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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밤바 Mar 24. 2022

런던 여행 1

즉흥적이고 계획적으로. 3/10-3/14/2022

이번 런던 여행은 다분히 즉흥적으로 결정되었다. 단 한 가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진은 이 여행을 계획했고 감행했고 난 참여했다. 그 목적은 에디 레드메인, 유진이 수많은 온라인 사이트에서 자신의 비밀번호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는 그를 보는 것이었다.


에디 레드메인. 그는 <사랑에 대한 모든 것>, <데니쉬 걸>, <신비한 동물사전>, <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등 많은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노래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배우다. 레미제라블에서 코제트와 듀엣을 부르던 마리우스를 기억하는가? 그가 얼마 전 뮤지컬 카바레에 출연하기로 했고 런던에서 상영 중인 그 뮤지컬을 보러 가면 에디 레드메인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사치스럽고 무리스럽지만 분명하고 확실한 계획이었다. 더불어 한국에 있을 때 유럽은 너무 멀어 단기 여행은 엄두도 못 냈던 것을 감안하니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은 태평양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대서양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국가 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목요일 밤 10시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 마침 매주 목요일마다 있는 랩 미팅에서 내 차례가 돌아왔던 참이라 발표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는 좋은 타이밍이었다. 세시 사십오 분에는 지도교수와 주간 미팅이 있었는데 오전에 긴 발표를 했기 때문에 딱히 추가로 논의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았다. 난 지도교수에게 런던 여행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딱히 비밀이었다기 보단 뭐 굳이, 싶었다. 사실 지금 연구실에선 한국에서와 같이 교수의 눈치를 보거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주말을 껴서 짧게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좋은 레스토랑 하나쯤 추천해 줬을지도 모른다. 교수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이런 부분에서 내 지도교수는 쿨한 편이다. 그럼에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마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게 된 미국에서의 습관 탓이 있다. 나는 말수가 많은 편이지만, 한국에서와 비하자면 현격히 말수가 줄었다. 필요한 말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니 물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해 내가 굳이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서 수다를 떨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내 지도교수가 쿨하다곤 하지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는 법이었다.


저녁을 먹고 일곱 시쯤 집을 나섰다. 공항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척 산뜻했는데, 그 이유는 몇 주 전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다. 난 2월 초에 누나를 만나러 밴쿠버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오전 비행기를 타러 라구아디아 공항에 가야 했는데 늦잠을 잔 탓에 약 출발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급하게 체크인을 하는 도중 난 영주권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주권이 없으면 가지 못하냐고 물었더니 직원은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그 대답과는 달리 그는 천연덕스럽게 티켓을 프린트해서 내게 건네주었고 내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게이트가 멀리 있으니 서둘러 뛰어가라고, 다급하지만 친절이 가득 묻은 상냥한 미소로 말했다. 나는 연신 고맙다고 그에게 인사를 전하고 게이트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게이트에 도착했고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짐을 싣고 안전벨트까지 맸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영주권 없이 어떻게 돌아오지? 급하게 구글을 찾아보니 영주권이 없이는 절대로 미국에 돌아올 수 없다는 글이 쏟아졌다. 만약 여행 중 영주권을 분실했다면 해당 국가의 미국 대사관에 찾아가 서류를 제출하고 새로 발급을 받아야 하는데 그 비용이 600달러가량 된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내 비행기 티켓은 300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급하게 승무원을 불러 물어보니 얼른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바로 출발했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거의 내쫓기다시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자마자 다른 생각 하나가 스쳤다. 그 직원, 그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로 내게 티켓을 끊어줬던 그놈. 그는 내게 친절을 가장한 엿을 먹인 것이었나? 비행기에서 탔다가 내린 이 당황스러운 상황보다 그것이 더 당황스러웠다.


