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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안 May 25. 2023

충만함으로

  내일부터는 큰맘 먹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봐야겠다고 결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는 것을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우왕좌왕하는 것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하루를 10분 단위로 쪼개서 살아보기도 하고, 8시간 연속 책 읽기 같은 짓을 해보기도 하며 뭔가 변화하는 삶, 혁신하는 자신을 추구해 보기도 한다. 그러면 뭐 하나. 지금 쓰는 글처럼 어디선가 본 듯한 상투적인 표현, 뻔한 이야기로 거룩한 지면을 도배하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백만 번 정도 든다. (백만 번… 이 얼마나 상투적이고 뻔한 표현인가? 이불킥하며 내 글들을 싹 다 지워버리고 싶다) (“이불킥” 이런 단어밖에 못 쓰나?…ㅡ.ㅡ;;;) 이 글을 읽어 나가는 누군가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창피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다 보면 충만함에 이를 때가 가끔 있다. 자주 있는 것은 아니고 가끔 있다. 늘 어리석고,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발견한 행운처럼 온몸과 마음으로 충만함에 이르는 순간들이 있다. 마흔 중반을 넘어 아마도 생의 후반부로 접어드는 빛바랜 문을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충만한 찰나가 가끔은 나에게도 찾아온다. ​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논 한가운데로 뚫린 황산벌 도로를 차로 달려가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마중”이라는 가곡이 흘러나온다. 묵직한 바리톤 음성이 파란 하늘과 초록색 대지 사이에서 내 주변을 가만히 감싸 안는다. 별일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충만함이 가슴으로 벅차게 흘러들어 온다. 문득 그리워지는 이의 존재가 익숙한 향기로 바람결에 실려온다.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라는 가사는 이미 내 영혼과 한 몸이 된다. 이토록 눈부시고 충만한 순간은 갑자기 찾아온다.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흘러간다. 삶의 흔적, 옅은 향기로 남을 것이다. 충만한 순간은 그렇다.   

  열심히 일하고 난 뒤 흠뻑 땀 흘려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면 더할 수 없이 충만하다. 늘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열에 한번, 아니면 두 번 그런 기분을 느낀다. 매일이 충만하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충만한 마무리가 루틴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의도하면 더 안되는 감정이 충만함이다. ‘충만함’을 ‘행복감’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뭔가 억지가 있다. ‘충만함’은 행복감 보다 더 생동적이고 감성적이고 밝은 면이 있다. 충만함에는 향상성, 긍정성, 활동성이 있다. 충만함을 느낄 때의 조건이 성취감에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드라이브를 하며 느꼈던 충만함은 또 다른 뭔가가 있었다. 우연히 만난 충만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만함을 위한 공식, 필요충분조건을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것은 억지가 된다.

  허접한 글이고 언뜻 보면 개똥철학 같은 혼잣말이지만 나름대로 진지하게 쓰는 글들이다. (허접한 글이지만) 며칠 글을 안 쓰면 ‘안 쓴다’고 잔소리하는 구독자도 있다. (그 잔소리는 은근히 기분이 좋다. 가끔 의도적으로 뜸을 들이기도 한다. 영업 비밀이다. 허접하지만) 때문에 오늘은 “충만함”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고민 중이다. (충만하게 이 글을 마치기 위해서 노력 중이다) 충만하게 하루를 정리하는 루틴을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하고 싶은 충만함의 일반적인 조건은 이렇다. ​


  충만하려면 뭔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일에 미치든, 운동에 미치든, 취미에 미치든, 그녀(놈)에 미치든 대상에 몰입하고 열정과 시간을 투자하여 지향하는 바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충만’이라는 말은 뭔가에 충분히 만족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만족할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을 향한 방향성이 필요하며, 만족할 만한 성취적 상태가 필요하다. 무슨 일에 든지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충만함을 부른다. ​


  나는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을 때 충만함을 느낀다. 차를 탔는데 대시보드에 먼지 한 톨 없을 때 충만함을 느낀다. 방이나 거실에 가구만 있고 아무것도 없을 때 충만함을 느낀다. 역설적으로 뭔가를 가득 채워야 느끼는 감정이 충만이 아니고 오히려 충분한 여백, 비움, 빈 공간이 충만함을 부른다. 충만함에 이르게 위해 제안하고 싶은 두 번째 혼잣말은 “청소 좀 하라"라는 것이다. 더 사지 말고, 더 놓지 말고, 더 채우지 않으면 충만할 수 있다. 내 집을 우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주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만들어라. ​


  앞서 말했듯 ‘충만하기 위한 루틴’은 발견하지 못했다. 어제 충만함을 느껴서 오늘 똑같이 했는데 오늘은 안 충만한 경우가 많다. 조건을 충족한다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닌 것이다. ‘충만함’은 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이다. 내가 충만함을 느끼는 것은 충만한 감정이 나에게 오는 것이지 내가 유기적인 조건을 만든다고 해서 당연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운 좋게 충만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의식에 긍정적인 것들, 만족할 수 있는 의식을 세뇌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빨리 좋은 생각으로 치환하고, 불안한 감정이 들어오려고 하면 그 자리를 벗어나 밝고 긍정적인 면으로 스스로를 이동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안 좋은 생각, 부정적인 소식들로 도배된 뉴스, 우울하고 지질한 발라드, 누가 쓰다만 중고품, 티브이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것들이 접근해 오면 그 신호를 빨리 끊고 그 자리를 이탈해 새롭고, 밝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내 사고를 옮겨야 한다. “나는 충만하다”, “나는 창조적이다”, “나는 되는 놈이다”라는 혼잣말을 계속 무의식에 주입시켜야 한다. 그리고 충만하여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충만함에 이르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는 없다. ​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체로 행복한 사람, 행운이 넘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당근’이나 보고 있거나, 유튜브 ‘숏츠 미디어’나 넘겨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운 좋게 좋은 글 하나 건지는 것이다. 충만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당장 너(님) 방부터 청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무의식에 밝은 면, 긍정적인 것, 좋은 것들로 세뇌해야 한다. 그러면 더 자주 충만함의 순간을 맛볼 것이다. 충만한 삶이 뭉게구름처럼 풍성하게 피어오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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