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백두산이여. 백두산은 한라산도 아니며, 설악산도 아닌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오직 하나의 산 ‘the 백두산’이다.
일찍이 고려 승 일연은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옛날 하늘의 임금 환인은 아들 환웅(桓雄)이 하늘의 일보다 인간의 일에 뜻을 두니, 아비는 아들의 뜻을 알아 ‘삼위태백(三危太白)’을 굽어보시고, 이곳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 땅이니, 내 ‘하늘과 땅, 사람’을 상징하는 인장을 너에게 주어 가서 다스리도록 했다. 환웅은 무리 3,000을 이끌고 백두산(太伯山)으로 내려와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머무니, 이곳은 신들의 마을이며 환웅은 하늘의 대왕이라 불렀다.”
백두산은 예로부터 不咸山(불함산), 單單大嶺(단단대령), 蓋馬大山(개마대산), 徒太山(도태산), 太伯山(태백산), 白山(백산), 長白山(장백산), 白頭山(백두산)으로 불리며,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여진족, 거란족도 자신의 발원지라 여겨 신성시하니, 동북아 모든 민족은 이곳이 한 구멍인 셈이다.
1809년, 한 사내(徐淇修, 1771~1834)가 조정의 당파싸움에 밀려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유배를 오니, 일찍이 손님 한 분이 찾아와,
“예로부터 이 땅에 유배 온 정승판서 중 백두산에 오른 이가 많았는데, 그대도 대택(大澤, 천지)을 바라보면서 사마천처럼 호쾌한 유람을 떠나지 않으렵니까?” 하니 벌떡 일어나 행장을 꾸렸다.
마침내 갑산을 출발한 지 7일 만에 남쪽 분수령(백두산 북한지역)에 다다라 정계비의 비문을 읽는다.
“오랄총관 목극등이 변경을 조사하라는 황명을 받들어 살펴보니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토문(土門)이라 그런 까닭으로 분수령에 바위를 깎아 기록한다.*
이때가 1712년 5월(康熙 51년 5월15일)이며, 비석 말미에 정계비를 세운 정황을 읽고 눈물짓는다. 국경을 정하여 경계를 지을 때 조선은 불과 역관 몇 명을 보내니 청의 관리 목극등이 제멋대로 획정했다고 강희제를 나무라기보다는 숙종의 무능을 개탄했다.
우리 일행 국방 동우회는 그 날랜 미니밴을 타고 굽이굽이 휘몰아치는 커프길에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듯 날아다니는 묘기에 한숨 반 기쁨 반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곧바로 천문봉을 향한다.
백두산 북파(북쪽 낭떠러지)의 정상이 천문봉(天文峰)이다. 벌써 발 디딜 틈도 없이 중국인들이 다 차지하고 있다.
중국 측 안내요원이 붉은 두꺼운 파카를 입고 허리에 안전 밧줄을 쇠줄에 걸고 경계면 너머에 서서 내가 조금이라도 사진을 찍으라 치면 “빨리빨리” 하면서 얼른 비키라고 소리친다. 어찌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움찔할쏜가? 그들은 여기서 유튜버 찍으면서 생방송 하기에 여념이 없고, 가족사진을 돌아가면서 찍느라 좋은 자리는 결코 비켜 주지 않는데, 내가 맞받아치면서 “얼른얼른”하고 응수하니 저들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는 매한가지다.
저 멀리 북녘땅 백두산 최고봉 장군봉이 보인다. 장군봉은 그 옛날 함경도절도사 윤광신(尹光莘, 1701~1745)이 이 봉우리에 올라 천지를 바라본 기쁨에 겨워 ‘술을 마시고 칼을 뽑아 창 춤을 추면서’ 자신의 벼슬 이름인 ‘병마절도사’로 봉우리 이름을 지으니 병사봉(兵使峰)이 되었다. 하지만 1963년 북한 존엄 김정일 위원장이 오른 후 이 봉우리 이름을 ‘장군봉으로 하시오’ 개명하니 장군봉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장엄하다.
아직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발길 가는 데로 바위 틈새로 천지를 쬐금 보지만 그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빠진 듯 홀황(惚恍)하다. 갑자기 찬 바람이 휭하니 분다. 아뿔싸 그렇구나. 잠시 머물렀다고 벌써 한기를 느낀다. 그 좁은 틈 사이를 빠져나와, 가져온 패딩을 꺼내입고 다시 바늘 틈조차 없는 중국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드디어 천문봉에서 가장 온전하게 천지가 보이는 곳에 이른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들이댄다. 조심조심 캐논 D90 DSLR 15-55mm 렌즈의 셔터를 누르지만, 한 화면에 다 담을 수가 없다. 천지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가슴에 다 담을 수 없듯이 카메라 앵글을 아무리 눌러봐도 다 담을 수는 없다.
세상에나!
거대한 연꽃이 피어오른 듯 수많은 봉우리가 쉴 새 없이 높고 낮은 듯 낮은 듯 높은 듯 가지런히 빙 둘러 움푹 천지를 만드니 한 손아귀에 다 담아 일만 이랑이 손안에서 너울너울 춤을 춘다.
먼 하늘에 흰 구름이 지나간다. 천지는 놀란 듯 금세 짙은 감람색으로 바뀌고 내 마음도 덩달아 어둡고 무서워진다. 바로 눈앞에 있는 푸석푸석한 황갈색 돌 사이로 타다만 검은 돌들이 천지 아래에서 물기둥을 뿜어 불기둥과 함께 날아들 것만 같다.
천지를 감싸는 수호신인 철벽봉, 용문봉, 금병봉, 제운봉, 와호봉이 땅의 어미 천지의 성질에 따라 거꾸로 모습을 담아 주었다가도 금세 삐치면 일렁이는 파도를 보내 사라지게 하니 천군만마 전쟁터 같기도 하고 한 폭의 사랑싸움 같기도 하여 움직이는 그림을 만든다.
백두산 봉우리와 천지 사이에는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온갖 기묘한 동물들이 가득하다. 어떤 것은 두꺼비이고, 어떤 것은 원숭이고, 어떤 호랑이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위로 날아오르고 아래로 처지면서 저마다 하늘로 승천할 때를 기다리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가 오른 백두산 이틀 동안 날이 맑아 하늘에 뭉게구름만 가득하니, 백번 올라야 두 번 천지를 본다는 것을, 이틀 동안 만끽하니 이날의 전설은 영원히 기억되리라.
대간의 종산인 백두산은 그렇게 한반도로 흘러 두류(지리산)까지 이어져 온전함을 유지하였으나, 유득공이 <발해고서(渤海考書)>에 제기한 의문 “어째서 우리에게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고구려 땅이다.”라고 여진에게 따지지 않은 죄를 어찌할거나? 그랬다면 “토문강(土門江) 북쪽을 다 차지할 수 있었는데” 하는 그의 한숨 소리가 천문봉 아래 끝없이 펼쳐진 원시림을 뚫고 달려드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