예전 같으면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난 금세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유진이 일하고 돌아온 저녁 시간에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기 때문이다. 유진은 친절을 가장한 골탕먹이기를 엄청나게 자주 한다. 선의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패딩턴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속임수들을 유진은 천연덕스럽게 반복한다. 이를테면 핸드폰 충전기를 빌릴 수 있냐고 물어보는 환자에게 그런 것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병원에 사용 가능한 충전기가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미소로 대답하고, 반복해서 물어보면 병원엔 없지만 혹시 다른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지 물어봐주겠다고까지 대답한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없다고 말해도 될 일이다. 없다고 말한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그 사람에게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 아니다. 세상에 대한 환멸 때문이다. 자신에게 가해졌던 크고 작은 폭력들에 대한 사소한 복수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다년간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건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다. 치밀한 계획과 불굴 같은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라기 보단 모든 인간들이란 자고로 악하기 마련이고 마땅한 처벌이 가해지지 않고 있다는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불의에 대한 의식이 그날의 기분과 결합되어 무고한 (듯 하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자에 대한 골탕 먹이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게 친절하기 짝이 없었던 그 공항 직원도 세상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라 나는 추측한다. 이를테면 학교나 사회나 부모나 또래 친구들로부터 그는 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점점 인간에 대한 회의, 이 땅에 과연 정의란 존재하는가 하는 매우 심오한 철학적 명제가 그를 점점 어두운 바다로 끌어당겨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아름답고도 밝은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그를 완전히 차단시켜 버렸을지 모른다. 매우 늦게 공항에 도착한 데다가 영주권도 챙기지 않고 덜렁대는 이 부주의한 인간은 한 번쯤 톡톡한 레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평소의 유진에 비해 훨씬 더 상대를 난처한 상황에까지 몰고 갈 나쁜 행동이었지만 다행히 난 그 속임수에 완전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겐 그를 용서할 아량이 있었다. 내가 만약 정말 밴쿠버에서 뉴욕으로 돌아올 방법이 없어 쩔쩔맸다면 부들부들 떨었을 테지만...


어쨌든 이런 이유로 공항을 향하는 나는 태평하고 여유로웠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해 대비가 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여권, 영주권, 그리고 국가 간 이동의 프리티켓이 되어버린 나의 작년 12월 코비드 파지티브 결과와 회복을 증명하는 의사의 편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체크인을 마치고 게이트에 당도했다. 다만 게이트 앞 펍에 틀어져 있는 NBA를 보며 유진에게 스포츠 얘기를 꺼냈다가 작은 다툼이 일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절차는 예측해도 관계는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우여곡절 끝에 작은 다툼을 잘 해결하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밴쿠버에 다녀오는 비행기는 (그 일이 있은 후 일주일 후 결국 다녀왔다) 혼자 탔었기 때문에 무척 무료했는데 유진과 함께 하니 훨씬 덜 지루하게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총 6시간 30분 비행시간 중 4시간가량은 잤던 것 같다.


