻐한다. 그런데 사실 자신도 돈을 번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집을 팔고 같은 집을 사려면 또 3억을 줘야 한다. 같은 집을 1억에 살 수 있는 것과 3억에 살 수 있는 것 중 무엇이 이득일까? 그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럼 팔아서 쓰면서 살면 될 것 아니냐?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집을 팔면 나는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 월세나 전세를 산다면 또 오른 가격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결국 나는 번 돈으로 그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 결국 나는 이익을 본 것이 없다. 단지 집에 붙어있는 숫자가 1에서 3으로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 나 뿐 아니라 내 아들이 같은 집을 사려면 3억을 주고 사야 한다. 전에는 1억에 살 수 있었는데 3억을 줘야 살 수 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중심가는 수십억을 주어야 한다. 변두리도 5억 이상을 줘야 한다. 결국 내 아들은 집을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평생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변변찮은 직장을 다니는 내 아들은 집을 살 수 없다. 대기업을 다닌다면 가능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대출이 대부분이라 벌어서 대출원금과 그 이자를 갚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집값은 멈추지 않고 오른다. 과연 집값이 오르면 누가 돈을 버는 것일까? 건설사의 정점에 있는 회장들이다. 똑 같은 건설단가에 1억에 팔아도 엄청난 이익이었는데 3억에 팔면 이전에 비해 미분양이 많아도 무조건 이익이다. 집값이 3배가 올랐으니 집들의 3분의 1만 팔아도 이전에 1억에 팔 때와 똑 같은 이익이 남는다. 사실 미분양이 조금 있어도 3분의 2가 미분양이 될 수는 없다. 3분의 2가 미분양이 되어도 무조건 이익이다. 이전에 똑같이 생산했을 때와 같은 이익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슬쩍 1~2 천 만원을 내려서 분양하면 남은 미분양 물건도 무조건 분양된다. 1억에 팔던 걸 2억 8천에 파니 얼마나 이익인가 그런데도 눈속임으로 3억에서 2천 만원이나 싸게 파는 척하면서 눈속임을 한다. 이것은 가격담합과도 같다. 그런데 그 것이 시장의 움직임인 것처럼 보이니 정부가 규제하기도 힘든 문제다. 지각 없는 일반인들이 부동산이 오르면 자기 집에 붙은 숫자가 바뀌니 무조건 이익이다 싶어서 빚을 내서라도 투자랍시고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누구에 의해 무슨 목적을 위해 조종당하는지도 모르고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데 일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들어낸 것이 헬조선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태를 누가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순진한 생각을 버리기 바란다. 여러분은 조선시대의 노비보다 당신의 삶이 낫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인권에 있어서는 개선이 된 듯 보인다. 그러나 노동의 질과 강도에 비해 여러분이 얼마나 처참하게 착취를 당하는지 알지 못한다. 집값만 봐도 여러분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러분은 평생을 벌어도 갚기 어려운 착취를 당했는데도 알지도 못한다. 평생을 이름만 자유인인 노예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의 입장에서도 개선이 된 것이 맞는가? 개선된 것처럼 하면서 더 철저히 짓밟고 착취하지는 않는가? 조선시대 노예는 재산을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그리고 주인이 원하면 성 상납을 해야 했다. 주인이 원하면 딸을 바치기도 해야 했다. 남자도 성적 노리개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 지금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성 상납을 하게 한다. 그러한 일들의 일부가 미투 운동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조선시대 노비는 주인에게 미움을 사면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한다. 지금 우리는 더 교묘한 방법으로 그런 일들을 당한다. 이것이 더 무섭다. 예전에는 그렇게 당하는 줄 스스로도 알고 타인도 알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당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타인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당해보면 그 고통을 뼈져리게 느끼기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삶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병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더 악해져서 죄악의 나락 같은 늪으로 빠져든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지, 우리나라는 세계 자살률 1위다. 이혼률도 세계 1위다. 왜 청년들이 3포를 하는지, 인생을 시작도 하기 전에 절망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왜 그들이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하는지 알지 못한다.


 눈앞에 작은 사탕으로 인해 여러분은 누구나 나는 무조건 이익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인류의 역사는 착취의 역사다. 착취하는 자들도 더 상위의 포식자에게 착취를 당한다. 그리고 최상위에 있는 포식자들도 다른 하위의 먹이들과 마찬가지로 착취를 당하는 인생을 산다. 모든 인생이 사탄과 그 졸개들에게 도둑질 당하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속아서 죄 짓다가 죄의 결과로 심판을 당하는 것이다. 지옥의 불길에서 눈을 떴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도둑질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도둑질하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역사다. 여러분이 스스로 이곳에서 벗어나는 길은 세상을 떠나 산중에서 자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그러나 여러분에게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사회로부터의 철저한 고립이다. 돌보아야 할 가족을 버려야 한다.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해야 한다. 정상적인 인간취급을 받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한 여러분은 이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다. 부동산 하나만 봐도 우리의 삶은 사탄의 본능을 따른 짐승의 삶이다. 모든 분야에 이러한 것이 물들어 모두 검은 늪이다. 그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우리의 생이다. 그것을 벗어날 길은 없다. 점점 그 늪에 깊이 빠져들 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다름아닌 나 자신 하나 하나이기 때문이다. 본성이 그렇다. 그래서 그렇게 산다. 하나하나들이 모여 스스로 지옥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독사의 새끼들인 것이다.


