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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Dec 10. 2023

섬과 섬 사이 다리를 내어주오

권아람 감독 영화 <홈그라운드>(2023) 시사회를 보고 

1. 세상에 연애가 넘쳐나


유치원생 즈음의 어린아이들은 소꿉놀이만 할 것 같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이른 나이에 어른들의 연애란 걸 흉내내기도 한다. 소꿉놀이와 연애 흉내 둘 다 사회적 역할극이지만 소꿉놀이는 놀이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후자는 좀 더 일상 속의 역할놀이라는 차이가 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여아 몇 명만 있던 교실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남자애를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딱히 누굴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도 다른 친구들과 비슷한 대답을 해야할 것 같아 같은 반 남아 중 한 명의 이름을 얘기했다.


그때의 일련의 일들은 다소 기묘한 기분과 함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또래 집단의 대화에서 빠지고 싶지 않아 너무 당연히 같은 반 남자애의 이름을 말하던 내 모습. 고작 유치원생의 나이.


애초에 연애 감정이 뭔지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지만, 우리는 모방이라는 본능을 가진 어린 인간 답게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을 흉내냈다. 그러니까 이성애 연애 관계를 따라했다.


70년대 명동 샤넬다방의 재연


2. 보이지 않았던 관계들


사실은 어릴 적 봤던 만화에도 이성애 외의 관계가 존재했다. 다만 몰라서 안 보였고, 그 모름은 편집이나 검열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중고등학생 쯤 되어 보니 <카드캡터 체리>에서 도진이와 청명이는 누가 봐도 좋아하는 사이였으며, <달의 요정 세일러문>에서 세일러 우라노스와 세일러 넵튠은 더 직접적으로 동성 커플로 나온다. 한창 세일러문을 본방 사수하는 꼬마 시청자였던 나와 친구들은 우라노스가 남자이다가 변신을 하면 여자가 되는 줄만 알았다.(우라노스가 남자일 거란 생각은 순전히 우라노스의 변신 전 사복 차림에 대한 어린아이들의 편견에서 왔다. 우라노스는 늘 낙낙한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이성애 관계 외에서 생겨나는 호감이나 교제는 쉽게 우정으로 덧그려졌고, 혹자는 아이들이 그렇게 읽기를 바란 것 같다.


다시 세일러문의 예를 들면, 특정 시리즈 메인 빌런의 부하 중에는 게이 커플이 있었다.(사실 세일러문 시리즈에는 비중 있는 퀴어 캐릭터들이 더 있다) 그런데 국내 방영할 때는 일부러 대사를 바꿔 그 관계성을 지워버렸다고 하니, 어떤 캐릭터의 퀴어성을 읽지 못한 원인이 꼭 시청자의 편견에만 있지는 않은 것이다. 


어릴적 친구들에게 좋아하는 아이에 대한 말을 꾸며낼 때, 내 마음은 묘한 상태 였지만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지하게 연애 감정을 가질 수 있는 나이조차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같은 반 친구 중에 여아의 이름을 댔다면 내게 아무 질문이 없이 대화가 다음 친구의 차례로 넘어갔을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관계를 막 배워나갈 때의 우리가 다양한 관계의 존재를, 그리고 사랑의 다양한 가능성을 어른들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어떤 관계는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동성애를 사랑이 아닌 우정이나 동료애 등으로 치부하고 규정지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동성애를 아예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며, 실제로 그런 혐오는 비일비재하다. 


이런 배경에서 자기 자신, 혹은 가까운 사람의 정체성이 퀴어임을 알게 된다면 그 정체성을 수용하고 프라이드를 가지거나, 갖도록 격려하는 일이 과연 순탄할까? 


과정의 순탄함을 논하기에 앞서 당사자는 심한 고립감을 느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나 뿐인가, 하는 외로움. 나를 드러내면 위험해질까, 불이익을 당하진 않을까, 저절로 고민하게 되는 괴로움. 


정체성을 패싱하면 그 순간 자신을 백안시하는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 있겠으나, 스스로 자신을 부정한 듯 하여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일까지 피하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퀴어들에게는 공간이 필요하다. 


안전하여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3. ‘퀴어의 방’을 넘어 레즈비언 커뮤니티 공간으로 


권아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홈그라운드>(2023)는 한국 레즈비언의 문화사를 아카이빙한 최초의 영화다. 더 파고들어 가자면, 한국 레즈비언의 문화사 아카이빙이자 그들이 모여 교류한 공간의 역사 아카이빙이다. 


안전이 보장되면 가장 날것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 중에 ‘방’이 있다.우리는 방 안에서 피로를 풀 수 있고, 취미나 자기 계발을 통해 ‘나’를 형성한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방 안에만 있을 수는 없다. 돈을 벌거나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사람은 다시 방 밖으로,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의 자아상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더욱 정교해진다.


권아람 감독의 관심이 전작 <퀴어의 방>(2018)에 나오듯 ‘퀴어의 방’에서 한국 레즈비언들의 교류 공간으로 확장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일-특히 의식주-은 누구나 매한가지인데, 어떤 집단과 그 집단이 일군 공간은 가치 있게 기록되지 않는다는 점.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들어오기 전인 1970년대에도 ‘치마씨’, ‘바지씨’라는 은어로 서로를 칭했던 레즈비언들은 명동의 ‘샤넬다방’에 모였다. 샤넬다방 안에서는 여성이 수트를 입고 다른 여성에게 호감을 표현해도 혐오감 어린 질문을 받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옷차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위협당하지 않았다. 여성을 사랑하는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이 안전한 공간에 모여 교류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여성 성소수자들의 기념비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었던 샤넬다방은 공권력의 개입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70년대 한국사회는 샤넬다방을 퇴폐 공간으로 낙인 찍었고 급기야 샤넬다방 방문자들을 연행했다. 