런던에 도착하니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다. 호텔에는 12시쯤 도착했다. 호텔은 트라팔가 스퀘어 근처에 있었는데 히드로 공항에서 지하철을 이용해서 호텔까지 이동했다. 런던의 지하철은 깜짝 놀랄 정도로 청결하고 상쾌했다. 사실 런던의 지하철을 탄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2015년에도 여행을 왔었는데 당시엔 서울에 살 때였다. 그러므로 놀랄 일이 없었다. 오히려 서울의 지하철이 더 쾌적했다. 그러나 지금의 난 뉴욕에서 왔다. 뉴욕 지하철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인간이 이용하긴 하지만 그곳은 다른 동물들의 생활터전이다. 서로 사이가 원만해 보이는 가족 구성의 쥐들이 떼 지어 이동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때론 인간들 때문에 저들이 위험한 지하철 선로를 이용하는 것 같아 미안함마저 든다. 지하철 선로 하니 말인데 그곳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더러운 곳이다.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유진과 함께 L트레인을 기다리는데 청소 직원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승강장의 크고 작은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청소를 하는군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우리는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된 상황을 목격했다. 그 쓰레받기에 담긴 쓰레기들을 지하철 선로에 후두두두 버리는 것이 아닌가? 뭐지? 그럼 저긴 누가 치운단 말이지? 누군가 청소를 하긴 할 것이다. 만약 하지 않는다면 쓰레기로 인해 지하철이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인데 그런 상황은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뉴욕 지하철은 엄청나게 더럽지만 1미터 상간으로 쓰레기통이 배치되어 있다. 멀쩡하게 쓰레기통을 두고 선로에 쓰레기를 모아다 버리는 것은 사실은 지하철역 자체가 거대한 쓰레기통에 다름이 없다는 은유로 해석되었다. 올해부터 스크린도어를 세 개 역에서 시범 운영한다니 안전과 위생을 위해서 스크린도어가 서둘러 많은 지하철역에 생기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런던의 지하철은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공간이었다. 다른 동물 종이 아닌 오로지 인간이란 종의 편의만을 위해 운영되고 있었다. 런던의 지하철은 1863년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다. 현재의 지하철 노선 대부분은 1900년 초반에 개통되었고 우리가 패딩턴 역에서부터 엠바크먼트 역까지 이동하는 데 사용한 베이커루 라인은 1906년에 개통되었다. 불과 뉴욕의 지하철 1번 라인이 개통된 지 2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같은 시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런던 지하철과 뉴욕 지하철은 아니나 다를까 많은 기사에서 비교 대상으로 다루어져 있었다. 가디언에 실렸던 기사는 런던 지하철 역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1987년 11월 18일에 있었던 화재사고를 꼽았다. 킹스크로스 역의 나무로 된 에스컬레이터에 불이 붙으면서 일어난 화재는 31명의 승객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로 번졌고 당시 두 명의 최고위직 관리자들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고 한다. 세계 2차 대전 이후로 런던 지하철에 대한 투자가 전무한 상황이었고 이 사고는 많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국가와 시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지하철을 개보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기사는 무엇보다 책임주체의 중요성을 지적하는데 1998년 런던은 국민투표를 통해 대중교통을 중앙정부가 아닌 시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킨 후 Transport for London (TfL)을 설립하고 런던 시는 이에 대규모의 예산을 배정했다고 한다. 한편 뉴욕의 사정은 매우 다르다. 아직까지도 뉴욕 지하철을 운영하는 MTA는 뉴욕주가 관리하게 되어 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뉴욕주지사 앤드류 쿠오모와 전 뉴욕시장 빌 드 블라지오가 뉴욕 지하철의 범죄와 안전 문제에 대해 서로에게 책임을 떠밀며 비난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런던 지하철에 대한 찬양을 했지만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호텔에 도착하기 전 약 1시간 반 가량 되었던 짧은 시간 동안에 목격했던 런던의 어두운 면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영화 패딩턴의 패딩턴 캐릭터를 사랑하고 패딩턴적 가치를 숭배한다. 패딩턴의 단순하고 순수하고 귀여운 호의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힘에 틀림이 없다. 히드로 익스프레스가 공항에서 패딩턴 역까지 운행하기 때문에 패딩턴 역이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가 되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도 시간을 내서 패딩턴 역에 왔었을 것이다. 이곳에 패딩턴 스토어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나와 유진은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패딩턴 스토어에는 조야하기 짝이 없는 굿즈들만 즐비했다. 그중 가관은 패딩턴 인형이었는데 전혀 다른 곰돌이가 패딩턴 옷을 뺏어 입고 있었다. 심지어 인형마다 곰돌이의 생김새가 너무 달라 우린 어리둥절했고 그 인형들을 다 보고 나니 일종의 모욕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최대한의 이해심을 발휘해보자면 그 인형들의 가격은 대략 20파운드 정도로 싸지도 않지만 충분한 퀄리티를 만들어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런 우리의 불평 어린 표정을 읽었는지 점원은 고퀄의 패딩턴 인형을 소개해줬다. 이 인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패딩턴 6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핸드메이드 인형으로 런던에서밖에 살 수 없는 리미티드 에디션이라 했다. 가격은 무려 200파운드였다. 하지만 이 또한 아주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다른 곰돌이에 불과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패딩턴의 파란 코트와 빨간 모자만 따로 파는 것을 제안하고 싶었다.


