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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Oct 14. 2022

(2) 두 번째 아담의 권세

아담의 권세: 하늘과 땅의 바다의 모든 권세

(2) 두 번째 아담의 권세

1)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권세를 가진 존재는 첫 번째 아담이었다. 그는 하늘의 나는 새와 땅에 기는 것과 바다에 있는 것들을 다스렸다. 이 내용은 고린도전서 15장의 바울의 글에 등장한다. 육적인 내용을 가지고 부활 후의 영적 몸을 비유한 것이다.이 인간의 통치는 육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서의 통치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 설명하려면 지면이 모자란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인자에 관한 내용에 집중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지금은 창세기의 인간에게 주어진 권세가 육적 권세뿐 아니라 영적인 권세도 포함되어있음만을 말할 것이다. 


35그러나 어떤 이는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나게 되며, 어떠한 몸으로 옵니까?" 라고 물을 것이다.36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37네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이 아니라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나,38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것에게 몸을 주시되, 씨앗에게 각각 그 자체의 몸을 주신다.39육체라고 해서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짐승의 육체가 다르며새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다르다.40하늘에 속한 몸들이 있고 땅에 속한 몸들이 있으나하늘에 속한 것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것들의 영광이 다르다.41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들의 영광도 다르고, 별과 별의 영광이 서로 다르다.42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멸망할 것으로 심고 멸망하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며,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능력 있는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4육의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난다. 육의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45" 사람 아담은 생명체가 되었다." 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46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가 아니라 육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영적인 것이다.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에 속한 자이나,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다.48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다.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50형제들아, 내가 말하니, 곧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고전 15:35-50, 바른)


하늘과 땅과 바다를 다스리는 권세 즉 만물를 다스리는 권세는 아담에게 속한 권세였다. 


5주께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6주께서 그로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7곧 모든 양 떼와 소 떼와 들짐승과8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물길 따라 다니는 것들입니다. ( 8:5-8, 바른)


여기서 만물이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아담의 발아래 두신 것이다. 모든 것 안에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래야 만물인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로 그 권세를 잃었고 예수님은 그 권세를 다시 회복하시는 분이시다. 아담의 몸을 입은 자들은 모두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기 위해 사람으로 다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사람을 히브리어 표현해 위의 문장을 다시 쓰면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기 위하여 아담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모든 만물을 아담의 발아래 두신 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아담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도바울이 자신의 글들에서 두 번째 아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첫 아담과 구분 짓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또한 아담으로 오신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담으로 오셨기에 아담의 권세를 가지신 것이다. 이미 앞장에서 아담은 하늘과 땅과 바다의 권세를 가진 것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라고 표현하셨다. 바다가 빠져있다. 


2) 바다의 권세가 빠진 이유

A. 창조의 질서 안에서 바다가 가지는 영적인 비유 


창조 속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에 투사해 놓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다.[2]


a. 창세기 1장에서의 바다

바다

 바다는 궁창 아래의 물들이 모인 곳이다. 이 바다에 사는 생물들은 생명의 숨을 쉬지 않는다. 공기호흡을 하지 않는다. 


 물론 땅 속에서도 호흡을 할 수 없지만 땅 속에는 죽은 자가 들어간다. 살아서 숨을 쉬지 않는 곳은 물 속이 유일하다.


b. 창세기 2장

생명의 호흡

 호흡 루아흐는 히브리어로 숨, 바람, 공기의 뜻도 있지만 영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도 거룩한 영으로 구약에서 표현되는데 영이라는 단어에 이 루아흐를 쓴다. 인간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존재다. 영적으로 들숨과 날숨을 쉬면서 영(루아흐-공기)으로 호흡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 호흡이 있어야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 생명의 호흡이 인간에게만 있다고 그래서 인간만이 영이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영 혼 육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하는 말들이다.[3] 영 혼 육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 대해 기회가 되면 책을 통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동일한 단어가 땅에 기는 것들과 새들에게도 적용된 본문이 있다. 그들에게도 생명의 호흡이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6장이다. 이것은 육체를 통해 영적인 세계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인 것이다.


c. 창세기 6장

생명의 호흡

 창세기 6장 이후의 노아 시대에 인류에게 닥친 하나님의 심판에는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부분이 많다. 그 중 가장 이상한 것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게 심판이 임하는데 물고기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우리는 대부분 이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4] 온 세상에 심판이 왔는데 그 심판의 대상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심판의 대상이 모든 생명의 호흡이 있는 존재다. 물속에 사는 무호흡의 생명체들은 이 심판에서 제외된 것이다.

