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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 서연 Jul 10. 2024

발레를 사랑했던 셀럽들

왕비와 함께 우아한 발레

발레를 사랑하다 못해 직접 창작에 참여하면서 발레 뤼스와 협업했던 예술가들, 발레복식사에서까지 혁신을 불어일으킨 가브리엘 샤넬, 조지 발란신에게 창조의 영감을 주었던 프랑스 주얼리 브랜드 반클리프아펠의 창업주들, 안무가였던 아들 롤랑 프티의 권유로 토슈즈 브랜드 레페토를 설립한 로즈 레페토 등등 발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발레가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한 셀럽들이 역사적으로 참 많았는데요. 오늘은 그 셀럽들 중에서도 왕비와 발레의 상관관계에 관해 올려보려구요.


발레 애호가였던 가브리엘 샤넬 이후에도 샤넬 브랜드는 오늘날까지도 파리 오페라 발레단과 협업을 하고 있어요. 발레는 명품을 입고, 명품 브랜드는 우아함을 입으니 서로가 윈윈하는 거지요. 왕비와 발레의 상관관계도 비슷한 거 같아요. 왕비는 예술의 한 분야인 발레를 후원하면서 우아함을 챙기고, 덕분에 발레는 더욱 발전을 하면서 왕족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해왔어요. 물론 계몽주의 시대에 발레 마스터들과 무용수들 중에는 계몽사상가들의 비평에 근거하여 왕족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좀 더 인간의 근원적인 것에 다가가 표현하려고 했었지만 발레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왕과 귀족들과의 유착관계가 계속 이어졌고,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는 또다른 형태로 셀럽들이 발레를 후원,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발레를 탄생, 후원시킨 최초의 패트런들은 단연 피렌체 공국을 다스렸던 메디치 가문을 들 수 있어요. 메디치 가문은 발레 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가이자 예술을 후원했던 가문이었지요. 오늘날에도 예술을 후원하면서 발전에 기여하는 기업들을 가리켜 '~의 메디치'라고 비유적인 표현을 쓰더라구요. 이탈리아의 다이아몬드 가문에서 태어난 카트린 드 메디치는 아예 발레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어요. 발레 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녀는 프랑스 앙리 2세에게 시집오면서 발레도 가져오고, 이탈리아 디저트 문화 등등의 여러 문화들도 챙겨온 왕비였어요. 발레의 역사상 최초의 전막 발레는 카트린 드 메디치가 기획하고 후원하여 그녀의 심복인 발타자르 드 보주아이외가 만든 <왕비의 발레 코미크>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여기서 코미크란 희극 발레(코미디 발레)를 뜻하는 것이 아닌 연극적인 성격을 띤 발레를 말하는 것으로 일종의 용비어천가에요.

왕비의 발레 코미크, Ballet Comique de la Reine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는 무도회장인 ballroom의 가운데에서 발레 공연하는 모습을 왕은 홀 중앙에 앉고 귀족들은 빙 둘러 앉아서 관람했어요. 물론 공연을 하는 무용수들도 모두 귀족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ball의 어원은 이탈리아어인 'ballo'이며 중세시대부터 춤을 추다는 의미로 써왔고, 여기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춤을 추다'라는 뜻을 지닌 Ballet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역시 무도회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인 ballare에서 ballroom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궁정에서 라벨당스로 추었던 발레가 카트린 드 메디치 왕비에 의해서 프랑스로 퍼지고, 이후 프랑스의 수많은 아폴로와 천사들은 발레에 대한 수많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진지한 연구를 해서 발레가 무럭무럭 자라게 했습니다.