 이런 애통할 인간의 처지를 알리고 다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인간의 권세를 사용하도록 돌이켜 회개하게 해야겠다. 이를 위해 이러한 원수의 음모를 알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나 인자에 관해 비성경적인 오류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진리를 바로 세워야 그 진리를 뼈대로 해서 온전한 건물이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어둠은 항상 진리를 가려 혼돈케 함으로 진리의 빛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해 만물이 자유케 되는 부흥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종말적 회복을 막으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고 있다.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 속 용어에 집중하는 목적도 혼돈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명확히 드러내려는데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 인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께 이루어드리는 것을 보기 원하는 것이다.


B.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개역)


여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에서 인정되셨다는 단어의 헬라어 스트롱 코드사전 정의

[5]를 보면 그 뜻은 ‘표시하다’이다. 즉 ‘경계나 한계를 표시하다’는 경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것에서

‘결정하다’는 뜻이 파생되었다. 그리고 ‘결정한 것’의 의미에서 ‘법령’이라는 뜻이 파생되고 또 ‘법령’의 의미에서 ‘법령의 포고’라는 뜻이 파생된 것이다. 즉 원래의 뜻은 경계를 인정하여 표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임을 표시하는 것 인정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다’는 번역이 더 정확한 번역인 것이다. 개역성경과 공동번역 등 이전의 번역들이 개역개정보다 더 정확한 것이다. 인정하여 법령으로 정하고 그것을 게시하여 포고하는 것이다. 즉 선포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정됨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정함을 빼고 ‘선포되셨으니’라는 번역은 원래의 뜻을 좀 벗어난 번역이다.


 개역개정과 바른성경 등의 번역에서 이와 같은 번역을 한 이유를 유추해보면 번역한 학자들이 개역성경과 공동번역 원어성경 등을 보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려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예수님은 원래 성자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구절이 나오는가? 원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는 말인가? 이러한 내용은 앞에 설명한 대로 이단 교주들이 활용해서 이단적인 교리를 만들어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합법화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변증적 번역으로 ‘선포되셨으니’라고 번역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도 이 구절을 보고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는가?[6]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을 이해하면서 이에 대한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답은 ‘육신으로는’에 있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셨다. 사람이 되신 것이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것이다. 다윗의 혈통을 따라 메시야로 오신 것이다. 대속의 삶을 위해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 우리를 대신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함을 받은 것이다. 그 모든 대속의 삶을 성령님의 기름부음으로 하셨다. 그래서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자신이 하늘에 앉았다고 표현을 했다. 자신도 자신을 대속하여 사신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여 하늘에 예수님과 함께 앉은 것이다.[7]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고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신성 즉 신격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고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신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원래 하나님이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다시 받을 이유가 없다.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시다. 그런데 무슨 뛰어난 이름을 또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에베소서 1장에서 설명되어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만물 위에서 예수님의 몸이 되어 만물을 통치하는 자들로 즉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또 하나님께 복종하신다.[8]


 이것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으로 인생의 대표 즉 머리가 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아담으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복종을 하신다. 교회는 예수님께 복종을 하고 만물은 교회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신 두 번째 아담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합법적으로 아담의 후손들을 대신하여 모든 구속을 이루시고 아담의 후손들의 대표가 되어 완전한 보증이 되시기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에 들어선다는 망발과는 관계도 없다. 오직 그 자리는 예수님만의 자리다. 하나님 보좌 우편은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가 아니다. 누군가의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그 중심에 앉으신 분보다 못하지만 그 분 옆에 앉는 영광을 얻은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보증을 받고 예수님의 종들로 또 감히 형제라는 보증을 받고 감격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의 명을 수행하여 만유를 다스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의 후손들의 완전한 대표 즉 왕이 되시어 완전한 구속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서 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복종하신다. 인간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복종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복종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형 신들을 섬기던 헬라적 사상이 신학 안에 들어와서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는 하나님과 동등된 관계이신 예수님께서 동등한 관계를 버리고 사람으로 오시어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이다.[9]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에 신으로서 사신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 인간으로 사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 양성을 가지셨고 성육신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성육신 이후의 삶은 전적으로 인간 즉 아담의 후손 두 번째 아담으로 사신 삶이었다. 신성을 잃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그대로 있었지만 사역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삶이셨기에 전적으로 인간으로 사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았다고 표현했다.[10]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는데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되어 그 모든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만물 위에서 통치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두 번째 아담 즉 만물의 통치자인 인자 즉 아담의 후손이신 왕이 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24장로는 그 앞에서 통치하고 성도들은 그 보좌 앞에 서있는 것이다. 바로 하늘에 서있는 것이다. 모든 만물 위의 하늘에서 통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의 수건을 벗고 예수님을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보고 현재에는 예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한다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현재의 보는 것이 청동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시 뵐 때에는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얻을 영광에 대해 말하면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그분을 뵈옵는 영광을 얻는다고 했다. 그러면 ‘자신은 예수님이 자신을 아시는 것처럼 그날에는 자신도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11]


