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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Oct 08. 2024

마크 로스코가 가져온 인류 공통의 거울

인간의 내면본질, 집단무의식으로부터 

자기 내면을 직시하기는 어렵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직시할 결심을 하는 일이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다. 일상에 후폭풍이 올 것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불만족스러운 지점에 얽힌 여러 감정들에 차라리  무감각해지기를 택한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화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여러 반응을 보인다. 그의 그림이 감상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크 로스코의 의도에 마음을 열어 반응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그의 의도에 응한다면 어디까지 마음을 열어 참여할 것인가? 감상자의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인 선택에 따라 그 반응 또한 달라진다. 


심리학자이자 작가인 크리스토퍼 로스코는 자신의 책 <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의 초반에서 감상자들의 반응 유형을 세세하게 나누고 있다. 자기 아버지인 마크 로스코가 생전에 그림을 그릴 때 의도한 바를 독자들에게 더 와닿게 설명하기 위함이다. 크리스토퍼에 따르면 혹자는 로스코의 색면추상화 앞에서 불쾌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반면 누군가는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더 머문다. 이들은 또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불안과 불편함, 심리적 동요를 느끼는 사람들. 또 한편으로는 로스코가 그림을 그릴 당시 느낀 ‘종교적 체험’을 같이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우리는 주로 이 마지막 반응을 흡사 로스코의 그림에 얽힌 설화처럼 전해 듣곤 한다.  


예술과 체험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낯설지 않다. 전시 관련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체험이 있기도 하고, 아예 체험형 전시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만지거나 들어갈 수 있는 설치 작품, 감상자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작품에 반영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등을 제외하고, 책과 영화, 그림 같은 ‘고전적인’ 매체를 떠올리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은 직접 체험보다는 간접 체험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줄거리가 있는 작품은 서사의 힘으로 감상자가 등장인물에 이입하게 만들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얻게 해 준다. 그림의 경우 익히 알려진 고사나 종교적 소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 몰입을 유도할 수 있겠다.(물론 이 몰입은 문화적 약속을 사전에 필요로 한다.) 혹은 등장인물의 표정, 몸짓 등으로 그림의 주된 정서를 전달하여 인물에 이입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추상화는 구상화보다 접근이 어렵다. 구체적인 형상과 그 형상들이 만들어내는 장면이 없는 그림들. 추상적인 형태나 색으로 이뤄진 이 그림들 앞에서 적지 않은 감상자들이 우연히 모양이 유사한 사물을 연상하며 추상화의 ‘형태적 공백’을 무의식적으로 채우려고 한다. 일종의 친숙한 의미화를 시도한다는 뜻이다. 크리스토퍼에 따르면 마크 로스코의 그림도 그러한 오해 어린 접근을 많이 받았다. 로스코 색면추상화 특유의 직사각형들은 창문, 일몰, 풍경 등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로스코에게 ‘표면은 그저 표면이었고, 그림의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44쪽) 



크리스토퍼가 전하는 로스코 그림의 내용이란 자기 내면을 직시하기로 하고 마음을 연 감상자를 위해 화가가 마련해 놓은 체험 그 자체이다. 그것도 간접적인 것이 아닌, 직접적인 체험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해하려면 로스코 색면추상화의 언어와 모든 인간들의 공통분모에 대해 알고 넘어가야 한다. 


마크 로스코의 초기 그림에는 구체적인 인물이나 건물 내부 일부 등의 형상이 있었다. 이 시기 그림 속 인물들은 어딘가 억압된 상황-폐소 공간처럼 그려진 건축 내부- 속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초현실주의의 철학적 언어를 접한 마크 로스코의 그림 속 형체들은 해체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더욱 원초적인 층위에서 소통하기 위해 마크 로스코는 주변의 많은 예술가처럼 신화를 작품 내용의 원천으로 삼았다.(56쪽) 신화는 과연 인류 사고의 원형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신화 역시 특정 문화적 맥락을 알아야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신화의 언어는 마크 로스코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채택된 언어였다는 점에서 로스코는 신화가 자신의 작업을 제약한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언어는 곧 색이 되었다.


구체적인 형상과 선이 사라짐과 동시에 서사성과 문화적 해석이 들어갈 거리들도 사라졌다. 로스코는 이제 서구 미술의 시각적, 문화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고 그림의 메시지에서 역시 사회적 맥락이 탈락되었다.