한 가지 더. 패딩턴 역에서 유진은 어떤 여성으로부터 어깨빵을 당했다. 우린 캐리어를 가지고 있었고, 비행기에서 밤 잠을 잤으므로 행색이 초라했고, 주변을 살피는 아시아인이란 점에서 영락없이 방금 런던에 도착한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엠바크먼트역으로 가는 베이커루 라인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우리를 그녀는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패딩턴이 런던에 처음 도착해서 사람들에 치이던 그 장면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딱 그 꼴이었다. 패딩턴 이야기가 영화화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패딩턴의 패딩턴과 패딩턴 스토어의 패딩턴. 이미지 출처는 https://www.visitlondon.com/things-to-do/place/1031992-paddington

무사히 호텔에 도착한 후 우리는 짐을 풀고 빠르게 씻은 후 1시 반에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출발 전 뉴욕에서 예약해 둔 Lyle's 레스토랑이었다. 한 영국 매체가 월드 베스트 33위로 꼽은 레스토랑이었다. 대체로 맛있고 창의적인 음식이 많았는데 인상에 남는 음식은 꼬막 (cockle)과 미역으로 국물을 낸 후 야채와 함께 나온 요리였다. 가장 맛있었던 요리는 아니었지만 alexanders라는 야채를 처음 먹었기 때문에 기록해두고 싶다. 찾아보니 영국에서 많이 먹는 야채 중 하나로 아스파라거스와 식감이 비슷하고 샐러리와 엘더플라워 향이 섞인 듯한 향이 나는 허브과의 식물이었다. 그 밖에도 비트 뿌리와 함께 나온 장어 요리와 아티초크 요리, 헝가리에서 유래했다는 망갈리차 종의 돼지고기 요리도 모두 맛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저녁에는 예매해 둔 마틸다 뮤지컬을 보러 갔다.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여행이었다. 3일밖에 머물지 못한다는 압박감에 무리한 일정을 짜고 만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여행의 시기와 런던 띠어터 위크의 시기가 겹치는 바람에 티켓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마틸다는 유진과 함께 처음 본 뮤지컬로 우리는 한국에서부터 상당한 팬이었다. 황예영, 이지나, 설가은, 안소명 배우가 마틸다로 공동 캐스팅되었던 한국어 버전 마틸다가 2018년에 서울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우리는 서울 LG아트센터 2층의 꽤 뒷좌석에 앉아 공연을 봤고, 언제 기회가 되면 앞자리에서 한 번 더 꼭 보자는 다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때의 소원을 이번 여행에서 이뤘다. 우리는 매우 앞자리에 좌석을 구매했는데 배우의 눈동자에서 슬픔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내용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만 기록해두고 싶은 것은 유진과 함께 한 세월에 대한 고마운 감정이다. 앞서 잠시 언급하기도 했지만 유진과 나는 상당히 다르다. 내가 우린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말할 때면 유진은 우리가 꽤 비슷하다고 느끼는데 왜 그렇게 다르다고만 말하냐며 반론을 제기하곤 했다. 주로 내가 부정적으로 불평하듯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서로가 다른 것으로 인해 이해의 간극이 생기고 갈등이 발생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난 이번 여행에서 유진으로 인해 바뀐 나의 삶과 취향에 대해 문득문득 생각했다. 유진을 알기 전까지 난 뮤지컬을 본 적이 없었다. 딱히 관심도 없었고 유진을 만나기 전 나였다면 지금 마틸다를 보며 느끼는 감동을 똑같이 느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취향의 변화는 대게 수월하지 않다. 취향이 변화하기 위해선 상당한 양의 노력과 시간과 우연의 사건들이 필요하다. 어느 책에선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갖게 된 음악 취향을 평생 가지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또한 20대 초반에 많이 듣던 음악을 아직까지도 좋아하는데 그 외에도 유진과 함께 본 뮤지컬들 그리고 유진과 함께 들으면서 좋아하게 된 몇몇의 케이팝과 제이팝이 나의 취향 목록에 추가되었다. 유진 외에도 취향에 영향을 많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은 김혜리 기자님인데 오랜 시간 팟캐스트와 글을 통해 그분이 어떻게 영화를 보고 무슨 영화를 왜 좋아하고 왜 싫어하는지, 그 밖에 미술과 음식과 음악에 대해선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면서 그분이 오랫동안 큐레이팅 해 온 취향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형성되었다. 이런 상태가 되면 그/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좋아할 준비자세를 갖추게 된다. 좋아하는 작가에게 최근에 읽은 재밌는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북토크 자리에서 빼놓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상대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 수용하는 상태가 되기 위해선 사람 자체에 대한 호감과 신뢰가 결정적이다. 이 사람이 이 작품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싫어하는 데는 그만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먼저 작용해야 그의 취향이 들어올 자리가 마련된다. 유진의 취향을 대할 때도 그래 왔고 그런 일들이 누적되어 지금 내가 런던까지 와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유진과 함께 여행을 하며 혼자였다면 하지 않았을/못했을 많은 것들, 이를테면 마틸다를 보고 눈물을 훔치는 일은 여행을 하면서 경험하는 많은 것들 중 내게 최고의 것들에 속한다.


