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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안 Mar 30. 2023

결정의 원칙

  삶은 생각대로 되는 약간의 일들과 의도대로 되지 않는 많은 일들로 구성된다. 그 반대인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요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의 통상적 줄거리가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도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다. 인과관계를 따지기는 좀 그렇지만 부모 상호 간 합의의 결과라고 보기도 어렵다. 뭔가를 산출하기 위해 섹스를 하기보다 섹스를 하다 보니 뭔가가 산출되는 경우가 더 흔하기 때문이다. 의도하는 대로 되는 것도 삶이고, 또 의도하지 않는 대로 흐르는 것도 삶이다. “순리대로 살라”라는 말은 생각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생각하라는 의미도 아니다. 적당히 생각하라는 의미에 가까운데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적당히 생각해서는 ‘순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심사숙고해야 한다. 수많은 멘토들이 궁극의 균형, 중용, 통찰…과 같은 애매하고 어려운 말을 하는 이유도 사실 ‘순리’에 대해 확정할 수 없는 무슨 사정이 있지 않을까.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임마누엘 칸트, 장자크 루소, 프리드리히 니체, 토마스 에디슨, 장 칼뱅 같은 사람이 그렇다. 인생 전체를 던져 역사의 진일보를 위해 헌신한 창조적 위인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매일 소소한 일상을 반복하고 사소한 결정에 신중한 꾸준함으로 점진적 상승작용을 해 마침내는 빅뱅과 같은 창조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반면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을 죽음처럼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스티브 잡스, 마르틴 루터, 일론 머스크와 같은 혁명가들인데 그들은 반복하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을 정도로 루틴을 싫어했다. 늘 새로움을 향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향을 갖고 살았다. 큰 결정, 혁신적 사고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삶을 영위하는 스타일과 성향은 선천적인 요인과 함께 후천적, 환경적인 요인도 작용할 것이다. 사람의 삶이 돌이켜보면 결국 거기서 거기겠지만 그 과정을 짚어보면 너무나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이혼 사유다. 삶은 결정의 연속인데 무의식은 연속된 결정의 결과가 삶을 결정한다고 온갖 협박과 공갈을 해댄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라는 말이 진리라면 우리는 모두 결정장애와 노이로제로 신경쇠약에 걸릴 것이다. 어떻게 보면 결정한다는 것이 중요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너무 결정하는 것에 예민할 필요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살다 보면 다 잘 될 것 같다가도, 이렇게 살다가는 아무것도 안될 것 같은 조바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은연중 판단을 어떻게든 위임하거나 유보하고자 노력한다. 회식 메뉴를 결정할 때는 다수결에 따르고, 회식 장소를 결정할 때는 구글에게 물어본다. 구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별을 그려 힌트를 준다. 결정을 위임하거나 특정 플랫폼에 의지해 선택을 유보하면 크게 위태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 번만 사는 삶이기에 일상의 과정 속에서 “결정”을 한다는 것에 대해 경솔하게 단정하여 기술할 수는 없다. 결정하는 행위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미래는 누구도 예측하거나 단정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결정하는 것의 합리성을 논하는 것은 다소 제약이 따른다. “내가 보기엔 이럴 것 같아, 감이 오지 않니?, 내 느낌은 틀린 적이 별로 없어”와 같은 선언은 사실 효능을 입증할 수 없는 약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래에 대한 가정을 갖고 결정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반면 결정의 무용론을 강조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만일 “‘결정하는’ 행위 자체가 결과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므로 아무 결정도 하지 말고 그냥 사건이 일어나는 바를 관조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궤변이다. 사람의 직관과 통찰은 많은 역사를 만들어 왔다. 깊이 있는 사고와 논리적인 판단, 과감한 결단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고 창조했다. 그래서 리더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찰과 공부와 수양이 필요한 것이다.


  결정은 인간에게 숙명과도 같다. 일상과 삶의 주요한 기로에서 우리는 반드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도망칠 곳이 없다. 도망치는 것은 인간 존엄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 항상, 매일, 그리고 자주 우리는 결정을 하며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결정하는’ 것들에 대해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면 반성해야 한다. 내 삶을 하나하나 짚으며 나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 단 한 번밖에 존재할 수 없는 삶을 공허한 시간적 공간에 유보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느껴야 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스스로 결정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결정의 원칙. 살다 보면 큰 결정을 해야 할 때와 작은 결정을 해야 할 때가 구분된다. 당연히 큰 결정의 횟수는 적을 것이고, 작은 결정의 횟수는 잦을 것이다. 큰 결정을 할 때는 단순하고 간명하게 해야 한다. 큰 결정의 다른 말은 중요한 결정이다. 중요한 결정은 삶의 방향을 좌우한다. 이때가 대관세찰 해야 하는 때다. 그런데 보통은 세찰만 하다가 끝난다. 지쳐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면 안 된다.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성장의 분수령이 되는 결정은 대의와 상식, 원칙과 합리를 기준으로 분명하고 단순하게 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지향점과 방향이 맞으면 진행 중 발생하는 가변요소는 얼마든지 조정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상의 작은 결정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통상 지금까지는 별 고민 없이 결정했던 것들에 대해 새로운 결정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친구 부모님의 조의금은 얼마를 하고 어떻게 위로할 것인지, 교수님과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그분은 어디서 공부하셨고 어떤 꽃을 좋아하며 혹시나 생신은 언제인지, 출장을 부장님과 함께 가기로 했는데 이동할 때 어떤 감미품을 준비하는 게 좋을지, 아니 상습정체구간 등 이동경로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는 되었는지…등에 대해 좌고우면 해야 한다. 작은 결정은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심사숙고해서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반대로 하지는 않았는가? 삶은 의외로 작은 곳에서 대별된다.


  삶은 의도한 대로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의도가 없으면 어떤 삶도 상상할 수 없다. 결정의 원칙은 상상을 전제로 해야 한다.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결정의 출발이다. 삶의 방향을 정하는 큰 결정은 간단하고 단순하게, 일상을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작은 결정들은 심사숙고해야 하며 섬세하고 신중해야 한다. 사람은 큰 바위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눈에 잘 안 띄는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 게 우리의 삶이다. 결정의 원칙이 좋은 결과를 보증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꿈꾸는 삶을 상상하고 여러분의 결정이 그 꿈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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