  

서로 다른 색은 분명히 서로 다른 문화적 의미를 갖지만, 아버지는 각각의 그림이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로 존재하고 그림의 맥락에서 모든 색이 고유한 의미를 갖도록 색을 병치하여 표현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버지는 색을 자신만의 언어로, 모든 관객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언어로 만들었다. -64쪽


거대하여 감상자를 감싸안는 듯한 작품의 크기, 프레임이 따로 없는 작품 외곽, 우리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하고 보편적인 도형이며 인간의 시야 형태를 모방한 직사각형 등의 ‘로스코 색면추상화 특유의 형식’은 색과 붓질의 미묘한 차이가 감상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도록 효과적인 ‘무대 연출’을 만들어낸다. 


로스코의 그림에서 색 하나하나가 특정한 감정을 하나씩 담당하여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물감의 반사율과 붓질의 느낌, 그리고 색면으로 칠해진 직사각형 가장자리가 주는 느낌 등이라 할 수 있다. 로스코는 말년에 반사율이 높은 물감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 경우 예전에 그린 ‘아래에 쌓아둔 색이 투명하게 올라오는’ 색면추상화들에 비해 감상자다 그림에 능동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수고가 더 커졌다. 그림 안에서 직사각형이 마감된 느낌에 따라 직사각형의 색이 감상자에게 더 다가오듯 느껴지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 미묘한 연출들의 합과 작품과 감상자의 조응의 정도에 따라 감상자는 그림에서 자기 자신을 다른 정도로 직면할 수 있다. 


사회적 맥락이 탈각된 색은 감상자의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보편적인 언어로 기능하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결국 작가와 감상자 모두 ‘비슷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맞게 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비극성을 가지고, 그에서 유래하여 축적된 ‘집단무의식’을 가진다.(마크 로스코는 융의 저서를 탐독했다) 작품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보는 사람의 안에 아예 없는 것을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품과의 소통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심한 감상자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통해 화가는 물론 자기 자신과도 교감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우리 모두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존재이고, 삶에는 채울 수 없는-애초에 채워져야 하고 채워질 수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공허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무의식은 같은 공포, 슬픔, 연민, 연민에서 오는 쾌감, 감동을 공유한다. 로스코는 그 태초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으며, 감상자는 로스코의 색면추상화 작품, 즉 로스코가 가져온 인류 공통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인류의 하나인 자신의 실존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로스코의 색면추상화는 소통을 위해 마련된 기회의 장이며 체험 그 자체가 된다.

 

기법에 대한 지식, 색이 우리의 지각 체계에 미치는 영향, 작품의 철학적 토대보다 관객과 그림, 즉 관객과 화가 사이의 교감에 초점을 맞추어야 로스코의 작품과 우리 내면이 맺는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림을 형식적 수단이나 회화적 과정의 결과물이 아니라 소통의 행위로 바라보면, 그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소통하고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평생 아버지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45~46쪽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화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관객 외에 대중이 로스코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 중 또 하나는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들인 크리스토퍼 로스코 나이 6살 때의 일이었다.


크리스토퍼 로스코는 30 여 년간 아버지의 유산인 그림과 기록을 관리하고 연구했다. 그가 집필한 <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는 마크 로스코의 인생 전반을 전하거나 미술사에서 마크 로스코의 의의와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책은 아니다. 아버지의 작업 의도를 곡해 없이 전달하기 위한 애정 어린 글들이 모여 있는 이 책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로 하여금 가족의 죽음 이후에 이뤄질 수 있는 대화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로스코 부자의 대화는 마크 로스코의 생전보다는 사후에 더 길게 이어졌을 터이다. 크리스토퍼 로스코의 개인사를 모르기 때문에 그가 자신이 어릴 때 돌아간 아버지를 원망했는지, 했다면 원망의 시간은 얼마나 길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연민이 더 컸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크리스토퍼의 책을 통해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문, 원망, 연민을 모두 한 차례 지나 실존과 실존으로 만나는 대화를 고요히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이 계속 묘하게 편안했는데, 이것은 고인이 된 아버지의 유산을 살펴 온 깊고 밝은 애정이 행간에 녹아 있기 때문이라 느껴졌다. 


깊고 밝은. 모든 빗장을 내려두고 자기를 ‘감싸안는 작품’을 마주 끌어안며 크리스토퍼 로스코는 아버지 작품의 특징 중 하나인 ‘내면의 빛 (inner glow)’을 자신의 안에 스며들게 했을 것이다. 스며들어 자기 안의 내면의 빛과 만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아들 로스코 안에 있던 빛의 일부는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애정과 존경일 테다. 나는 로스코 부자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책을 덮으며 시간을 뛰어넘은 소통의 여운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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