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
<와인이 있는 페이지>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중에 ‘돈나푸가타’가 있다. 시칠리아는 기원전 지중해 패권 국가인 그리스가 가장 먼저 포도나무를 심은 해외 식민지였다. 광활한 섬 영토에는 밀을 비롯한 곡물 생산지로 유명해서 당시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등의 강대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곳이다. 지중해가 세상의 중심이던 시절, 그 중심의 한가운데 위치한 까닭에 유럽의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었던 많은 세력이 시칠리아를 거쳐 갔다. 고대에는 페니키아, 카르타고, 그리스, 로마의 일부였다가 서로마제국의 멸망 전후에는 반달족과 고트족 등이 지나갔다. 중세에는 비잔틴 제국, 사라센이 통치했고 11세기에는 노르만이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으며 그 뒤 신성로마 제국, 프랑스 앙주家, 15세기 이후에는 스페인의 지배 아래 사백 년을 지내다가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된다. 이처럼 수많은 이민족의 지배로 점철된 시칠리아의 역사는 마치 ‘겹겹이 쌓인 크레페 케잌’의 단면처럼 복잡다단하다.
돈나푸가타 와이너리가 출시하는 와인들의 레이블을 보면 시칠리아를 거쳐 간 다양한 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돈나푸가타 지역의 로마시대 이름에서 유래한 화이트 와인 <안틸리아 Anthilia> , 아라비안나이트(千一夜話)의 ‘千一日 밤’이란 뜻의 레드 와인 <밀레 에 우나 노테 Mille e una Notte> , 아라비안나이트의 왕비 <세헤라자데> 레드 와인, 아랍어로 ‘바람의 아들’이란 뜻의 디저트 와인 <벤 리에 Ben Rye> 등이 있다. 특히 레드 와인 <탄크레디 Tancredi>와 <세다라 Sedara>는 이탈리아의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1896~1957)가 쓴 시칠리아 역사소설 《표범》의 남녀 주인공 이름 ‘탄크레디’와 ‘안젤리카 세라다 Angelica Sedara’에서 따왔다.
사진 : 시칠리아 출신의 돌체앤가바나가 디자인한 레이블과 보틀의 와인 <탄크레디>
《표범》은 1860년 이탈리아 통일운동(Risorgimento)의 가리발디가 이끄는 천 명의 민병대가 시칠리아에 상륙하던 시기에 시칠리아 토착 귀족이 겪는 혼란과 고뇌를 그린 소설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면 모두 다 바꾸어야 해요.” 시칠리아 명문 귀족 탄크레디가 反귀족세력인 가리발디가 이끄는 천인대(千人隊)의 붉은 셔츠를 입고 출정 길에 나설 때 외숙부 돈 파브리초에게 한 말이다. 탄크레디는 팔코네리 가문으로 시집가서 죽은 누이의 혈육으로 살리나 가문의 영주인 그가 자신의 자식들보다 아끼는 조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이 역설적인 문장은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돈 파브리초는 천문학에 열정을 쏟으며 사냥을 좋아한다. 귀족으로서의 권위주의적인 면과 약간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인간의 심리를 해박한 천문학적 지식으로 풀어내 그 삶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격변의 시대에 귀족 계급의 몰락을 예감하고 새로운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 질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담담하게 지켜본다. 그는 자신의 귀족계층이 쇠락해 가는 현실에 대항하기를 체념하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할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바꾸어야만 현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탄크레디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권력과 영광은 영원하지도 않고 부질없으며,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세상은 망설임이 없고 도덕심이 결여된 사람들의 것’이라는걸 뼈저리게 느낀다.