물과 호흡 그리고 죽음

 물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지만 그 사용에 따라서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을 빼앗기도 한다. 인간은 공기 중에 있어야 생명의 호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공기가 없는 곳에 가면 그 생명의 호흡을 할 수 없어져 죽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물속에 들어가면 더 이 상 호흡할 수 없다. 그래서 호흡이 있는 생명들은 물속으로 들어가면 죽는다. 땅에 있어 호흡하는 모든 생물은 노아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호흡하는 모든 존재들이 물 속에 빠지면 호흡이 불가능하게 된다. 물속에 빠지는 것은 죽음을 불러온다. 이것이 심판으로 일어난 것이다.


d. 홍해와 요단의 갈라짐과 물

 출에굽의 여정가운데 홍해를 건너는 것은 침례의 장면과 같은 장면이다. 죽음의 바다에서 세상의 왕과 세상 사람들은 죽임을 당한다. 바로와 그 군대가 죽음의 길을 갔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죽음의 길을 살아서 건넌다. 그리고 믿음으로 성령님 안에서 거듭나지 못하고 세상의 소욕을 가진 자들은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가나안)안에 들어간 자들은 새롭게 태어난 새피조물들밖에 없었다. 구약에 가나안에 들어간 모든 백성들이 그 믿음을 소유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은 어디까지나 예표다. 첫 세대도 홍해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새로 난 세대도 요단에서 죽음을 통과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예표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5]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임함으로 완전한 보살핌이 있고 완전한 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의 마지막에 새예루살렘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더 이상 눈물이 없다. 주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완전한 안식이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한 안전과 쉼(안식)을 보장한다.


e. 물과 침례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이다. 물속에서의 죽음과 물에서 나와 다시 사는 것은 죽음을 통과하고 다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침례라고 했다.


벧전 3:20-21 개역개정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그래서 침례의식은 죄인으로 태어난 생명이 죽는 것을 뜻한다. 실제적인 죽음이 아니라 법으로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죽고 물에서 올라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생명에게 성령님이 부어진다. 이것은 예수님의 세례장면에도 동일하게 보여지는 부분이다.[6]


f. 계시록의 음녀와 바다

 계시록에서 음녀가 앉아 있는 곳은 바다이다. 그리고 짐승들이 올라오는 곳도 바다이다. 또한 음녀가 물위에 앉아 있고 그들이 교역을 하는 곳도 바다이다. 지금까지 창세기와 성경 전체에 흐르는 물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계시록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물속에 사는 존재들은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이다. 바로 짐승과 음녀와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들이 거하는 곳이 바로 바다이다. 물인 것이다.


하늘과 땅의 권세

태초에 인간에게 주어진 권세는 하늘과 땅과 바다의 권세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권세는 하늘과 땅의 권세만을 언급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바로 바다가 영적으로 가지는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바로 호흡이 없는 이미 정죄 받고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가 다스리는 영적인 곳은 하늘과 땅인 것이다. 바다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불순종의 아들들이 갇혀있는 어둠인 것이다.      


  


[2]골 1:16 바른
16이는 하늘과 땅에있는 모든것들,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않는 것들, 보좌들과 주권들과 통치들과 권세들이 그 안에서 창조되었기때문이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다.(골 1:16, 바른)

[3] 이 말은 짐승에게 영이 있는지 없는 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본문에 사용된 생명의 호흡이라는 단어가 특별하게 인간에게만 사용되고 오직 영적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쓰여진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생명의 호흡을 통해 인간은 생명체가 되었다. 이 생명체의 히브리 원어가 창 1장에서 짐승들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 단어 자체는 모든 호흡 있는 것들에게 공통되게 사용되었다. 단지 그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그것이 영적인 호흡이 있고 하나님과 교제함을 뜻하는 단어가 되는 것이다.
[4] 창 6:17바른
17보아라, 이제 내가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 하늘 아래 생명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를 멸할 것이니,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을 것이다. (창 6:17, 바른)

[5] 히 3:17-19 개역개정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6] 이 침례에서 특이한 것은 육신이 죽어서 육신 안에 있는 죄가 모두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실질적인 죽음을 맞이하면 바로 심판이라서 기회가 없다. 그래서 살아서 실질적인 죽음을 맞지 않고 살아서 죽음을 통과하는 의식을 치룬다. 법적으로 죽음을 맞는 것이다. 그리고 법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육신의 더러움이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한다. 그러나 육신이 죽고 부활의 몸을 입고 완전히 새롭게 되지 않았으므로 육신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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