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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Sep 19. 2023

고수 이향하의 지금이라는 물결

내가 사랑하는 풍경의 지류를 타고, '고수 이향하의 지금'이라는 물결로


1. 내가 사랑하는 풍경의 지류를 타고


 선율의 뜻은 ‘소리의 높낮이가 길이나 리듬과 어울려 나타나는 음의 흐름’이다. 한 음과 다른 음 사이의 흘러감이 악보 위 새겨져 있는 음표들을 살아있는 음악으로 만든다. 연주 혹은 가창이 끝나면 음 역시 더 흐르지 않고 멎는다. 그래서 음악은 본질적으로 고정이 불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음원 스트리밍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한 번 한 번의 연주와 가창은 저마다 다른 것이다. 미술과 음악을 비교해 보면 음악의 매체적 특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명화 한 점이 세계 각지의 전시장으로 옮겨 다니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동일한 한 점이 품은 아름다움을 전달할 때, 음악회에서 연주되는 클래식은 동일한 레퍼토리라 할 지라도 라이브 연주가 행해지는 시간과 장소, 연주자와 관객에 따라 늘 조금씩 달라진다. 


 예술은 시대와 지역에 따른 양식의 변화를 거치며 각각의 분야마다 역사(미술사, 음악사 등등)가 마련될 정도로 발전하고 축적되어왔다. 인간 세상살이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예술도 흘러온 것이다. 그렇다면 흐름의 성질을 더욱 강하게 가지는 음악은 어떻게 변해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까.  


 너무 거대한 질문을 마주하니 그 답을 찾기는 커녕 짐작도 못 해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음악의 많고 많은 갈래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곡, 좋아하는 장르를 타고 타고 넘어가다 보면 변화의 결 중에서 하나쯤은 흥미롭게 감각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풍경의 지류를 타고 그곳에서부터 큰 물로 노를 저으면 예술이라는 강의 본류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듯이.  


 내 경우에는 퓨전 국악의 현재와 가까운 미래가 궁금했고, 퓨전 국악 노래들을 통해 그 예술의 바탕이 되는 국악의 요모조모를 알아가고 싶다는 지적 욕망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우리 음악의 지금'을 보여주는 수림뉴웨이브 예술 축제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자연히 평소 음악에 대해 갖고 있던 흥미가 자극되었다.  


 수림뉴웨이브는 전통 창작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수림문화재단이 그들의 작업을 매년 공연의 형식으로 선보이는 예술 축제이다. 이 예술 축제는 매번 새로운 주제를 내걸어 왔지만, 올해의 경우 작년인 2022년 수림뉴웨이브 참여 예술가들로 라인업을 구성하여 그들이 만들어가는 음악의 지금을 주목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2023년 수림뉴웨이브의 주제는 그 뜻을 강조하듯 'Re:Wave'이다.  


 올해 공연은 9월 5일부터 9월 9일까지 진행되었다. 필자가 관람한 공연은 수림뉴웨이브 예술 축제의 마지막 날 공연인 <이향하 소품집 1>이었다. 2022년 수림뉴웨이브 수상자인 이향하는 판소리의 고수이자 타악연주가이다.  


 고수 이향하를 소개하는 글을 읽으며 과연 소리꾼도, 다른 국악기 연주자도 아닌 판소리 고수의 첫 번째 소품집이란 무엇일까 하는 궁금함과 흥미가 일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새로움을 만날 수 있을까. 자연히 생겨나는 기대감은 덤이었다.   


고수 이향하

 

 

2. 고수 이향하의 작품 세계 

 

 고수 이향하의 첫 번째 소품집 공연에서 판소리 <긴긴밤>의 눈대목, 거문고 연주자 최진아와의 협연, 그리고 옛 시조를 재해석한 정가 등을 만날 수 있었다. 


 판소리 <긴간밤>의 원작은 동명의 도서 <긴긴밤>(루리 글 그림, 문학동네)으로, 고수 이향하는 이 책을 읽고 감명 받아 직접 판소리를 작곡했다고 한다.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의미도 깊은 작품이라기에 언젠가 꼭 읽어봐야지 했던 책을 판소리로 먼저 만나게 된 셈이다. 


 <이향하 소품집 1>은 한 시간 가량의 짧은 공연이었기에 판소리 <긴긴밤>은 이야기 전부가 불리지는 않았고 눈대목을 위주로 공연되었다.  


 공연 전부터 눈대목이라는 생소한 표현에 눈이 갔었다. 뜻을 찾아보니 판소리에서 눈대목이란 '소리꾼이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 한다. 판소리는 창(노래)과 아니리(말)로 구성되는데, 작은 노래들이 여럿 들어가며 이야기의 국면에 따라 대목이 생긴다. 그 중에서 서사 상 중요한 장면, 작품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 장면을 담은 대목들이 중요하게 인식된다고 한다.  


 다음은 눈대목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설 일부이다.  


 (...) 그 가운데는 사건의 전개과정이나 핵심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는 대목이 들어있다. (...) 그런 가운데서 소리꾼들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을 ‘소리의 눈’ 또는 ‘눈대목’이라고 한다. ‘눈대목’은 문학적 구성에서도 있을 수 있고, 음악적 짜임에서도 있을 수 있다. 한 대목 가운데도 ‘눈’ 부분이 있을 수 있고, 한 바탕 가운데 ‘눈대목’이 있을 수도 있다. ‘장단의 눈’이라는 말도 사용된다. 또한 연주자나 감상자에 따라 ‘눈대목’을 달리 인식할 수도 있다. (...) 그러므로 ‘눈대목’은 예술적 기법이 가장 잘 드러나거나 정서적으로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 ‘눈대목’에는 실제로 판소리의 모든 문학적·음악적 기법이 농축되어 있으므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눈대목 항목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513)


 뮤지컬로 치자면 작품명을 듣자마자 곡의 클라이막스 부분이 떠오를 만큼 대표적이고 대중적인 넘버가 판소리의 눈대목에 해당하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해 보았다. 