또 요한은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예수님)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했다.[12]


주님의 심판 날 재림의 날에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시어 하나님께로 들리워지신 그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보좌 앞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아들의 신분으로 서는 것이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피조물로서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 값없이 초청받은 것이다. 이것은 태초에 가졌던 하나님의 아들로의 영광의 자리로 다시 회복시키심이다. 그래서 계시록의 마지막에는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에덴으로의 회복이며 첫 에덴은 지나가며 새 에덴으로의 새롭게 됨인 것이다. 첫 아담의 것은 모두 실패하였기에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새 몸을 입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8편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십니까? 5주께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6주께서 그로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양 떼와 소 떼와 들짐승과 8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물길 따라 다니는 것들입니다. 9여호와 우리 주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4-9, 바른)


다윗은 이 인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사자와 곰과 늑대를 이겼고 골리앗과 싸워 골리앗의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적진을 누비고 적의 성벽을 넘었다. 그리고 주변의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렸다. 예수님께 하나님께서 한량없는 기름부음을 주신 것처럼 다윗에게도 기름 부어주셨다. 다윗은 그 기름부음으로 아담의 후손으로 인자로 산 것이다.


C.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33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셔서(G450)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 이 약속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는 시편 둘째 편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 '너는  아들이다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하였다.

34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셔서(G450[13]) 다시 썩음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윗에게 한 신실하고 거룩한 약속들을 너희에게 주겠다.' 라고 하셨고,  (행 13:33-34, 바른)

 

부활: 영원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심(사심)

 

위의 행 13:33절의 ‘일으키셔서’와 다음절인 행13:34의 ‘일으키셔서’는 동일한 단어이다. 뜻은 부활케 하심을 의미한다. ‘34절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셔서’에서 일으키심은 부활케 하심이라는 뜻이 선명하다. 또한 이 단어는 부활을 뜻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의 동사형이기도 하다. 즉 이 단어에서 부활이라는 명사가 파생되어진 것이다. 


행 13:33의 ‘일으키셔서’를 예수님의 부활이 아닌 탄생이나 또는 구주님으로 세우심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수사학적 문맥에서 그 흐름을 벗어난 해석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한 이 전도 설교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심에 대해 23절에서 이미 언급을 했다. 


23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에게 구주 예수님을 일으키셨다. (행 13:23, 바른)

 

 

23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 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G71 ἤγαγεν)  곧 예수라 ( 13:23, 개정_strong)

 

행 13:23의 ‘세우셨으니”(개정)는 구주로 세우셨다는 뜻이다. 즉 어떠한 인물을 직분을 주어 세운다고 말할 때 쓰이는 표현인 것이다.

행 13:23의 ‘세우셨으니(G71 ἤγαγεν 원형 ἄγω)’는 뒤의 33절의 ‘일으키셔서(G450 ἀναστήσας 원형  ἀνίστημι)’와 단어가 다르다. 이것은 단어의 사용에 있어 수사학적으로 구분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헬라와 히브리의 수사학에 탁월했던 학자였음을 감안하면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행 13:33절의 ‘33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셔서(G450)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 이 약속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33절의 후반부에 나오는 시편 2편의 인용

[이는 시편 둘째 편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 '너는  아들이다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하였다.]는 

그 해석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이것은 부활에 관한 구절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석의에 의하지 않고 통념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으로 읽어왔던 이 구절의 뜻이 석의적으로 보면 다른 뜻인 예수님의 부활로 해석되어진다는 것이다.


33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셔서(G450)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 이 약속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는[as also(YLT[14]) ως και(UBS5)] 시편 둘째 편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 '너는  아들이다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하였다.( 13:33, 바른)

 

 행 13:33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잇는 접속사 ‘이는 ~와 같으니’는 영어로 as also(YLT), 헬라어로는 호스 카이 ως και(UBS5)이다. 이것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그 뜻이 동일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반부’33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셔서(G450)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 이 약속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이으로 후반부’ 이는[as also(YLT) ως και(UBS5)]

 시편 둘째 편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 '너는  아들이다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하였다.’( 13:33, 바른)도 그 뜻이 동일하게 된다. 시편 2:7절의 나심은 성육신이라기 보다는 부활을 통하여 새 몸을 입고 다시 사심 새롭게 나심을 뜻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롬 1:4절에서 이 단어 ‘행 13:33절의 일으키셔서’의 명사형인 부활을 뜻하는 단어가 쓰였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ἀναστάσεως 원형 G386 ἀνάστασις 아나스타시스)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4, 개역)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4, 개정)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여(G386)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인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1:4, 현대인)

 