돈 파브리초와는 달리 탄크레디는 변화하는 세상에 빠르게 적응하는 현실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다. 돈나푸가타는 돈 파브리초가 소유한 네 개의 영지 중 하나인데 살리나 가문이 여름을 보내는 곳이다. 탄크레디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돈나푸가타 시장 돈 칼로제로의 딸 '안젤리카 세다라'와 결혼한다. 돈 칼로제로는 시대의 혼란을 틈타 무능한 귀족들을 이용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약삭빠르고 유능한 인물이다. 출신 성분이 미천한 돈 칼로제로는 탄크레디를 사위로 맞아들이면서 신분 상승을 하고 탄크레디 또한 그의 막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출세한 조카의 인맥 덕분에 돈 파브리초는 정부로부터 상원의원직의 수락을 요청받지만 거절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자신은 환상이 없는 사람이며, 자신을 속이며 다른 사람을 이끌 능력이 없다’며 거절하면서 시칠리아인의 속성을 냉소적으로 표현한다.
“(...) 우리 시칠리아 사람들은 너무 늙었어요 우리와 종교가 다르고 우리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통치자들에게 오랜 세월 지배를 받았습니다(...) 외부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어 들어 온 눈부시고 이질적인 문명을 우리 어깨에 짊어지고 산 지가 2500년은 되었어요(...) 내가 보기에는 휠체어에 앉아 만국 박람회에 끌려 나온 백 살 먹은 노파처럼 보여요(...) 그저 침으로 얼룩진 베게와 요강을 밑에 둔 침대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지요(...) ”라고 설명한다. 오랫동안 이민족의 식민지로 살다가 지쳐버린 시칠리아가 원하는 것은 ‘잠’이며 이제 시칠리아인이 원하는 것은 ‘잊히고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돈 파브리초는 늘 죽음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살아간다. 천문학자답게 새벽하늘에 빛나는 금성 비너스가 자기를 ‘광대한 우주와 별의 세계’로 데려다준다고 믿고 생의 마지막 날을 기쁘게 맞이한다. 삶과 죽음, 풍요와 쇠락, 전통과 변화, 지배와 피지배 계급간의 갈등이 교차하는 시칠리아의 빛과 그림자를 유려한 문체로 풀어낸 작품이다.
《표범》의 이탈리아어 제목 ‘일 가토파르도 (Il gattopardo)’는 원래 북아프리카 북단에 서식하는 고양잇과 맹수다. 작가의 출신지 람페두사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로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살리나 가문의 문장(紋章)에 그려져 있다. 이탈리아 외의 나라에서는 생김새가 비슷하고 잘 알려진 ‘표범’으로 대체 번역되어 나온 제목이다.
< 소설 속에 등장 하는 와인들>
돈나푸가타는 이탈리아어로 ‘피난처의 여인’이란 뜻으로 과거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4세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가 나폴레옹 군대를 피해 시칠리아로 피난 왔을 때 현재 돈나푸가타 와이너리가 있는 '콘테사 엔텔리나'에 머물렀던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와이너리의 이름 자체가 낭만적이고 문학적인 은유를 띠고 있다. 《표범》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레오파드》는 1963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고 2025년 3월에는 넷플릭스에서 이 위대한 역사 드라마를 절찬리에 방영했다. 《탄크레디》는 십자군 원정의 시칠리아 출신 영웅 탄크레디를 소재로 한 로시니의 오페라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표범》을 비롯해 이탈리아와 유럽의 전설과 역사, 문학 작품 등에서 와인의 이름을 가져온 돈나푸가타는 ‘지중해의 정열과 예술을 담은 와이너리’로 유명하다.
다음 문장은 이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포도주에 관한 표현이다.
“오래된 포도주 같은 부는 탐욕만이 아니라 배려와 신중함의 찌거기까지 통 바닥에 가라앉혀 버렸다.”
‘모든 것이 유지되길 바라면 모두 다 바꾸어야 한다’는 탄크레디의 말에 공감하며 돈 파브리초는 바로크풍의 팔라초가 있는 돈나푸가타 영지의 그림을 바라본다. 그림 속에는 주홍색, 초록색, 금색 마차마다 여자들로 가득하고 포도주와 바이올린도 잔뜩 실려있으며 쾌청하고 평화로운 하늘 아래 수염을 늘어뜨리고 웃는 표범이 이 모든 것을 감싸고 보호하고 있다. 지나간 여러 세기에 걸쳐 장식과 사치와 쾌락으로 바뀐 가문의 부는 포도주처럼 탐욕과 배려와 신중함의 찌꺼기까지 통 바닥에 가라앉혀 버렸다는 걸 의미한다.
