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기억

by 히경

전자기기의 데이터 용량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이 기록과 기억을 더 많이, 더 오래 소장하고 싶어 하는 욕구도 함께 커진 것 같다. '저장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것을 정리해 저장 공간을 확보하세요'라는 문구는 마치 집에 그득그득 쌓아 두기만 하고 더 이상 꺼내 쓰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하라는 말과 같이 느껴진다. 그 의미는 결국 '버려질 것들'이란 소리가 아닐까.


인간의 기억 저장고는 장기기억과 단기기억, 그리고 감각기억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무려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은 고화질 TV영상을 300년 동안 쉬지 않고 틀어야 하는 양... 그러나 인출(정보가 저장되어 있어도 꺼내 쓰는 인덱스를 찾지 못함)과 간섭의 문제로 기억의 한계를 느낀다. 어쩌면 기록은 그 인덱스를 눈에 보이게 저장해 두기 위함인 것 같다. 그러나 인덱스를 눈에 보이게 만들어 두었다고 한들, 과연 우리는 지난 기록을 얼마나 자주, 어디까지 멀리 들여다볼까? 그리고 그 기록으로부터 비롯된 기억이 현재의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까?


매 년마다 쌓이는 1만~2만 장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그것을 고이 외장하드에 다시 집어넣는다. 여행을 한 번 다녀오면 안 그래도 없던 저장 공간이 더 사라진다. 그렇게 외장하드에 고이 분류해 넣어둔 사진과 영상은 죽기 전에 1번 꺼내 보면 많이 꺼냈다 싶을 정도로 현실의 흘러가는 시간에 붙잡혀, 존재가 있는지도 모르고 기억에서 잊힌다.


이전엔 기록을 제한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을 빠르게 글로 남길 수도 없었고, 사진을 무한정 마음껏 찍을 수도 없었으며, 그 찍었던 사진을 무제한으로 어딘가에 넣어둘 수도 없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도 기록할 수 있으나 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가끔 기록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로는 나의 성장을 위해, 나를 돌아보기 위해이지만 깊은 동기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누군가에게 보이는, 보여주고 싶은'이야기들과 삶을 공유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 좀 봐봐, 내가 이런 글을 썼어', '이것도 봐봐, 나 이런 데 갔다 왔어 부럽지?'... 거기에 과연 얼마나 솔직한 내가 있을까. 진짜 내가 좋아했던 것일까? 진짜 내가 기록하고 싶어서 쓰는 것일까? 남들에게 보이기를 고려해 가감하지는 않았나?


주간일기라는 명목으로 잘 쓰던 블로그 글을 어느새부터 뜸하게 쓰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적는다고 생각했는데 적는 시간이 기쁘지가 않았다. 마치 쌓인 숙제처럼, 하염없이 쏟아지는 사진 앞에 나는 사진에 대한 설명과 느낌을 달아야 했다. 사실 나는 지난 기록을 잘 보지 않는다(특히 일상에 관한 것은 더욱). 요즘엔 지난 시절의 사진도 잘 보지 않는다. 외부의 정보들을 흡수할 시간도 부족하기도 하고, 이제 어느 정도 나에 대해 알기도 해서인 것 같다. 알고 있어서 되돌아보지 않아도 나아가고 있나, 적어도 지금은 그런 때인 것 같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진다. 무한정 기록의 시대,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휘발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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