이미 이 책 속의 앞부분[15]에 언급되어진 구절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이 되신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못하셨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설명을 하자면 답을 찾을 수 없다. 2위 하나님의 영원 독생설을 주장한다면 이는 무언가 논리상 맞지 않게 된다. 이미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면 어떻게 인정을 받는 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부분은 사람으로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그리고 잉태케 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인간 예수님과의 관계인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성육신하셨다. 그리고 물과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나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하심으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사셨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죄의 몸은 죽고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나셨다. 그것이 부활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인정되셨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으로 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셨으나 철저한 사람으로 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나셨다. 그리고 그 분량에 있어 장성하시어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그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측량하여 합당함이 인정되셨다. 우리 인생을 대신하신 구속의 삶으로 우리의 구원을 통해 설명하면 처음 세례를 받으심은 그 구원의 시작이요 부활하심은 마지막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완전한 새 몸을 입고 새 예루살렘에서 하늘 성전으로 주님의 몸이 되어지는 것 즉 구원의 완성이다. 이는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지는 완성이 부활인 것이다.


 행 13:33절의 일으키심은 전후 문맥상 부활이다. 행 13:30~37절 전체가 부활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중반부에 33절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후 반절에 시 2:7을 인용한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도 부활에 관한 것이다. 부활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남의 완성이다. 부활은 새로 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 즉 새로 나시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즉 우리를 대신하시어 사람으로 오시고 그 사람으로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신 것이다. 그 다시 태어남의 시작은 물과 성령님의 세례로 시작되었고 그 완성은 부활인 것이다. 썩어질 몸을 벋고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다시 입으신 것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 화하신 것이다. 우리도 부활할 때가 되면 부활하신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할 것이다. 이것은 썩어질 것을 벗고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입는 것이다.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영원히 예수님의 몸인 교회로 연합되어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창세기의 타락으로부터 계시록의 마지막 구속의 완성의 시점 그 끝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부활에 들지 못한 불신자들은 사망으로 다시 일어나 영원한 심판을 받고 불 못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부활은 다시 태어남이다. 그래서 시 2:7을 인용한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도 회심과 세례 중생의 뜻을 넘어 부활에 관한 것이다.

시편 2:7은 누구에게 주어진 구절인가:?

시 2:7절은 다윗을 통하여 이미 정복한 땅들을 다스렸던 솔로몬에게 주어진 시편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해진 왕은 솔로몬이 유일하다. 그런데 시편 2:7은 시2:6에서 이미 시온에서 왕으로 세워진 이후에 솔로몬이 하나님께 직접 받은 것이다. 아이로 태어난 솔로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또는 세례[16]

를 받은 솔로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왕으로 세워져 열방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워졌을 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지혜는 만방에 알려졌다.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부유한 왕이 이미 되어있었다. 이 모습은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에서 다스리는 모습의 예표인 것이다.


6"내가 나의 왕을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실 것이다.

7내가 여호와의 칙령을 선포한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 2:6-7, 바른)


솔로몬은 시온성에서 왕의 보좌에 앉아 다스렸다. 이 시편의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예루살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다스리심을 예표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일이다.[17]그러므로 시 2:7절의 나심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다시 살아나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열방을 유업으로 받는 것은 부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다.


1[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대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 110:1, 바른)


원수들이나 열방을 유업으로 얻는 것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미 권세는 얻으셨으나 그 실질적인 회복은 점진적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통해 확장되어지고 마지막 날 그 모든 교회가 부활하여 새예루살렘성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거하시고 그 하나님의 통치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내려졌듯이 온 만유 위에 부어진다. 이렇게 새 하늘 새 땅인 만물이 통일되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시어 실패한 아담의 몸으로는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어 새 몸으로 부활하셨다. 우리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새롭게 태어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 다스리시는 것이다. 


 다시 아담의 권세를 최종적이고 다시 무를 수 없는 완전한 판결로 회복하신 것이다. 그리고 원래 하나님이시기에 그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다스리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인류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최종 승리를 확정하시고 그 승리의 권위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위치함으로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 아래에서는 첫 번째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보좌 우편인 것이다. 첫 아담의 보좌는 인간 스스로 교만해지고 범죄하여 잃어버렸지만 이제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권세로 그 보좌를 확증하시니 더 이상 두 번째 아담의 보좌는 흔들림이 없다. 첫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에 빠져 실패했지만 완전한 보증이 되신 두 번째 아담 안에서는 거듭난 자들은 더 이상 완전한 제사장안에서 흔들림이 없다. 그 완성이 되는 재림과 심판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과 하늘의 성전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안식의 처소가 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시어 사람이신 우리를 대신하시어 이루시는 것이다.


