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밤바 Apr 13. 2022

런던 여행 3-1

<폴리 베르제르 바>  3/10-3/14/2022

여행 3일차 코톨드 갤러리 근처에서 브런치를 먹고 11시에 갤러리에 도착했다. 코톨드 갤러리는 이번 여행에서 내셔널 갤러리, 자연사박물관, 대영박물관 등의 많은 후보를 제치고 유일하게 들린 갤러리였다. 그건 단지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 보기 위함이었다. 2층과 3층은 중세 르네상스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4층에 마네의 작품을 포함해 인상주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4층의 일부에서는  고흐 초상화전이 특별 전시 중이었는데 이미 예매가 4월까지   있어 아쉽게도 들어갈  없었다. 우린 4층으로 곧장 향했고,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잠시  눈을 팔긴 했지만 서둘러 <폴리 베르제르 > 찾아갔다.


<폴리 베르제르 바>는 마네의 마지막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마네는 인상주의의 문을 연 화가다. 그런 그의 마지막이다. <풀밭 위의 점심>으로 그는 아카데미아로부터 뛰쳐나왔고 그 후 <올랭피아>로 인해 당대 예술계의 공식적인 이단아가 되었다. 줄리언 반스의 <사적인 미술산책>에선 마네를 창문으로 벽돌을 던진 사내에 비유한다. 누군가 앞 창문으로 벽돌을 던져 집주인의 주의를 끄는 동안 다른 무리들이 뒷문으로 들어가 도둑질을 한다는 이야기에 빗댄 것이다. 이 비유에서 뒷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우리가 다 아는 당대의 유명한 인상주의자들이다. 그만큼 마네는 새로웠고 도전적이었고 발칙했다. 지금 보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싶은 <튈르리에서의 음악회> 같은 경우 너무나 일상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분노했고 전시회에서 그 그림을 당장 내리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더 이상 성서와 신화의 영웅을 그리지 않는다. 그들이 그리는 대상은 일상의 인물과 사물들이고 의미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예술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 곧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시각화를 의미했다. 회화는 텍스트로만 주어진 성서와 신화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그 안의 계시되고 함축된 메시지를 해석하는 매개물이었다. 하지만 종교적인 세계에서 해방된 근대의 예술가들에게 그런 회화는 정부나 교회에게 하청 받는 돈벌이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았다. 근대의 화가들은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것들보다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스캔들이었고 마네는 그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마네의 가장 문제적 작품인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는 각각 조르조네의 <전원 음악회>와 타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원작으로 패러디한 작품들인데 원작의 경우 신화 속 가상의 인물들인 반면 마네는 이들을 현실의 눈에 보이는 존재로 표현했고 이는 현실의 지저분한 것들이 숭고한 세계로 침투했다는 점에서 신성모독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조르주 바타유는 <올랭피아>가 현대 회화의 위엄을 드러낸다고 썼다. 마네는 고상한 예술의 세계에서 제한적으로 군림하던 성스러운 대상들을 삭제하고 대신 "아무것"이나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음을 통해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그 위엄을 드러내는 회화를 탄생시켰다고 말한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조르조네의 <전원 음악회>
마네의 <올랭피아>와 타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비슷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현대 생활의 영웅주의>라는 짧은 글을 통해 풍속화와 같은 새로운 예술들을 옹호했다. 그는 이 글에서 현대의 아름다움이 이전 시대의 그것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직 인식되지 않았지만 현대 생활의 일상적 영웅성은 고대 전쟁 영웅들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현대 생활의 영웅의 예로써 일상의 성실한 노동자들이나 새로운 세계를 정립해 나가는 철학자와 예술가가 아니라 범죄자들과 불륜 상대의 여성 혹은 정부(情婦)를 언급한다. 그는 그들에게서 어떤 영웅성, 무엇에 대해 필사적으로 겨루고 있는 영웅을 본 것일까? 보들레르가 현대의 영웅으로 범죄자와 정부(情婦)를 예로 든 이유는 사실 모더니즘이 전통적 미학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그의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아릅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인식론적인 변화를 꾸준히 요구했고 그 대상으로 일상적인 것, 그중에서도 데카당스(퇴폐주의)에서 현대의 영웅을 모색했다. 그에게 있어 영웅이란 기존 가치체계에서 영웅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전통적 세계에 대해 빚진 것이 전혀 없는 존재들이었다.


