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붉은여우 Jun 22. 2024

A사 파란색 볼펜

  매주 월요일 아침은 필사를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글을 공유하는 날이다. 일요일 저녁에 필사할 글을 사진으로 찍거나 캡쳐해서 준비한 뒤, 다음 날 아침 9시쯤에 단체 대화방에 올리면 된다. 몇 개월째 하는 일이라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이번 주 월요일 아침에는 서둘러야 했다. 전날 지인들과 늦게까지 과음한 탓에 글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게다가 늦잠이라니. 허둥지둥 필사할 페이지를 찾아 사진을 몇 장 찍고 대화방에 공유한다.

‘주말 잘 보내셨나요? 이번 주 필사 글입니다. 즐겁게 필사하세요!’

  무사히 과제를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큰 컵에 얼음을 가득 채워 커피 한잔을 만든다. 그리고 책상 위에 앉아 필사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취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인지, 펜을 잡은 손은 머리의 통제를 잘 따라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이쁘지 않은 글씨가 제멋대로 삐뚤빼뚤, 종이 위에서 갈지(之)자로 걷는 것처럼 보였다. 글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마무리까지 힘든 과정이 될 것 같다. 그나마 차가운 커피가 조금이라도 힘내라고 응원을 해주고 있다.
중간쯤 써 내려갔을까? 사용하던 파란색 볼펜의 잉크가 조금씩 연하게 쓰이더니 끝내 나오질 않는다. 투덜거리며 새로운 펜을 사용하려고 서랍에서 볼펜 박스를 찾았다. A사의 1.0mm 파란색 볼펜. 몇 상자를 사두었기에 당연히 많이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상자는 하나만 남겨져 있었고, 그마저도 덩그러니 비어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10년을 넘게 써왔던 A사의 파란색 볼펜이었다. 생산과정 중 제품 속에 혹시라도 연필 가루가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도 있었지만, 기록한 것을 지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문서는 볼펜으로 작성해야만 했다. 심지어 글씨를 잘못 써서 고쳐야 할 때도 수정액은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됐다. 틀린 곳은 두 줄을 긋고 서명을 한 다음, 수정할 내용을 기록해야 했다. 특히 문서가 복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느 때부터인가 파란색 볼펜을 사용했다.
  실무자일 때는 기록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관리자가 돼서는 서명을 선명하게 하는 데 편했기에 써오던 것이었다. 연예인도 아니면서 이렇게 사인(sign)을 많이 해야 한다고 웃으며 투덜거릴 정도로, 제품 출하 전까지 법적 책임자로서 생산 부문 여러부서의 많은 서류에 서명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볼펜 한 자루의 사용 주기가 짧았다. 한 자루로 한 달을 버티는 것이 힘들었다. 언제 볼펜의 잉크가 떨어질지 몰라 한두 자루를 미리 사두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집과 회사에 몇 상자를 구입해두고 사용했다. 그랬던 것이 생산 부서를 떠나 본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리고 회사를 그만둔 지금까지 사용해 왔다. 늘 같은 볼펜을 사용하다 보니 은행이나, 병원, 우체국 등에서 검은색 볼펜을 작성하게 될 때도, 어색함에 글쓰기를 머뭇거릴 정도였다. 그래서 가방에는 늘 이 볼펜을 가지고 다녔다.

  그 익숙함이 오늘로써 끝났다. 상자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자를 흔들어 보는 나를 발견한다. 바보같이. 이제 남은 볼펜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잠시 허탈했다. 회사와의 마지막 인연도 끝나는구나 싶었다.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손에든 파란색 볼펜이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니, 갑자기 많은 기억이 소환되었다. 품절을 막기 위해 며칠을 밤샘해서 만들어진 제품을 출하하는데 서명했던 짜릿한 기억, 저울을 잘못 읽어 잘못 만들어진 제품을 폐기하는데 서명했던 슬픈 기억, 해외 인증을 받기 위해 한꺼번에 새롭게 만들어진 문서들에 서명했던 피곤한 기억 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공간에 함께 있던 직원들과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들과 같이 제품을 만들던 일, 어렵고 불편했던 것들을 개선했던 일, 즐거웠던 회식, 틈틈이 함께한 여행, 영화관을 대관해서 우리가 직접 만든 영화(?)를 함께 보던 송년회의 기억 등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과 이름들을 떠올렸다. 흐릿해진 기억으로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 얼굴들도 생각났다. 파란색 볼펜과 함께 기억에 남아있는 그들.

  화요일 저녁. 밤 자정이 풀쩍 넘어 휴대전화기가 울린다. Y였다. 전화기 건너 술에 취해 혀가 살짝 꼬부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실땅님… 저예요... 잘 지내시죠… 언니들하고 술 먹다가 실땅님 이야기가 나와서 전화해떠요... 여기…C, K, S언니 다 이쩌요…...언니들이 바꿔 달래요….”  

한명씩 한명씩 돌아가며 반가운 목소리를 들려준다.
“ 처난에는 안 내려오세요?...꼭! 꼭! 내려오데요…우리 기다리고 이뜨께요…”

  나는 이들을 잊을 수 있을까? 쓰이다 멈춘 글자처럼, 과거의 기억들도 여기서 멈춰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기억해 주는 만큼 나도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A사의 파란색 볼펜을 써야 하지는 않을까? 내일은 A사 파란색 볼펜을 꼭 주문해야겠다. 기억과 인연의 끈을 사야겠다.
다음 주는 천안을 내려가 볼까? 휴대전화를 열어 기차표를 뒤적여 본다.

                                                                                                                            (2024.05. 30)

작가의 이전글 고등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