33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셔서(G450)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 이 약속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는 시편 둘째 편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하였다. ( 13:33, 바른)


5하나님께서 언제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느냐? ( 1:5, 바른)

 

5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시려고 스스로 영광스럽게 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그분께 말씀하시는 분께서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하셨으며 ( 5:5, 바른)

 

14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니, 그가 만일 죄를 지으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훈계할 것이나, (삼하 7:14, 바른)

 

10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것이니, 그는 나의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내가 그의 나라의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영원히 굳게 세워 주겠다.' 라고 하셨다. (대상 22:10, 바른)

 

 위의 구절들은 모두 구약에서 예수님의 예표로 솔로몬을 통해 나타난다. 솔로몬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았다고 구약은 기록하고 있다. 이것도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 아담의 아들, 인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음을 나타내어주는 성경적 메타내러티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2위 하나님이신 자신의 신성으로 이루신 것이 아니다. 오직 아담의 후손 사람으로서 오직 성령님의 한량 없이 부어지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만을 따라 복종하여 이루신 것이다. 


6"내가 나의 왕을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실 것이다.

내가 여호와의 칙령을 선포한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너는 내게 구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네 유업으로 줄 것이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네가 쇠 막대기로 그들을 깨뜨리며 질그릇처럼 부술 것이다." 10 이제 왕들아, 지혜롭게 행하여라. 교훈을 받아라, 땅의 재판관들아.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여라. 12 그 아들에게 입맞춰라.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 진노하시므로 너희가 길에서 망할 것이니, 이는 그분의 분노가 순식간에 타오르기 때문이다.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이 있다. ( 2:6-12, 바른)


 

2)    인자가 죄를 용서하는 권세


6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 그런 후 예수께서 그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8무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태복음 9:6-8, 바른)


 6절에서 예수님은 인자(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인자의 뜻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면서 하나님으로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아담의 후손 즉 두 번째 아담으로서 권세를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9절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이런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였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에게 주신’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주신’이라고 하였다. 앞에 설명한 대로 예수님이 원래 말씀하신 말씀은 헬라어가 아닌 히브리어 벤아담이었다. 벤 아담 즉 인자는 아담의 후손이라고 해서 개인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아담의 후손 즉 인류를 뜻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당시 유대인들(갈릴리인들)의 대답이 이를 증거한다. 예수님은 ‘인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말을 ‘사람들’ 원어로 토이스 (안ᅊ그로포이스)τοις ανθρωποις로 알아 들었다. 예수님은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자의 뜻을 해석할 때 인류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 개인이 아니라 ‘인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성경자체가 인자의 뜻을 자증하고 있다. 인자는 어떤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자신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그 뜻을 해석하기 어려운 은밀한 밀어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듣고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누가 보아도 벤 아담은 아담의 후손 즉 사람 또는 사람의 대표명사 인류라고 해석되어졌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담의 후손 즉 두 번째 아담으로 소개하신 것이었다. 그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죄를 용서하여 준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속으로 참람하다 비난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담의 자손인 자신이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담의 자손인 인류가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음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 놀라운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이 이 본문에서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셨다. 서기관들이 이 단어를 듣고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분명히 알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알아들은 것을 성경해석에 탁월했던 서기관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서기관들도 정확하게 벤 아담이 아담의 후손 즉 사람 또는 그 집합명사인 인류라는 것을 알아듣고 사람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시면서 사람으로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의 의도는 그 신성모독이 옳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 즉 사람으로서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이다. 이 해석에 대해 서기관들과 같이 신성모독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데 이 말씀을 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께 신성모독이라고 말할 것인가? 이 해석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면 다음 구절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14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여라. 15믿음의 간구는 병든 자를 구할 것이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다. 비록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용서해 주실 것이다. 16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간구하여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17엘리야는 우리와 본성이 같은 사람이었으나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았으며, 18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 (야고보서 5:14-18, 바른)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간구하여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감동을 전하는 것이다. 또 죄를 고백한 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심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용서를 선포하는 행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상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말씀하시거나 행하시지 않았다.


3)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

 

27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2:27-28, 바른)

 

문맥상으로 보면 여기서 막 2:28절의 인자는 사람들(인류)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막 2:27 바른)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막 2:28 바른)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여기서 핵심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위의 바리새인들의 안식일과 관련한 대적은 모두 율법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또한 동시대의 유대인들은                                                 ‘막 2:28 바른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을 들으면 마9:8절과 같이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알아 들을 것이다.


(막2:28 가상의 1세기 유대인역) 이러므로 사람들(인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이와 관련한 번역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마 9:8 관련내용을 사복음서를 비교해보겠다.


(마 9:6 [바른])

그러나 인자(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 그런 후 예수께서 그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막 2:10 [바른])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 예수께서 그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눅 5:24 [바른])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 하시고 그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말하니,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 9:8 바른)

무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들에게(τοις ανθρωποις)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 9:8 TR)

