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나고
꽃이 사라진 텅 빈 들판엔
시간의 흔적만 남았어
야생초 같은 그리움은
머리카락처럼 자라고 자라
어느새 허리까지 내려왔지
적당한 시기에 자르지 않으면
온몸을
온 세상을 뒤덮어버릴지도 몰라
몇백 년간 긴 잠에 빠진 성처럼 말이야
이름 모를 바다가, 낯선 태양이 나를 불러
두 계절을 훌쩍 넘어 달려갔지
여행자와 또 다른 여행자, 태양, 바다, 꽃, 축제,
낯선 언어로 가득한 곳에 나를 내려놓아
어떤 마법을 부린 걸까
과거와 미래도 지운채
자꾸 오늘만 살게 했지
다만 흐른다는 감각만이 간신히 나를 붙들었어
백지에 씨앗을 뿌려도
울창한 숲을 거닐어도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어
공중에 흩어지는 너를 애써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았지
민들레 꽃씨처럼 그저 흩어지도록 놓아주었을 뿐이야
꾸역꾸역 붙들고 있던 건 나였을까
낯선 땅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처럼
너는 잘도 날아가는데
고작 5시간 멀어졌을 뿐인데
우리는 거리의 낯선 점이 되고 말았어
나는 그만 아찔해져
어린 왕자처럼 눈을 감았어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조차 눈이 부셔서
공간과 계절을 뛰어넘었다. 꽃, 바다, 해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볕, 거짓말같이 자리한 사막, 별처럼 반짝이는 사람들. 나짱(Nha Trang)은 시골마을이라는데 꽃과 바다, 낯선 사람으로 가득 찬 탓일까. 매일매일이 축제의 도시 같았다. 적당한 온도의 햇살은 금세 변덕을 부리기 일쑤고 시간을 가리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은 심술궂기도 했지만 모든 순간이 닿을 수 없는 꿈같이 아득하고 매혹적이었다.
모든 날이 꿈은 아니었을까. 끄적이면 허공으로 사라지고 읽으려 하면 할수록 바람결에 흩어졌다. 글을 쓰면 펜을 뺏아 달아나고 책을 펼치면 파란 풍경이 마음을 훔쳐 달아났다.
기대했던 푸른빛은 아니었지만 한 톤 다운된 바다빛이 오히려 나짱(Nha Trang)의 진짜 얼굴 같았다. 색색의 꽃과 알록달록한 조명. 외관이 화려할수록 오히려 슬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루함과 화려함이 뒤섞인 도시는 슬픔을 감춘 채 웃는 얼굴 같았다.
낯선 현지인은 야자수 아래 무심한 돌처럼 천천히 스며들었고 이방인 대 이방인이 만난 낯섦은 익숙한 산이 되고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섬이 되었다. 날 것 같은 세상에 익숙해지면 그 낯섦조차 일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상상에 머물다 떠날 준비를 했다. 헤프게 웃고 사랑하며 그렇게 스쳐가기로 했다. 나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여행자니까. 지금은 길 위에 내려둔 어제를 데려가는 길. 찬란한 섬을 지나 내게로 돌아가는 중이다.
*** 긴 듯 짧은듯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머릿속은 몽롱하고 손끝은 녹이 슨 듯 삐걱 소리가 납니다. 천천히 일상 속으로, 소중한 글벗님께 걸어가겠습니다. 모두 평안하고 건강한 설날 보내시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