실제로 보들레르와 마네는 각별한 사이였다. 평단으로부터의 혹평에 시달리던 마네의 작품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 보들레르였고 그 둘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 외에도 에밀 졸라, 스테판 말라르메와 같은 당대의 문학가들이 마네를 지지했고 그의 평생의 후원자가 되었다. 비록 보들레르는 졸라나 말라르메만큼 마네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마네만큼 그가 말했던 "현대적 삶의 화가"에 부합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아가 마네는 보들레르의 인정을 몹시 갈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였는지 그는 보들레르를 넘어서는 지점까지도 도달했던 것 같다.



<폴리 베르제르 바>에서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중심에 선 여자의 공허한 눈이고,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비틀어진 구도다. 화가의 관점은 바텐더 여성의 정면에 있지만 정작 정면에 있어야 할 사람은 커다란 거울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남성이다. 하지만 만약 화가가 거울에 비친 남성의 시점을 빌리고 있다면 그는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거울 오른쪽에서 그의 왼쪽 얼굴을 비추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면의 얼굴을 바텐더 얼굴 너머로 살짝 내비치고 있어야 한다. 비틀어진 구도의 의도는 남성의 얼굴을 보여주거나 바텐더의 뒷모습을 보여주거나 혹은 둘 다 일 것이다. 만약 정상적인 구도를 설정했다면, 남자는 여자의 얼굴 옆으로 그의 모자의 일부를 보이고 있을 것이다. 만약 각도를 살짝 더 틀었다면 그의 귀, 잘하면 왼쪽 얼굴의 절반까지도 보여주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구도를 비틂으로써 마네가 의도한 효과는 남자 얼굴 전체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 남자의 얼굴과 표정은 마치 없는 것과도 같아서 단일하고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다. 미루어 짐작건대 마네는 남자의 존재에 대해선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여주고 싶지만 그 실체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당시 여성 바텐더들이 매춘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앞에 선 남자가 매춘을 요구하고 있고 그에 대한 반응을 그렸다고도 많이들 해석한다. 하지만 이 남자가 정말 그런 요구를 하고 있는지, 혹은 그런 욕망의 주체들을 상징하는지 알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를 대하는 여자의 표정은 명확하다. 그건 지겨움 혹은 권태로움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 앞에 서있는 남성과 폴리 베르제르 바의 모든 사람들을 아주 권태로운 표정으로 응시한다. 마네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 권태롭고 무심하게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은 마네 자신의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죽음을 마주하고 흔히들 느끼는 인생의 덧없음과 허망함이 투영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미묘하게 아래를 향하고 있는 그녀의 시선은 현실과는 조금 떨어져서 지금까지의 삶을 관망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자의 태도와도 중첩되는 지점이 있어 보인다.


흥미롭게도 여자의 뒷모습은 앞모습과 사뭇 다르다. 풍성한 꽃, 커다란 목걸이와 귀걸이, 화려한 레이스의 옷차림으로 꾸며진 앞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해진 평상복과 같아 보이고 조금은 허리가 앞으로 굽어진 일상에 지친 사람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는 더 이상 무심하고 권태롭게 앞을 쳐다보고 있는 기품 있는 여인이 아니라 남자의 시선 아래서 그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 같아 보인다. 이런 앞모습과 뒷모습의 차이에서 연속성과 순간성의 차이를 구별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뒷모습의 경우 어느 때에 봐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연속성이 있는 반면 얼굴의 표정은 순간적으로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단절성이 느껴진다. 이러한 순간성은 마네는 물론 보들레르도 찬미하던 근대적 삶의 구원적 요소였다.


어떤 친절한 악마에게 나는 감사를 해야 할까? 이처럼 신비와 정적, 평화, 향기에 둘러싸여 있게 된 것에 대해. 오, 지고의 쾌락이여! 우리가 보통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의 극도로 팽창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최상의 삶과는 아무것도 공통되는 점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이 최상의 삶을 나는 일 분 일 분마다, 일 초 일 초마다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제는 이미 분도 초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사라진 것이다. 이제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영원, 쾌락의 영원이다!

...

오! 그렇군!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폭군으로 등장했다. 이 무서운 늙은이, 시간과 함께 추억, 회한, 경련, 공포, 고통, 악몽, 분노, 신경증 등 모든 시간의 악마적 행렬이 돌아온 것이다.

