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

by 진아

글 쓰는 법, 시 쓰는 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다. 마음이 울렁이는 대로 흘러나오는 대로 받아 적었다. 형식은 그저 예의상 갖춰 입은 옷과 같았다. 안도현의 시작법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우연히 만났다. 책이 나를 끌어당겼다. 만날 때가 됐다고. 운명처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던 나의 세계가 쩌억 갈라졌다. 손바닥보다 작던 우물에서 뛰쳐나왔다. 부끄러웠다. 고개 들고 글이라고 시라고 우겼던 날이 부끄러웠다. 내가 알던 하늘은, 자연은, 빛깔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했다. 시의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시의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심장이 뛴다.




45p 소소한 것에서부터 삶의 기미를 포착하고 파악하는 습관을 길러라. 사물을 반듯하게 보지 말고 거꾸로 보라. 세상을 걸어 다니면서 보지 말고 때로는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라. 지금부터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던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을 선언하라.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한 순간도 미적 인식에 다다를 수 없게 된다.


51p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말라. '무엇'을 쓰려고 1시간을 끙끙댈 게 아니라 단 10분만이라도 '어떻게' 풍경과 사물을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65p 나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그런 필사의 시간이 없었다면 내게 백석은 그저 하고많은 시인 중의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의 시를 필사하면서 그를 붙잡았다. 그건 짝사랑이었지만 행복했다. 나는 그의 숨소리를 들었고, 옷깃을 만졌으며, 맹세했고, 또 질투했다. 사랑하면 상대를 닮고 싶어지는 법이다.


89p 이러한 적막을 사랑하라. 적막에 사로잡힌 적막의 포로가 돼라. 적막 속에서 빈둥거리다가 보면 문득 소란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세상의 소란 속으로 단번에 뛰어들지 말고, 가능하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라. 그러다 보면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체하기 힘든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이란 말로 표현했다. '양'이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있다. 그것이 바로 기양이다.


165p 당신은 그들을 징검돌 삼아 그들을 밟고 뚜벅뚜벅 걸어가라. 시인은 모든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이 구성할 임무를 타고난 사람들이므로.


187p 이마는 "얼굴의 눈썹 위로부터 머리털이 난 아래까지의 부분"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훨씬 뛰어넘어 나를 설레게 했다. 이마는 때로 '밝다'라는 형용사의 변형된 명사형이었고, 햇빛이 비치는 아침의 연못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찰랑이는 머리카락이었다. 언어가 아니라 마치 무슨 환상의 기호 같았다. 나는 말에 사로잡혀 말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말의 감옥 속에서 행복했으므로 거기를 벗어나기 싫었다. 나는 말이 지시하는 대로 손끝으로 또닥또닥 시를 만들 뿐이었다.


210p 당신은 머리를 굴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시를 기다리지 말라. 발명하려고 하지 말고 발견하도록 애써라. 살갗을 보지 말고 뼛속을 보라.


235p 당신은 가장 물기 많은 말, 가장 적합한 어휘를 행간에 배치하기 위해 헤매야 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언어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만날 때까지 찾고, 지우고, 넣고, 비틀고, 쥐어짜고, 흔들기를 마다하지 마라. 적어도 당신 하나쯤은 감동시킬 때까지 언어하고 치고받고 싸워라. 완벽한 세계관과 정돈된 문학적 관점이 훌륭한 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하나씩 껍데기를 벗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261p 상상력으로 승부를 걸고 싶은 당신은 체 게바라의 말을 상상력 발전소의 연료로 써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이틀을 꼬박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귀를 열고 거침없는 목소리가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 때를 기다렸다. 내가 알던 세상은 허구였다. 고리타분한 옛날옛적 이야기를 덮었다. 수많은 껍질 중 이제 하나를 벗겨냈다. 알싸하고 통쾌한 일침이 막혔던 혈을 뚫었다. 자연을 입력하고 언어를 부었으니 시가 나올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