ἰδόντες δὲ οἱ ὄχλοι ἐθαύμασαν, καὶ ἐδόξασαν τὸν θεὸν τὸν δόντα ἐξουσίαν τοιαύτην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마 9:1절부터 나오는 이 복음서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지칭하면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너희가 알도록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걸림이 되어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하셨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마 9:8에서는 무리들은 사람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이 나온다. 마 9:6의 ‘인자(사람의 아들)’ 할 때 사람의 아들은 단수 그리고 마 9:8은 ‘사람들’이라고 복수를 쓰고 있다. 단수가 왜 뒤에 가서는 복수의 다른 단어로 해석 되었을까? 예수님은 인자라는 단수를 쓰셨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왜 복수인 사람들이라고 이해했을까? 그 당시 사람들의 어법에서 사람의 아들(히 아담의 후손)이 라고 말하면 단지 예수님만을 가리킨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인류를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이해에 따르면 인자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들었을 때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뿐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의 아들 즉 인류의 보편적인 호칭으로 이해되어진 것이다. 즉 아담의 자손 즉 인류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지막 사람들의 반응은 “사람(예수님)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수(예수님)가 아닌 복수(사람들, 인류)에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에 대해 사람들 인류라고 이해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인류 즉 아담의 후손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인자라는 말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추측이 아니라 성경에서 사용 되어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석의인 것이다. 석의의 원리에 따라 밝혀보면 예수님이 사용하신 인자(사람의 아들)는  아담의 후손 인류 즉 보편적인 사람을 뜻하는 보편명사다. 예수님 자신만을 지칭하여 사용된 특정인의 호칭 고유 명사가 아닌 것이다. 물론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사용하신 적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 의도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고유 명사로 인자를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 오셨음을 강조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도 되지만 인류전체를 말한다.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과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인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사람에게 맡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능력으로 완전한 창조를 하시어 사람이 쉴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태초의 인간의 통치는 완전한 쉼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다 해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쉼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안식의 의도인 것이다.


 6일 동안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 7일에는 쉴 수 있게 하신 것이 안식일이다. 이 안식일은 그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받는 자기 의를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 율법과 자의적인 조항들로 인간을 옥죄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아래서 쉼 즉 안식을 얻음을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 쉼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진정한 쉼을 주려고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 부족하시기에 우리의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기 충족적이신 완전한 분이시다. 그러나 자신의 필요가 아닌 인간의 필요에 의해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간들에게 쉼이 필요하기에 자신의 목숨을 대신 주시어 쉼을 주셨다. 그것이 진정한 안식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편지들에 은혜와 평강을 인사로 반복하고 있다. 은혜에 의해 주어진 평강인 것이다. 이렇게 안식(일)의 주인도 인간이 되어진 것이다. 


새 하늘 새 땅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하여 주시고 예수님을 통해 회복하여 재창조하시는 새 하늘 새 땅은 온전히 우리를 위하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는 필요치 않다. 하나님은 피조들이나 사는 이 세상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피조물인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공기가, 물이 필요치 않다. 오직 피조물인 우리는 숨쉬기 위해 공기가 필요하다.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과 땅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신 것이다. 타락한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멸해버리시면 되지만 불쌍히 여기시여 새롭게 해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새 하늘 새 땅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아담의 후손들 만유의 상속자들을 위한 것이다. 실로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존재로 대접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안식을 주시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아들 아담의 권세

 

1[지휘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다윗의 시] 여호와 우리 주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님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습니다. 2주께서는 주님의 대적자들 때문에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을 통하여 권능을 세우셨으니, 이는 원수와 복수하는 자들을 잠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3주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님의 하늘과 주께서 자리를 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십니까? 5주께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6주께서 그로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양 떼와 소 떼와 들짐승과 8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물길 따라 다니는 것들입니다. 9여호와 우리 주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1-9, 바른)


18그러자 예수께서 다가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18-20, 바른)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이는 아담이 태초에 가졌던 권세였다. 이는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 보이지 않는 세상을 포함하고 있음을 고전 15장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에 구약 안에 이미 우리는 인간이 눈에 보이는 새나 땅에 기는 것들과 물고기만 다스리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시편 8:6절에서 ‘6주께서 그로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시편 8:6, 바른)’라고 말씀하셨다. 피조세계 즉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스리는 것들이 하늘과 땅과 바다에 속한 것들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해서만 이라면 앞의 6절에서 만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권세를 상실하는 과정에서 사탄과의 서열의 우위가 인간에게 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천사계급인 사탄이 인간의 아래의 권세에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즉 상속자들을 섬기라는 종들이라는 것이 히브리서를 통해 이미 밝혀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래의 본문을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도 아담의 아들(벤 아담, 인자)과 다른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누가복음과 창세기의 계보를 보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3위 하나님 안의 두 위격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아니다. 단지 창조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으로 보내지신 사람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다. 즉 신격과 신격의 관계가 아닌 1위 하나님 신성과 2위 하나님의 인성의 관계인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과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나 1위 성부 하나님과 2위 예수님의 신성과 신성 사이에는 이 관계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 어디를 봐도 그 근거가 없다. 이것을 억지로 짜맞추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 성자의 영원발생설이다.


