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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Apr 28. 2022

어쩔 수 없는 인생, 별 수 없이 자유로운 깽판!

창작 연희극 <딴소리 판> 리뷰

몇 해 전 씽씽과 이날치 같은 퓨전국악 밴드의 노래에 빠진 뒤로 전통과 현대를 합친 퓨전 콘텐츠, 그리고 한국의 갖가지 예스러운 것에 깊은 흥미가 생겼다. 최근에는 전통무의 요소를 차용하여 재해석한 현대무용 공연을 보고 오기도 했다. <딴소리 판>을 향유한 이유도 이런 관심사의 연장선 안에 있었다. 


<딴소리 판>은 ‘판소리 다섯 마당 속 판을 깨고 비틀며 깽판 치는’ 창작연희극이다. 연희극이란 ‘춤과 노래가 곁들여지며 관객과 소통하는 극 형식의 종합 예능’을 말한다. 


공연 설명을 읽으며 몇몇 부분이 눈에 띄었다. ‘판소리 한 대목을 뽑지 않고 다섯 마당을 모두 활용했다.’ 흠, 그럼 창을 아예 안 한다는 건가? 캐릭터들의 대사와 몸짓만으로 구성한 연극인가? 


막상 공연을 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판소리의 필수 구성원인 소리꾼과 고수가 무대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리꾼은 공연의 가수이자 사회자이자 연기자로, 소리로 극의 흐름을 맺고 끊어주고 배경 설명을 해주는가 하면 각 판소리 마당의 주요 역할을 여럿 연기하기도 했다. 판소리 한 대목을 뽑지 않는다는 말은 판소리 마당의 주요 대목이 펼쳐지려 할 때마다 거지들이 판을 깨버린다는 걸 의미했다.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그리고 흥보가. 학생일 적부터 한국의 판소리 다섯 마당으로 익히 들어온 이름들이다. <딴소리 판>에서는 차례로 하나씩 그 견고함이 깨질 옛 가치관을 담은 전통인 동시에, 묘하게 현대인의 시각과 언어 표현을 반영한 거지들이 누비고 다닐 현장이다. 


사실 판소리는 항상 ‘그 시간 그 장소’의 관객들과 소통하는 예술이었기에, 지금의 관객을 위해 현대적 시각이 들어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소리꾼의 소리와 고수의 장단, 거지들의 입담 속에서,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다섯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녹아든다. 


첫 시작은 춘향가이다. 원래라면 암행어사 출두 대목이 나올 장면에 거지들이 난입한다. 그 무리를 암행어사와 역졸인 줄 오해하여 놀란 사람들이 도망치고 춘향도 얼떨결에 옥에서 나온다. 그러나 춘향이 만난 몽룡은 역도로 몰려 집안이 망해 가진 것 없이 거지가 된, 암행어사가 아닌 아맹거사. 연인 몽룡이 거지로 나타나 사랑도 잊고 밥 구걸이나 한다. 무려 춘향가에서 사랑이 밥에 밀리는 것이다! 기가 막힌 춘향이 몽룡에게 이리 된 연유를 묻자 거지 무리의 끼니를 찾는 여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잔치판을 다 깨고 다닌 이야기를 해준다.  


2장은 심청가를 배경으로 한다. 황후가 된 심청이 아버지 심 봉사를 찾기 위해 연 전국봉사대회에 거지들이 밥을 얻어먹으려 봉사 행세를 하고 들어간다. 그것이 발각되어 쫓겨날 무렵, 덜컥 공양미 삼백 석을 약속한 심 봉사를 탓하고 그런 사람 찾아서 무엇하냐 푸념했다가 효도 자체의 부질없음을 논한다. 그러다 잡혀서 벌까지 받게 생겼으니 잔치를 깽판 놓고 거지들은 혼란한 틈을 타 도망간다. 


소문난 잔치에 얻어먹기는커녕 힘만 빼고 온 거지들은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조조군에 들어간다. 입대를 회유하는 여러 가지 알량한 혜택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입대하면 밥을 준단다. 이번에도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밥이다. 군인이 되었으니 싸워야 할 터인데, 훈련도 받지 않은 거지들은 오합지졸일 뿐이다. 전장을 앞에 두고 거지들은 각자 알아서 잘 살아남자는 각자도생의 결의를 한다. 의리 넘치게 한날 한시 같이 죽자는 도원결의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이후 적장인 제갈공명과 마주치는데, 대의와 명분을 부르짖는 공명 앞에서 거지들은 자신들의 엉망진법을 한 수 가르쳐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먹을 밥도 없는 거지들 앞에서 대의와 명분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판을 깨고 다니는 역할이 하필 집도 절도 없는 거지인 데에는 이런 연유도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이 없기에 책임도 없다. 비록 원해

서 얻은 게 아니더라도, 대의와 명분을 걸리는 것 없이 비꼴 수 있는 자유로움은 거지들에게 있다.  