그러나 수면 위로 던져진 돌은 그냥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파문을 일으킨다.  



샤넬다방을 방문함으로써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은 사람 중에는 명우 형이 있다. 자신을 ‘이모님’이 아니라 ‘명우 형’이라 부르라며 호탕하게 웃는 노년의 성소수자 윤김명우. 그는 퀴어씬의 주요 인물이자 국내 최초 레즈비언 바(bar) ‘레스보스’의 운영자다. 사포가 살던 섬의 이름을 따 온 ‘레스보스’는 1996년 오픈해 현재까지 이태원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레스보스의 성황 이후로 서울에는 여러 레즈비언 커뮤니티 공간들이 생겨났을 정도다.  


직접 요리를 하고 손님을 맞으며, 비록 장소를 옮기더라도 ‘레스보스’를 유지하는 명우 형. ‘레즈비언한텐 불모지였던’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의 신념은 ‘술 한 잔을 마시더라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레즈비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권아람 감독은 그런 명우 형의 과거와 현재를 이음매 삼아 70년대 ‘샤넬다방’과  90년대의 ‘레스보스’를, 그리고 또 현재의 ‘레스보스’를 소개한다. 관련자들의 인터뷰와 재현 영상이 과거 공간들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한편 성인에 비해 경제력이 약한 청소년 레즈비언들은 자신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공원을 활용했다. 2000년대 10대 레즈비언이 모여 자기만의 문화를 만들어나갔던 ‘신촌공원’이 바로 그곳이다. 


2000년대 신촌공원의 재현


성인은 물론 청소년 레즈비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볼 수 있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 공간에 이르기 전까지 그들의 고독감이 얼마나 진했는지 또한.


그러니 자신이 온전하게 수용되는 집단과 공간에 향한 열망을 누가 꺼트릴 수 있을까? 


당연히 열망은 전소시킬 수 없다. 그러나 물리적인 공간은 특정 상황에 닫힐 수가 있고, 공간 유지에는 경제적 비용과 상상 이상의 노고가 요구된다.  



4. 더 취약해질 수 있는


이후 영화는 명우 형을 퀴어씬의 ‘선배’로 여기는 후배 성소수자들의 커뮤니티 또한 조명한다. ‘퀴어 페미니스트 댄스 공간’임을 표방하는 ‘루땐’에서 성소수자들은 춤 연습을 하고 춤 수업을 열기도 한다. 그들은 루땐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존감을 키우고 자기 몸을 긍정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루땐 운영진은 퀴어에게 더욱 가혹했던 앞선 시대에서부터 레즈비언 커뮤니티 공간을 일궈 온 명우 형과 같은 선배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들 역시 공간 유지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70년대 명동의 샤넬다방이라는 공간이 공권력에 의해 힘을 잃었다면, <홈그라운드> 촬영 당시 퀴어 커뮤니티 공간들에 닥친 가장 큰 어려움은 코로나 19였다. 


시국의 극심함에 따라 다인원 집합이 금지되고 공간의 성격 별로 운영이 제한되었다. 루땐과 레스보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나마 춤 수업은 비대면 온라인 수업으로 조금이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으나 식음료를 파는 공간인 레스보스에게는 더욱 힘든 시간이었다. 


코로나 시국 동안 의료, 주거, 경제 면에서 취약점이 있는 사람들은 더 취약한 상황에 놓였다. 이것은 정체성의 면에도 적용되었다. 팬데믹 시기, 퀴어 커뮤니티 공간이 닫히는 상황은 퀴어들에게 일상의 불편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사회적 고립감을 겪어야 함을 의미했다. 그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예기치 않은 시국 전부터,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충분히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퀴어 커뮤니티 공간을 방문한 이들이 공권력에 의해 연행되던 시대는 분명히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성소수자들이 벽장과 방을 넘어 광장으로 나아가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 이는 명우 형이 신체의 고단함과 늘 당찬 모습의 선배이고자 하는 압박감,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도 레스보스를 놓지 못하는 이유다.


이태원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


5. 누군가의 홈그라운드를 넓혀 갈 다리에 대하여


명우 형의 모습을 통해 퀴어 커뮤니티 공간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어깨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수 있는 길은 결국 퀴어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인식 변화에 있을 것이다. 성소수자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홈그라운드’의 영역이 더 넓어질수록, 퀴어 커뮤니티 공간의 존속을 책임지고 있던 이들의 고독함도 옅어질 테니까.


자신은 이 사회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시민이라 느끼던 사람도 상황에 따라, 어떤 시간과 장소를 지나고 있느냐에 따라 외로운 섬이 될 수 있다. 타인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서로의 외로움과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회는 나아가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데는 사람 뿐이므로. 


소통과 연대의 연결고리를 모아 엮으면 그것이 결국은 섬과 섬 사이의 다리가 되지 않을까. 공감대의 다리가 놓이면 각자가 오갈 수 있는 영역은 넓어진다. 


오늘 혹은 어느날 외로운 섬일지도 모르는 누군가. 그 누군가의 홈그라운드를 넓혀 갈 다리를 겸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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