27사람들이 놀라며 말하기를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는가?" 라고 하였다. 28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에 악령 들린 두 사람이 무덤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들은 대단히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다. 29그때에 그들이 외치며 말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오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마태복음 8:27-29, 바른)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 로마 종교에서처럼 신의 아들 즉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 헤라클레스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종교의 신들은 인간형 신들이다. 그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의 사상은 인간이 신이 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인간의 하나님 되고자 하는 타락한 욕망과 사탄의 북극성[18]을 향한 욕망이 뱀들의 야합처럼 뒤엉켜진 괴물적 종교에서 나온 발상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삼위일체 안의 두 위격이신 하나님들 사이에는 이런 관계가 없다. 성자의 발생과 성령의 발출은 사실 신플라톤주의의 유출론을 성경적 근거 없이 가만히 신학에 끌어들인 심각한 오류다. 이런 거짓 이데올로기(ideology)를 증명할 어떤 성경구절도 없다. 구약에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는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만 나타내어지신다. 그리고 아들로 표현되는 부분은 시편에서 솔로몬을 지칭한 시편 2편으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시는 약속을[19] 가지고 시편을 지은 것이다.

  솔로몬은 파괴되어질 유한한 지상의 성전을 짓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영원하고 완전한 성전을 지으신다.

솔로몬은 완전하지 않은 양의 피로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 제사장을 통해 반복해서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다. 


솔로몬의 인간 제사장은 죽고 새로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솔로몬의 관계는 예수님의 예표로서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 즉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솔로몬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의 관계다. 이 예표를 가지고 오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이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즉 성육신 하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성부와 성자라는 관계를 설정하고 이것을 3위의 하나님 사이의 신격이신 두 하나님 사이의 관계로 억지 설정을 하려다 보니 성경에도 있지 않은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발생설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모두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생긴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20]


우리는 항상 성경이 가는데 까지만 나아가고 성경이 멈추는 그곳에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성경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이 기준을 벗어난다면 다시 우리를 성경의 다림줄 앞으로 이끌어 우리를 새로 개혁(Reform)해야 한다. 

Sola Scriptura 

Solus Christus 

Sola Gratia 

Sola Fide 

Soli Deo Gloria

 사람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계보와 창세기의 계보를 보면 첫 아담의 아버지가 하나님으로 기록되어졌다. 그리고 새 창조의 과정을 거쳤으나 사람인 여자 마리아의 몸을 입고 오신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의 아버지도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는 3위 하나님 안의 두 위격이신 하나님 중 성령님을 제외한 두 위격 사이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몸에 잉태케 하신 하나님과 사람으로 성육신 하시어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진 인간 예수님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구약에 하나님과 인간 아들인 솔로몬의 관계와 같아지는 것이다.


천사들 사이에도 이러한 ‘자식을 낳는다’던지 ‘결혼한다’던지 하는 인간적인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에 관해 사두개인들에게 변증하실 때 말씀하신 부분이다. 하물며 천사들 사이에도 그러한데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이런 불경한 관계를 대입시킨다는 말인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오직 자식을 낳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관계다. 그래서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예수님 사이의 관계로 설정되어지는 것이다. 구약에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로 설정되어졌다. 즉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예표의 문맥이 이렇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4)  예수님의 사역이 가능한 이유는 성령님을 한량 없이 부어주심

만약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신성으로 사역하셨다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스스로 하나님이심으로 그분 스스로의 신성으로 기적과 역사들을 행하실 수가 있다. 그것은 3위 하나님 모두 가지신 공유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 자체의 신성으로 이 땅에서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사역(특히 말씀)은 한없이 성령님을 부음 받으심으로 가능했다고 말씀하신다.

34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니, 이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 3:34, 바른)

34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 3:34, 공동개정)

34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 이니라 

( 3:34, 개정)

34for he whom God sent, the sayings of God he speaketh; for not by measure doth God give the Spirit; ( 3:34, YLT)

34ον γαρ απεστειλεν ο θεος τα ρηματα του θεου λαλει ου γαρ εκ μετρου διδωσιν ο θεος το πνευμα ( 3:34, TR)

 

심지어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철저하게 주종관계에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또 이러한 주종간의 복종을 죽기까지 하셨다고 했다. 십자가에 앞선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복종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드리셨다. 그 복종 앞에서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셨다. 그리고 영문 밖에서 속죄의 양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불사른바 되셨다.[21] 불태워짐과 같은 고난을 당하시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그 철저한 복종은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인간이신 예수님 사이의 관계에서 있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복종하시어 행하신 모든 사역도 인간으로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역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님을 받아 행한 일이셨다.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 아담의 후손의 모습으로 복종하셨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아담에게 접붙여진 모든 두 번째 아담의 후손들도 예수님과 같이 인자 즉 아담의 후손으로 살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이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신성의 능력이 아닌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사역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스스로 무엇인가 회복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오직 인간의 회복을 위해 오직 인간들을 위해 인간으로서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신 것이다.


          






          

[1] 웨인 그루뎀과 브루스 웨어는 이 교리를 부정하였다.
Letham, Robert,. 〈introduction〉. 《The Holy Trinity : in scripture, history, theology, and worship》 Revis a Expa []판. Phillipsburg, New Jersey. xxxii쪽. ISBN 978-1-62995-377-9.