 고수 이향하의 <긴긴밤> 눈대목을 감상하며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우선 고수의 역할이 내가 알던 것보다 크고 다양해졌다는 것. 소리꾼의 옆에서 소리북을 두드리며 추임새를 넣는 모습이 고수의 전통적인 모습이고 곧 내 머릿속 고수의 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판소리에서 창작자의 역할이 어느 한 사람에게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다.  


 고수가 소리북 뿐만 아니라 서양 악기를 포함한 훨씬 다양한 악기를 다뤄 소리에 녹여낼 수 있으며, 소리꾼과 배우가 협연을 하여 더욱 연극적인 판소리 공연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것도 새로 알았다.  


 판소리에 배우 이상홍의 연기가 가미되며 소리꾼 이승희의 움직임도 얼마나 다양해지던지. <긴긴밤>의 소리꾼과 배우는 고독감이나 교감, 상호의존의 감각을 두 사람의 전신으로 연출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알의 박동을 표현하는 등 섬세한 손끝이 두 사람이 맞춘 호흡으로 전달되는 느낌이 좋았다. 창극이 아닌 판소리에서 이 새로운 조합의 시너지를 보는 재미가 톡톡했다.  


 사실 현대에 와서 온갖 융합이 일어나는 만큼 한계가 어디 있으랴 싶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그런 융합의 현장을 볼 때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주제의식 면에서도 변화의 물결이 보였다. 판소리 <긴긴밤>에는 현대인 창작자가 추구하는 바가 들어가 있었다.  


  <긴긴밤>이 동물이 주인공인 점에서 판소리 <장끼전>이 떠오르기도 했다. 판소리로 전해지다 나중에 문학으로도 기록된 <장끼전>은 그 시대 과부의 개가 금지라는 화두를 서민의 입장에서 풍자했다.(<긴긴밤>은 책에서 시작된 판소리이니 이 관계 또한 재미있다) <장끼전>에서 인간들의 문제가 의인화된 동물들로 표현되고 그들의 발화를 통해 나름의 답 혹은 현실에 대한 판단을 찾았다면 판소리 <눈대목>은 또 다른 점이 있다. 예컨대 동물들의 의인화를 통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동물 캐릭터들 본인의 목소리와 서사를 통해 우리가 자연에 입힌 해에 대해 돌이켜 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종으로 태어났으나 가족이 되어가는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보기도 한다. 


 코끼리들의 보호 속에서 자라나고 숲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지만 여러 고난 속에서 혼자가 된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그런 노든의 품에서 태어난 어린 펭귄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자니 절로 눈가가 젖어들었다. 노든의 가족을 무참히 앗아간 존재는 바로 인간들이었고, 그들과 같은 종인 나는 현실의 모든 ‘노든’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학생일 적 교과서로 판소리나 옛 문학에 대해 배울 때 작품의 어떤 부분이 세태를 풍자한다거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도 받아적었더랬다. 그래도 역시 현대인의 관점에서 현대의 문제와 현대인 창작자의 가치관이 바로 들어간 공연을 보는 것은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시의성이 들어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하고 실감하게 되었다.     


 판소리의 전통적인 형식과 기법도 살아있으면서 새로운 화두와 새로운 악기를 투입하고 새로운 형식을 개발하는 것. 이런 게 또 우리 음악의 새로운 물결이구나 싶었다.     


 <긴긴밤> 눈대목이 끝난 후 관객들은 거문고 연주자 최진아와 고수 이향하가 협연으로 들려준 <빛 자국> 외 한 곡, 옛 노래를 재해석한 정가 <임그린 상사몽이>를 관련 영상과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     


 <빛 자국> 역시 고수 이향하의 창작곡이다. 이 곡에서는 거문고 선율이 연주되는 한편 양금 소리가 어우러져 두 소리가 서로의 자국처럼 따라 붙었다. 그리고 연주자 뒷편의 스크린에는 이 곡에 붙인 영상이 틀어졌는데, 이는 해외 댄서가 곡을 춤으로 해석한 댄스비디오였다. 이미 전통과 현대가, 그리고 동서양 악기가 접목된 곡인데 여기에 또 다른 문화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합쳐지며 창작자들의 탐험심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정가 가창자 지민아가 부르는 <임그린 상사몽이>를 들을 때는 현대의 국악 노래를 들으며 옛 시의 감성과 독특한 발상 또한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퓨전국악 자체를 사랑하는 나지만 이를 통해 전통을 알아가는 것 또한 이 사랑의 묘미이므로.  



 수림뉴웨이브가 우리 음악의 지금이라는 물결을, 쉼 없이 변화하는 지금을 보여주고자 하는 만큼 문화와 물결에 대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변화의 동적인 속성과 물의 흐르는 성질 간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길게 생각한 한편, 아주 오래된 말이 연상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만물유전을 주장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 같은 것이다.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이 변화하는 앞날의 하루하루를 속속들이 알아챌 수가 없지만 변화하는 지금에 온전히 몸을 담글 수는 있다. <고수 이향하 소품집 1>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감상자를 우리 음악의 변화라는 물결에 초대했고, 관객들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껏 몰입했다.  


 이날의 공연 관람은 예술의 강과 바다라는 너른 세계에서 물결에 그저 휩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헤엄치며 직접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들과 함께 잠시나마 같은 강물에 있어서 행운이었던 시간이었다. 그들의 모험심과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예술 탐구의 여러 시도들을 응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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