“ 영주는 포도주를 여러 잔 마셨고, 지금은 마르살라 포도주가 잔에 반쯤 남아 있었다(...)"사랑하는 탄크레디를 위하여!" 그가 말했다. 이어 단숨에 포도주를 들이켰다.”
탄크레디가 전쟁터로 떠난 후, 식사 시간에 돈 파브리초 영주의 가족들이 그의 안녕을 걱정하는 대화를 나누면서 ‘럼주가 들어간 젤리 케이크’에 마르살라 포도주를 곁들여 마시는 장면이다.
세계 3대 디저트 와인으로 꼽히는 마르살라(Marsala)는 역사적으로 시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주정강화 와인이다. 와인 이름은 고대 항구도시인 마르살라에서 유래한다. 이 소설 중에는 영주와 오르간 연주자가 코르크 참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할 때 구운 닭고기와 달콤한 무폴레티를 곁들여 먹으면서 ‘보기에는 못생겼지만 맛은 좋은 인솔리아 포도도 맛보았다’ 는 장면이 나온다. 인솔리아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화이트 품종으로 마르살라 와인을 블랜딩할 때 사용하는 포도다.
“탄크레디를 사랑했다가 카브리아기와 결혼한다면 마르살라 포도주를 마신 뒤 맹물을 마시는 거나 진배없으리라”
자신의 딸 콘체타가 탄크레디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만 안젤리카와 탄크레디의 정략적 결혼을 적극추진하는 돈 파브리초. 탄크레디는 상처받은 사촌 콘체타를 위로하기위해 자신의 친구인 피에몬테 백작 카브리아기를 소개한다. 그는 잘생긴 젊은이였고 성격도 집안도 좋으며 경제력도 갖춘 최고의 신랑감이지만, 탄크레디에게 빠진 콘체타에게 그는 무색무취의 평범한 남자였다. 피에몬테 정통 귀족 출신 카브리아기는 콘체타를 ‘현실파악 못하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시칠리아 여인들’ 중에 하나라고 안타까워한다.
이 작품 속에서 마르살라는 시칠리아인에 대해 많은 것을 은유하는 와인처럼 느껴진다.
북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을 맞아가며 풍미가 짙어지고 그 고유의 향미와 분위기를 품으면서도 변화하는 척박한 환경에 유연하게 녹아있는 마르살라 와인의 정취. 지중해 한가운데서 늘 여러 문명과 운명을 맞닥뜨려온 격변 속에서도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과 문화를 간직해 온 시칠리아의 역사를 닮은 와인이다.
변화속에서 본질을 지키려면 오히려 근본적인 변화를 감행해야 한다는 소설《표범》속 메세지와 일맥상통한다.
“안젤리카는 화려한 불빛, 음식, 샤블리 포도주, 식탁에 둘러앉은 모든 남자가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호감에 취해서 탄크레디에게 팔레르모에서 벌어졌던 ‘영광스러운 전투’의 일화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영주는 돈나푸가타에서 여는 첫 만찬에 시칠리아산 와인이 아닌 값비싼 프랑스산 포도주들을 준비한다. 샤블리 와인은 프랑스 부르고뉴 최북단에 위치해 있어 추운 지방 특유의 산미가 높은 화이트 와인이다. 샤블리 고유의 크리스피한 미네랄리티와 역동성으로 그 당시 파리에서 인기가 높았다. 해마다 돈나푸가타 여름 별장에서 열리는 살리나 가문의 첫 만찬에 등장하는 프랑스산 포도주들은 돈파브리초가 부르봉 왕조의 정통혈통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미천한 출신의 돈칼로제로는 미모의 딸 안젤리카가 고귀한 혈통의 탄크레디와 혼인하는 조건으로 비옥한 토양의 밀밭 644살마와 올리브밭 180살마, 지빌돌체에 있는 포도밭을 양도한다.
밀과 올리브 그리고 포도는 지중해가 세상의 중심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칠리아와 그 역사의 궤를 함께하고 있다. 장엄하고 멜랑코리한 돈나푸가타의 표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