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단어를 두려워하는 공포증 '히포포타몬스트로세스퀴페달리오포비아'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공포증이 있다.
고소 공포증, 폐쇄 공포증, 심해 공포증처럼 흔히 잘 알려진 공포증에서부터,
야채 공포증, 숫자 공포증, 인형 공포증과 같은 처음 들어보는 공포증까지.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과 함께 다양한 공포증들이 발견되어졌고 일부는 새롭게 생겨났다.
사람에게 공포를 유발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공포증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을 실제로 겪지 않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 땀이 흐르고, 주체할 수 없는 공포를 느껴야하며,
그 상황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해서는 안된다.
가령, 미친 살인자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상황에서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건 당연하기에,
그 공포를 두고 '미친 살인자 추격 공포증'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집단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는 있겠지만.)
최근, '긴 단어 공포증'이라는 이름의 공포증에 대해 자세히 들을 일이 생겼다.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꽤 흥미로운 얘기라 소개해보려고 한다.
긴 단어 공포증은 말 그대로 긴 단어를 보면 엄청난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긴 단어를 귀로 들었을때보다, 눈으로 보았을 때 훨씬 큰 공포에 휩싸인다고 한다.
이 공포증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은데, 긴 단어를 읽다가 큰 실수를 한 경험이 있거나,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경험이 있으면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그것이 이러한 공포증의 형태로 발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사실 한글에는 긴 단어가 없어, '긴 단어'라는 느낌이 확 와닿지는 않는데,
영어권 국가에서는 특정 개념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될수록 뭔가 차곡차곡 단어가 붙는 일이 많아
우리나라에 비해 긴 단어가 상대적으로 많다. 애초에 한글은 받침이라는 장치가 있어,
글자가 오밀조밀하게 세트로 묶여있는 반면, 영어는 그냥 줄줄이 쓰여져있어 더 길어보인다.
굳이 이 긴 단어의 느낌을 한글로 느끼고싶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공포를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는데,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고소 공포증'의 경우,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위험하기에,
깊은 바다를 무서워하는 '심해 공포증'의 경우, 깊은 바다에 빠지면 익사로 위험하기에,
밀폐된 좁은 공간을 무서워하는 '폐쇄 공포증'의 경우, 갇힌 공간은 산소가 부족하여 위험하기에,
몸에서 공포의 방식으로 일종의 경고를 주는 것이라고 한다. 더 나은 환경으로 이끌기 위해.
하지만 '긴 단어 공포증'은 생존 본능으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긴 단어가 뭐 나를 죽이러오는 것도 아니고, 읽지 못한다고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공포를 느끼는 또다른 이유는 특정 상황에서 뇌가 어떠한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흔히 불쾌한 골짜기로 잘 알려진 개념을 예로 들어보면, 인간과 전혀 유사하지 않은 대상을 보면
뇌에서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라고 단정 짓기 쉬우나, 대상이 인간과 점점 유사해질수록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혹은 '저것은 인간이다.' 분별이 어려워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뇌가 더욱 많은 요소들을 끌어들이게 되어, 그 피로함이 불쾌감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공포감보다는 불쾌감 또는 혐오감의 발생 메커니즘에 적합하여,
긴 단어를 보고 불쾌함을 느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으나, 공포감을 느끼는 것은 설명하기 애매하다.
도대체 왜 긴 단어를 보면 공포를 느끼는 것일까.
영단어 중에서 가장 긴 단어는 단백질의 한 종류인 티틴의 화학 명칭이라는데,
자그마치 189,819개의 알파벳으로 구성이 되어있다고 한다. (영문 사전이 17만 개 정도)
'긴 단어 공포증' 환자가 저 단어를 보면 얼마나 까무러칠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발음하는 데에만 3시간이 넘게 걸린다하니, 3시간짜리 공포 영화가 따로없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혹시 지금의 '긴 단어 공포증'은 굉장히 일찍 등장한 '얼리 버드' 공포증이고,
알고 보면 우리가 모두 서서히 이 공포증에 잠식되고 있는 중은 아닐까 말이다.
사실 나만 해도 두꺼운 책을 읽는 빈도가 급격하게 줄었고, 심지어 그냥 긴 글도 읽기 싫다.
뉴스는 제목만 슥슥 넘겨서 알맹이만 보는 경우가 허다하고, 카톡도 길게 오면 귀찮다.
넓은 범위에서 어쩌면 나도 '긴 단어'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어느순간 긴 영상에는 손이 잘 안가고, 10초 내지 30초 정도 되는 숏폼 컨텐츠만 본다.
그렇다면 혹시 언젠가 이런 일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숏폼 컨텐츠에 너무 익숙해진 세대에는 이런 공포증도 생길 법하다.
길이가 10분 이상의 영상을 보면 공포를 느끼는 '긴 영상 공포증',
혹은 10초 스킵할 수 없는 영상을 보면 공포를 느끼는'스킵 불가 공포증'.
이러한 공포증이 나타날 때에는 '긴 단어 공포증'은 오히려 꽤 납득할만한 공포증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지금보니 나도 초기 '히포포타몬스트로세스퀴페달리오포비아' 인가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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