[2] 여기서 비유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성경의 모든 비유와 인용들은 문맥과 역사적 메타네러티브와 일치하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을 취한다. 결코 자신이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들은 자가 자신의 개똥철학으로 해석해내는 비논리적인 해학(諧謔)이 아니다. 그런데 알레고릭한 해석은 개똥철학과 같은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성경해석을 오염시키고 성도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데 앞장서왔다. 한국에서 소위 영해라고 하는 해석방식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해석해야 하지만 그것이 성경 본문 자체안의 문맥과 성경 자체의 자증을 통해 다른 본문들의 해석과 비교했을 때에도 그 해석이 명확하게 일치해야 한다. 이것을 벗어난 엉뚱한 해석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을 오도할 수 있다. 또한 그 해석의 결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원수 사탄의 계시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저자는 한국교회 안에서 이러한 몰해석학적인(沒解釋學的) 수많은 오도된 성경해석을 접했고 그 안타가운 마음에 속이 타 들어가 죽어가는 고통을 느껴왔다. 그들에게 말한다고 해도 결코 듣지 않고 자신들의 아집으로 공격할 뿐이었다. 그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의 변태적 자존심을 지키는 것에 열중할 뿐이었다.  자신의 배를 채움과 이기적 자존심의 고수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고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기도한 후 하나님께서 특별히 말하라고 하지 않으시면 결코 입을 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마음은 계속해서 그 현실을 보면서 타 들어가 썩어졌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은 결국 사람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그 열정은 하나님을 위한 질투로 마음에 불이 일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돌아와 회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목도하기를 원하게 된다. 아버지 열방, 아버지 조국, 아버지 영혼. 이렇게 절규하는 내 영혼의 울림이 내 인생 전체를 집어삼켰다.

[3]따라서 예수님은 아담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계보 도에서 아담의 아버지가 예수님이 되면 뭔가 문제가 생긴다. 예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보면 인간이신 예수님 즉 두 번째 아담이신 사람이신 예수님과 신성의 예수님 즉 3위 하나님이신 신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잘 구분 지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두 번째 아담의 아버지가 3위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두 번째 아담 즉 인간이신 예수님에 한정된 문제인 것이다. 또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육적으로 아버지가 아담이 아니다. 아담의 계보를 벗어난 새로운 아담 두 번째 아담이시다. 예수님은 예언된 메시야로 오셨다. 그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나셨다고 했다. 사실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이었던 요셉 외에 다른 육신의 아버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구약의 예언도 충족하신다. 즉 육신의 계보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것이 된다. 요셉이 유전적이고 실질적인 아버지는 아니지만 그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기 때문에 요셉의 아들이 되어 결국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되시는 것이다.

[4] 특히 헬라적 신론의 특징

[5]
1. to define 
a. to mark out the boundaries or limits (of any place or thing) 
b. to determine, appoint 
1. that which has been determined, acc. to appointment, decree 
2. to ordain, determine, appoint

[6] 저자는 성경연구를 통해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찾고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신성으로서가 아닌 인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임을 알았다. 이에 관해서는 이 책과 함께 쓰고 있고 이 책 이후에 발표되어질 『하나님의 아들』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7] 6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어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다. (에베소서 2:6, 바른)

[8]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시대뿐 아니라 오는 시대에 일컫는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나게 하셨으며,22또한 만물을 그분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23교회는 그분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다. (에베소서 1:21-23, 바른)

[9] 6그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 7도리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빌립보서 2:6-7, 바른)

[10] 6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어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다. (에베소서 2:6, 바른)

[11]
12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이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3:12, 바른)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이는 영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3:18, 바른)

[12] 1보아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게 하셨느냐? 우리는 과연 그러하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될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3그분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깨끗하신 것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요한일서 3:1-3, 바른)

[13] 성경 각각의 단어를 코드화한 스트롱 코드. 

[14] 영문 번역성서: YOUNG’S LITTERAL VERSION-원어 성경과 같은 어순으로 번역되어졌고 성경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여 원문의 뜻을 파악하기 쉽게 한 것이 특징적인 번역본이다.

[15]  P34  2) 롬 1:4 개역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16] 세례는 물론 신약에 등장함으로 구약의 솔로몬이 세례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7] 이와 같이 우리도 생명의 부활 이후에 하늘로 들려져 하늘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그 하늘에서 예수님의 몸 성전이 되어 만물을 다스리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으로 머리 되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만물을 통치하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와 계시록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을 뜻하는 성경적 메타내러티브의 문맥에 기인한 것이다.

[18]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구약의 비유

[19] 14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니, 그가 만일 죄를 지으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훈계할 것이나, (사무엘하 7:14, 바른)

[20] 16그가 모든 편지에서 이것들에 관하여 말하였는데,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들처럼 이것들을 억지로 해석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있다. (베드로후서 3:16, 바른)

[21] 히 13:10-13바른

10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으니,
11그 짐승의 피는 죄를 위하여 대제사장이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고 그 몸은 진 밖에서 불태워지기 때문이다.
12그리하여 예수께서도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13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영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자. (히 13:10-13,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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