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서밀 Sep 09. 2022

적벽대전의 익숙함, 생소함, 참신함

공연 <적벽> 리뷰

창작 판소리 공연 <적벽>이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막을 올렸다. 2017년 국립정동극장에서 처음으로 막을 올린 후 2020년까지 4년 연속 공연되어 이제는 국립정동극장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적벽>이 외연의 확장을 시도하고자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로 공연장을 넓힌 것이다. 이로 인해 26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공연은 이제 500명의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이날치로 국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도서 <힙하게 잇다 조선 판소리>를 읽은 후로 귀명창이 되어 보겠다는 장기적이고도 좀처럼 소소하지 않은 목표를 새롭게 갖게 된 필자 또한 지난 8월 말, 세종문화회관의 접근성으로 인해 더 쉽게 <적벽>의 확장된 외연에 닿게 된 관객 중 한 명이었다. 모처럼의 세종문화회관 나들이, 친근한 지인과의 소풍 같은 외출은 판소리 공연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기분을 한층 더 떠오르게 했다. 


오는 길에 공연 관련 정보를 찾아 읽었다. 오늘날 전해져 내려오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에서도 적벽가에 기반을 둔 공연 <적벽>은 판소리와 현대무용(심지어는 힙합, 스트릿 댄스의 동작까지!)의 만남을 주된 특징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코로나 시국 대면 공연이 어려워졌을 때 무관중 생중계 공연을 열어 공연의 맥을 이은 바 있으며 수많은 온라인 관람객을 불러모았다고 한다. 그만큼 팬덤과 대중성을 골고루 잡은 셈이다. 극장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10여 명의 군무로 이뤄질 적벽대전은 얼마나 극적일지 궁금해하며 숨을 죽였다. 


위, 한, 오 삼국이 분립하고 황금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난무한 한나라 말엽.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권좌를 차지한 조조에 대항할 계략을 찾기 위해 제갈공명을 찾아가 삼고초려 한다. 
한편 오나라 주유는 조조를 멸하게 할 화공(火攻)을 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데, 때마침 그를 찾아온 책사 공명이 놀랍게도 동남풍을 불어오게 한다. 이를 빌어 주유는 화공으로 조조군에 맹공을 퍼붓고, 조조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적벽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백만군을 잃고 도망가는 조조를 가로막는 것은... - 시놉시스 

 

도원결의


익숙함


한나라 말엽의 어지러운 형세와 조조의 권력자 등극을 소개하는 도입부를 지나고 나서, 극의 본격적인 시작은 세 의형제의 도원결의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세 의형제란 당연히 유비, 관우, 장비이다. 세 사람은 한날한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으니 한날한시에 죽겠다는 우정과 결의를 다진다. 


도원결의 다음은 책사를 잃게 된 유비가 새로운 책사로 뛰어난 인재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제갈공명의 초가집을 세 번 방문하는, 그 이름도 익숙한 삼고초려 장면이다. 자기 형님을 여러번 문전박대하는 공명에 화가 난 장비가 다혈질인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공명의 초가에 불이라도 지르려다가 형님들에게 제지 당한다. 유비는 차분하게 공명을 기다리고, 제갈량은 유비의 뜻에 감복하여 그의 책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도원결의와 삼고초려는 한국인들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이다. 시각적으로 현대화된 의복과 무대장치를 하고 있지만, 그 익숙한 이야기 속 인물들의 속성을 다시금 알아보는 몇 가지 포인트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장비를 맡은 배우는 거구인 장비를 나타내느라 팔다리를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움직였다. 성격이 불같고 급한 장비를 나타내는, 씩씩거리는 연기와 걸음걸이가 거칠다가도 익살스러웠다. 관우의 경우 그 인물의 특성을 알리는 몸짓으로 절도 있는 동작을 보였고 기본적으로 과묵했다. 또 하나 눈에 띄었던 점이 수염을 쓰다듬는 동작이었다. <적벽>의 관우는 실제로 긴 수염을 부착하지는 않았지만 고전 속 관우의 두드러지는 특징인 긴 수염을 ‘쓰다듬는 동작’으로 만들어냈다. 이처럼 익숙한 인물 묘사를 찾아보는 것이 소소한 재미를 주었다. 


한편 조자룡의 등장에서 나는 적벽대전의 앞 이야기에 익숙해서 할 수 있는 걱정을 했다. 미부인, 그리고 미부인과 유비 사이의 아이를 구하러 단기필마로 전장에 뛰어든 조자룡. 부상을 입은 미부인은 장군 혼자서는 우리 두 모자를 구할 수 없을 거라며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결한다. 그렇게 구해 온 아기에게 유비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기 때문에, 극 중에서 그 장면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질까 걱정이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적벽>은 그 장면을 굳이 재현하지 않았고, 조자룡의 유선 구출 대목은 조자룡이 자신의 주군에게 구해 온 유선을 보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런 연출은 현대의 시각이 가미된 부분 같았다.  




생소함


공연을 보는 동안 내 시선은 무대 옆에 있는 프롬프터와 무대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고전문학의 예스러운 어휘들, 낯선 지명과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가사가 잘 들리지 않을 때면 꼭 프롬프터를 확인해야 했다. 언제 익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행히 주요 인물들을 부르는 여러 호칭을 알고 있던 것과 프롬프터 자막의 도움에 힘입어 잘 듣지 못했거나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을 채워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내용적인 생소함도 있었다. 나의 경우 조자룡의 유선 구출 장면 후와 적벽대전 사이에 있는 크고 작은 갈등들이 다소 낯설었다. 적벽대전의 이야기에서 대중적으로 자주 접하는 부분들은 쉽게 기억하지만 더 세부적인 이야기, 중간 다리 같은 이야기들은 귀에 익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배우들의 열연과 매끄러운 장면 전환, 중간중간 들어가는 유머로 인해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 있었다. 