맹세코 초침 소리가 이제 더욱 강하고 준엄하게 강조되어, 한 초 한 초가 시계추에서 솟아나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나는 삶이다. 견디기 힘든, 요지부동의 삶!』

보들레르, 이중의 방


이처럼 보들레르에게 권태를 극복하고 환희로 찬 삶을 영구적으로 정초할 수 있는 궁극의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오로지 순간적으로 권태를 벗어날 수 있는 취함의 순간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마네의 그림에선 오히려 이 권태를 응시하고 있는 존재가 보인다. 권태를 잊고 환희에 젖은 순간이 아니라 무의미함에 정면으로 서는 순간을 마네는 그렸다.


보들레르의 관점을 조명삼아 보자면 이 여성은 마네가 생각했던 현대 생활의 영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마네가 현대성의 영웅으로서 폴리 베르제르 바의 바텐더를 그렸다면, 아마 그가 바라보고 있는 영웅은 보들레르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간 상태일 수 있다고 짐작한다. 그녀가 어떤 면에서 영웅이라면 그가 마주하고 있고 나아가 극복하고 있는 대상은 무엇일까? 남자의 욕망, 술집에 모인 사람들의 욕망, 그리고 그 안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인생의 무의미함, 권태로움, 아마 그 모두일 것이다. 여자는 홀로 이와 마주하고 있고 그것이 이 그림에서 그의 영웅다운 위엄을 내보인다. 보들레르가 순간적으로 주어진 자유와 해방에 주목했다면 마네는 일상 속에서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권태에 마주 선 상태에 주목하고 있다.


런던 여행의 부록 삼아 적었지만 여행과의 연관성이 적지 않다. 여행의 많은 목적 중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은 중요한 목적 중 하나다. 일상적인 지루함, 권태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우연성, 순간성의 개입의 여지가 많은 곳에 놓이는 것.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서 자극을 받고, 처음 보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해지는 것. 보들레르 표현대로 말하자면 취함의 상태. 계속해서 취하고 또 취함으로써 권태로부터 도피한다. 나도 이번 여행에서 그런 즐거움을 많이 누렸다. 이런 일탈은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영화 관람이 될 수도 있고 독서가 될 수도 있고 운동이 될 수도 있고 하다못해 3분 간의 짧은 음악을 듣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잠시 일상의 고됨으로부터 벗어나 무언가에 몰입하고 몰입 속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자고로 현대인의 미덕이다.


하지만 보들레르의 현대적 영웅이 전통적 미학의 안티테제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도피는 회귀의 안티테제로서 밖에 성립되지 않는다. 보들레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 권태의 순간에 마네는 우리를 묶어 둔다. 여기에 너 혹은 나, 현대의 우리들이 있다. 자 어떻게 반응할 건가?라고 묻는 것처럼.


마네는 24살에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자 역사화가였던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서 나왔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그의 <풀밭 위의 식사>는 살롱전에서 낙선했고, 이어진 낙선전에서 어마어마한 혹평을 받았다. 그는 쏟아지는 모욕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그렸고 그 와중에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졸라와 같은 동지들을 얻는다. 이후 그는 얼마간의 인정과 명예를 얻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굽힐 줄 모르는 불굴의 영혼이 이루어낸 승리의 서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더니즘 회화의 문을 열었던 그는 무의미와 권태를 마주해야 했고 그가 그것을 극복했다고 볼 단서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했다. 그 원동력이 특유의 반항아적 기질이었든, 인정욕이나 명예욕이었든, 혹은 시대를 앞서간 자의 사명감이었든 그 무엇이든 간에 좀처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나갔다. 그가 위대한 점은 종국적인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마치 그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실패를 겪지만 또 다른 작품으로 인식론적 파열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매번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보들레르처럼 순간적 쾌락에 취함으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연속되는 시간 속에 지속되는 궁극의 이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순적인 것들의 반복 운동, 그 무한한 챗바퀴가 결국은 유일한 구원이다. 영원 속에도 영원한 것은 없다. 꾸준히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감각을 유지하고 기존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과감함을 지닌 채 무한히 그 운동을 반복해 나감으로써 권태와 무의미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 삶 자체를 즐기는 것도 목표를 이루는 것도 이념과 종교를 갖는 것도 투쟁하는 것도 결국 그 반복의 일부들이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것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작가의 이전글 런던 여행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