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후 사람의 정신은 영과 육, 또는 영과 혼 그리고 육으로 되어있다고 봤다. 물론 여기서 육은 몸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육적인 것을 뜻하기도 했다. 즉 육적인 식욕과 성욕 그리고 출세욕 등을 육으로 보았던 것이다. 영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진리나 지혜 또는 추구하는 신을 향한 마음을 영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것에서 조금 멀어져서 정신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혼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인 인간의 정신활동의 영역들은 혼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사람의 정신을 영과 혼과 육을 나누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자아 즉 정신을 구성하는 장기가 영과 혼과 육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고대에 행해졌던 사람의 정신에 대한 분석 오류 중 대표적인 것이다. 영과 혼과 육은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단지 인식되고 추구되는 대상인 객체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신적인 것과 이데아계의 것으로 상징되는 지혜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정신이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지 정신 내부에 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개념 자체의 오류다. 사실 인간의 정신은 하나인데 인식하는 주체인 정신과 그 대상이 되는 영적인 것이 혼동이 생겨서 인간 안에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영이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혼적인 것과 육적인 것도 인간이 추구하는 대상이지 인간 자체의 정신의 내부 장기가 아닌 것이다.
이 설명이 추상적이라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쉬운 예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사과를 생각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정신 안에 사과라는 내부 장기가 있겠는가? 그 사람은 영과 혼과 사과로 구성된 정신을 가진 것인가? 단지 사과는 생각의 대상인 객체일 뿐이다. 생각의 주체인 정신이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영적인 것을 생각한다고 해서 그 정신 안에 영이라는 내부 장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영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정신은 여전히 통합된 하나로 존재한다. 단지 그 정신이 영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 그리고 그 이후 중세와 근 현대에도 이러한 인간의 정신에 대한 잘못된 분석이 계속되어 왔다.
사람의 정신을 영과 혼 그리고 육으로 나눈 것은 그리스인들이 육적인 것을 더럽다고 여기는 사상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지혜를 추구했고 지혜를 신으로 까지 탐하여 섬겼다. 그래서 지혜와 초월적이고도 은밀한 지식을 향한 열정(영적 열정)은 선한 것이고 그 외에 인간의 육신적인 관심사(육적인 것)들은 악한 것으로 여겼다. 이것을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한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 둘로 나누어 이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나누고 인간은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정신 안에도 영과 육이 존재하는데 인간은 영은 살리고 육은 죽여야 한다라고 설파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을 괴롭히고 육신을 학대했다. 그렇게 함으로 영은 살아난다고 믿었다. 이들은 더 나아가 육화(肉化, Incarnation)를 통해 하위적인 형태로 강등되어진 것이 인간의 상태이며 지혜와 선을 추구함으로 인간은 다시 신화(神化, deification)하여 신적인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이러한 것을 믿었다. 그들은 일생동안 지혜를 추구한 자들은 윤회의 결과로 더 나은 존재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많이 추구한 자들은 인간이나 또는 인간보다 뛰어난 천사나 반신반인이나 요정 또는 더 나은 영적인 존재로 윤회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육적인 것을 추구한 자들은 동물이나 그 보다 더 하등한 자들은 곤충으로 윤회한다고 믿었다. 상승하는 것을 신화(神化, deification)로 하강하는 것을 육화(肉化, Incsrnation)로 표현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하며 독배를 마신 일화를 우리는 많이 들어왔다. 그 사건의 배경에는 사실 법에 대한 신념보다 이런 잘못된 사상과 종교에 의한 광신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지혜를 추구하며 살았다. 그래서 악처라고 알려진 그의 아내에게 핍박을 받았다. 소요학파라고 불리었던 그의 제자들의 무리 중 일부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생업에 종사하는 것(형이하학) 보다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고 형이상학적인 것을 추구하며 산책하며 토론하며 일생을 보냈던 것이다. 생업을 등한시하는 그의 태도가 그의 아내를 악처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혜를 추구하며 살았으니 자신에게는 더 나은 윤회가 있을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독배를 기꺼이 마셨다. 그 광신적인 믿음으로 자신에게는 더 나은 윤회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한 선택이 아니었다. 우리 스스로 자문해 보자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당신이라면 과연 법에 대한 신념 때문에 악법도 법이라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기꺼이 죽음의 독배를 선택하겠는가? 누가 봐도 그것은 개죽음일 뿐이다.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인간은 없다. 단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후대의 플라톤 학파나 신 플라톤주의의 광신도에게는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 나은 형태로의 신화(神化, deification)를 믿었기에. (물론 이 일화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이 일화가 사실이다 아니다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려두고 그 일화가 있었다면 그 일화의 숨은 진의가 위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