판소리 적벽가를 일부라도 들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백만 대군을 잃은 참패 이후 남은 군사들을 모아 인원을 확인하는 ‘군사점고’ 장면 역시 처음 접했다. 골내종, 전동다리 등 군사점고에서 불리는 이름들은 낯설었으나 군사를 수없이 잃고도 남은 군사들조차 소중히 대하지 않는 비정하고 무능한 상관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을 법했다. 그리고 그런 상관에게 대들기 시작하는 병사들의 모습도 아주 낯설지는 않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군사점고’ 대목이었지만 전쟁의 다양한 면면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정서를 자극 받기도 했다.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생소한 표현을 만날 수도 있는 고전에 기반을 두었어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흥미로운 전개와 쩌렁쩌렁한 판소리 합창을 선보이는 배우들의 열연은 관객의 집중력을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참신함


군사점고 이야기를 하니 그 대목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적벽> 무대의 뒤편에는 국악기와 드럼 등으로 구성된 연주 세션이 있었다. 처음으로 호명된 병사는 죽었다고 나오는데 그럼 죽어서 어떻게 됐냐는 조조의 반응에 스포트라이트가 밴드 세션에 비춰졌다. 처음으로 호명된 병사는 북을 치던 고수였던 것이다. 고수가 천사 링을 머리 위에 들고 무대 위의 배우들과 재치 있게 대사를 맞추는 부분은 소리꾼과 고수로 이뤄진 판소리의 원형을 연상시켰다. 앞으로 펼쳐질 군사점고의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예고하기도 하는 이 참신한 장면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고 격한 전투가 있었던 직전 장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크고 작은 전투가 여러 번 있기 때문에 지형지물이 자주 바뀌어야 하는데 무대 구성을 아예 백색에 단순한 구도로 잡은 것이 효과적이었다. 온통 하얬던 무대는 상황과 장소의 변화를 알려주는 영상물을 틀기에 좋은 스크린이 되었다. 겉보기에 단순한 구조의 무대 구성은 영상과 합쳐져 다양한 지형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판소리 합창, 판소리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뮤지컬 같은 구성, 영상의 활용 외에도 이 공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부채의 활용이라 할 수 있겠다. 전쟁물에서 시각적으로 다양한 지형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소품의 필요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데 무대를 단순화하여 활용한 것과 더불어 <적벽>은 소품의 문제를 부채로 해결했다. 본시 소리꾼과 고수 두 사람만으로 진행하는 판소리에서 부채는 소리꾼이 적재적소에 다양하게 활용하는, 이른바 예술적인 무기였다. <적벽>에서 부채는 검이 되기도 하고, 검을 막는 방패가 되기도 하며, 활이 되기도 한다. 화공을 펼치는 장면에서는 붉은 부채로 불을 암시하기도 하고, 군무 장면에서 서로 다른 색의 부채로 각각의 편을 상징하기도 했다. 


무기 뿐만 아니라 다른 일상적인 사물을 대리하기도 하고 부채를 쥔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조조가 옛정에 호소하며 자신을 놓아주길 관우에게 읍소하고 있을 때, 조조의 달변을 듣는 관우의 심리적 동요를 나타내듯 관우가 쥔 부채가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곤 했다. 소리의 맺고 끊음, 강조, 가사 중의 중요 사물을 나타낼 때 쓰이던 소리꾼의 부채는 10여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이 극에서 더 다양한 쓰임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참신하게 다가왔다. 


한편 내가 본 회차의 공연에서 제갈공명, 제갈공명의 동자, 조자룡, 주유 등의 인물을 여성 배우가 연기했다. 알고 보니 <적벽>은 젠더프리 캐스팅을 한 공연이었다. 장비가 더블 캐스팅이어서 다른 회차에서는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장비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고전을 다시 영상화하고 공연으로 올리는 과정에서 배역이 특정 인종과 성별에 한계 지어지는 점이 비판을 받고는 한다. 사회의 주된 계층과 그 사상을 조명하는 역사물, 게다가 전쟁을 다루는 역사물인 삼국지에서 여성이 맡을 수 있는 배역은 남성이 맡을 수 있는 배역에 비해 너무나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적벽>의 젠더프리 캐스팅의 취지에 동감하는 바이며, 젠더프리 공연을 처음으로 보게 되어 신선했다.  


젠더프리 캐스팅을 했던 조자룡

 

고전의 익숙함을 알아보는 소소한 재미와 많은 인원의 판소리 합창, 군무 같은 화려한 재미가 있는 공연이 <적벽>이었다. 극장을 나오며 4년 연속으로 무대에 올려지고 국립정동극장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이 되었다는 점이 이해가 갔다. 고전 어휘나 감정선의 생소함도 연기와 여러 연출적인 장치들로 관객이 쉽게 따라갈 수 있게 했고, 쉬어가는 장면에서 유머 코드를 넣거나 요즘의 변화하는 가치관을 반영하는 점도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을 나와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 고개를 돌리면 조명 빛을 받고 있는 세종대왕 상과 그 뒤로 광화문이 멀찍이 보였다. 전통이 적절하고도 흥미롭게 현대화된 공연을 보고 난 직후에, 전통과 현대가 맞물려 있는 이 대로에 낮보다 고요하게 서 있는 시간이 공교롭고도 고즈넉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자람의 자람을 거울로 삼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