춘향과 심청의 이야기, 전쟁 이야기가 이어지는 시공간에 있는 양 그려진 것이 유머러스하게 느껴진 관객이라면 다음 배경에서 더 황당한 재미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인간 거지들이 밥을 찾다 찾다 바다 아래 수궁의 축성을 축하하는 연회에까지 찾아간다! 여기서는 나름 공연을 하고 돈을 벌겠다는 포부로 장비까지 돈 들여 마련해왔으나 웬걸, 너희 때문에 수틀렸으니 인건비를 주지 않겠다는 갑질을 당한다. 그런데 마침, 술병으로 간이 상한 용왕의 상태를 살피는 자라를 꾀어 자기들이 치료약을 만들 수 있다고, 비용은 이 정도 든다고 꼬드기기 시작한다. 


용왕에게 팔 약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약을 판’ 거지들이 다음에 만난 이는 흥보가의 흥부이다.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키운 박에서 팔자를 펼 만한 게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흥부는 박을 탄다. 그러나 박에서 나온 것은 재물도 밥도 아닌, 우리의 거지들. 그들은 흥부의 소원을 들어주지는 못하고 ‘들어’주기만 한다. 박에서 재산이 나와봤자 형제 간에 유산 싸움이나 날 뿐이라며 약을 올린다. 


거기에 가난한 흥부에게 밥까지 구걸하니 환장한 흥부가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대거리를 한다. 거지들은 흥부를 흰 천에 싸서 상여처럼 들고 장례를 치러주고 흥부는 ‘아니, 저기’ 하면서 당황하는데 여기서 모든 관객이 웃었다. 죽겠다 싶어도 목숨은 순간 미련 그득한 것이다. 먹고 사는 게 괴로운 이유다. 엉터리지만 상여 노래를 부르면서 아련히 멀어지는 느낌을 연출하며 다섯 개의 판소리 대목이 다 끝남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모든 난장은 결국  몽룡이 춘향에게 들려준 그간의 곡절이다. 이야기는 다시 춘향과 몽룡의 현재로 돌아가 수미상관 구조를 취한다. 춘향은 몽룡을 따르거나 탓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을 나그네가 되어 세상 구경이나 더 하려오.’ 춘향도 목숨 걸고 희망하던 미래가 다 깨져버린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으로 혼자만의 앞길을 새로이 택하며 막이 내린다.  


극의 마지막인 춘향의 선택에서 극 내내 몽룡과 다른 거지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거지 거지 그런 거지 인생사 그런 거지.’ 이미 어그러진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인생은 결국 그런 거지. 그렇게 깨지는 것 중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예전에 중히 품고 있던 모종의 가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먹어야 하는 입과 채우지 않으면 주린 배가 있으니 살아가야 하는 거지. 도저히 어쩔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어쩔 수 없기에 자유롭게. 


그러나 사랑과 효, 의리 같은 가치가 정말로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다 보면 그것이 평생을 지탱해준다는 보장은 없어도, 인생의 어떤 기간을 빛나게 해주고 버티게 해주지 않나. 다만 그 가치의 절대성이나 당위성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전의 가치관에서 무엇이 시대착오적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살아 있는 한 영원한 문제이며 가장 본질적이어서 괴롭기까지 한 먹고 사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인생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살려면 우리는 몸에 안 맞는 옷은 개켜두고 고쳐 입을 수 있는 옷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판을 깨는 일이 되더라도. 딴소리로 판을 깨도, 결국 순간에 몰입하면 또 다른 판이 펼쳐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 머리 아프고 살기 바빠 등한시하기 쉬운 과정을 예술로 응집하고 해학으로 즐길 수 있음 또한. 깨야 할 생각과 계속 이어갈 가치, 그것을 고전을 유쾌하게 재해석하며 감상자로 하여금 생각할 기회를 얻게 하는 것. 고전 속 가치관을 돌아보는 한편, 예술의 효용과 쾌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재미있는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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