열 시가 다 된 시간에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니 어느새 열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씻고 하루간의 지출을 정리하고 수다를 떨고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두 시였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우리의 여행기간 3일 중 내일은 유일하게 해가 쨍쨍한 아침이었다. 오후 12시에는 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카바레를 보러 가야 한다. 따라서 우린 아침 일찍 일어나 버킹엄궁을 산책하고 호텔로 돌아와 준비해서 나가기로 했다. 이 정도의 계획이었다면 난이도 중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여행이다. 우리의 야심 찬 계획은 거기에 멈추지 않았고, 에디가 좋아한다고 알려진 새우버거를 파는 브런치 레스토랑에 가서 (식당은 첼시에 위치해 있었고 호텔과는 도보로 1시간가량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아침을 먹고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버킹엄궁을 구경하기로 했다. 거꾸로 계산을 해보니, 12시에 호텔에서 다시 나가기 위해서는 11시엔 돌아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10시엔 식사를 마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9시에 식당엔 도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8시엔 일어나야 했다. 우린 이 계획을 논의한 후 즉각 두 핸드폰 모두 알람을 8시에 맞추고 잠들었다. 파란 하늘 아래 아침 햇살로 반짝거리는 버킹엄궁을 상상하니 내가 정말 런던에 오긴 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마지막으로 마틸다를 보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유진이 마틸다의 Naughty 중 특히 좋다고 했던 가사의 일부를 나름대로 번역해서 옮겨본다.

마틸다 공연 장소인 캐임브릿지 띠어터.
In the slip of a bolt, there's a tiny revolt
나사 하나가 미끄러지는 것에서 작은 반항이 시작되지

The seed of a war in a creak of a floorboard
마룻바닥의 작은 삐걱거림 속에 전쟁의 씨앗이 있고

A storm can begin with a flap of a wing
한 번의 날갯짓에 태풍이 치지

The tiniest mite packs the mightiest sting
가장 작은 벌레가 가장 강한 침을 가졌어
 
Every day starts with a tick of a clock
시계의 똑딱 소리 하나로 매일이 시작되고

All escapes start with the click of a lock
자물쇠 하나가 열리는 소리로 모든 탈출이 시작돼

If you're stuck in your story and want to get out
너를 가두는 얘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You don't have to cry
울 필요는 없어

You don't have to shout
소리칠 필요도 없어


Cause if you're little you can do a lot, you
너는 작아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깐

Mustn't let a little thing like little stop you
작은 일이 널 멈추게 해선 안 돼

If you sit around an let them get on top, you
네가 만약 가만히 참고 있는다면

Won't change a thing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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