어느덧 시대가 흘러 합스부르크 가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을 옵니다. 무분별한 사치로 빵을 달라는 민중들에게 "그럼 브리오쉬를 먹으면 되지요."라고 말했다는 마리 앙투와네트. 그러나 역사는 어디까지나 승자가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하는 거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정확히 다 알기 어려워서 프랑스 혁명을 촉발시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왕비보다는 발레를 사랑했던 왕비로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이미 앙투아네트는 공주 시절부터 프랑스 출신의 발레 마스터 장 조르주 노베르에게서 발레를 배웠습니다. 무도회장에서 라 벨 당스를 잘 추기 위해서는 미리 개인 교습을 받을 필요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시대의 발레 마스터들은 왕족, 귀족들의 춤 선생인 동시에 예절 교육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했어요. 춤을 우아함의 상징이자 예절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오늘날에도 이런 문화 유산이 고전 발레 작품에 고스란히 남아있지요. 예를 들어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 오딜이 나쁜 짓을 하러 궁정에 왔음에도 춤을 추고 나면 언제나 예의바르게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 등등이요. 이렇듯 발레는 애초에 테크닉이 아니라 귀족들의 사교장에서 라 벨 당스를 추기 위한 예의바른 춤이었어요. 노베르에게 춤과 예절교육을 받았던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스승 노베르도 함께 데려옵니다. 프랑스에서 발 붙일 곳이 없어서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발레 교사를 했던 노베르가 출세해서 귀국하게 된 것이지요.


루이 16세는 오페라와 발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이 15세까지만 해도 엄격하게 지켜졌던 파리 오페라 극장의 좌석 배치가 루이 16세가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파리에서 오페라 극장의 좌석배치는 매우 인습적이었어요. 특히 루이 15세는 좌석배치를 개인적으로 통제했는데, 가장 좋은 좌석은 무대 바로 위에 자리한 6개의 박스석들이었고, 고관들과 왕족들이 모두 눈에 띄게 그곳에 자리할 수 있었어요. 모두 사회적 과시에 맞춰졌던 최고급 박스석들은 정작 공연을 보기에는 불편하게 배열되어 있어서 오페라 글라스 없이는 공연을 보기 힘들 정도였지요. 역시 염불보다는 잿밥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어서 공연 관람이 목적이 아니라 경쟁자인 다른 귀족들의 패션이나 행동을 염탐하는 데에 오페라 글라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루이 15세의 아들은 아버지와는 달랐어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의 화려함보다는 고독을 즐기는 왕이었어요. 왕의 성향은 곧 파리 오페라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루이 16세는 파리 오페라를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맡겼어요. 파리 오페라의 새로운 수장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제 발레의 발전에 새로운 초석을 세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궁정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랐던 앙투아네트는 위계질서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파리 오페라의 개관이래 지켜져왔던 각종 관습과 예법들, 극장의 좌석 배치들이 모두 눈에 띄게 느슨해졌습니다. 이제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계급들이 일등 박스석을 점점 차지하게 되었고, 왕비 자신도 굳이 일등석에 자리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왕비가 이등석에 앉기 시작하면서 이제 공연 관람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체면치레가 아니라 공연 그 자체를 관람하는 것이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오페라 관람시 착용하는 의복도 간소해졌습니다. 인습을 타파하고 격식보다는 공연 자체를 즐겼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발레를 진정 사랑했던 왕비였어요.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기와 함께 발레 개혁을 했던 프랑스 발레는 낭만주의 시대에 꽃을 활짝 피운 후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고 했어요. 낭만주의 발레가 쇠퇴함에 따라 발레 역시 시들어갔거든요. 그렇게 프랑스에서 발레는 잊혀져가면서 발레리나들은 예술가 대우를 받는 게 아니라 부르주아들의 코르티잔이 되었지요. 그러던 찰나에 다시 파리가 발레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 출신들의 발레 마스터와 무용수들이 아니라 제정 러시아에서 건너온 아폴로와 그 천사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이 아폴로와 천사들은 많이 과격했지요. 그리고 그만큼 발레의 역사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도록 찬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바로 발레 뤼스입니다.


그러나 그 천사들을 이끌었던 아폴로이자 20세기 초의 최대 흥행주였던 디아길레프가 죽고 나자 발레 뤼스는 해체되었어요. 약 20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너무나도 짧은 세월동안 화려하게 불꽃처럼 타오르고 디아길레프의 죽음으로 불꽃이 금세 꺼진 발레단이 되어버렸어요. 그러자 발레 뤼스를 후원했던 모나코 공국이 발레 뤼스의 단원들을 규합해서 디아길레프의 뜻을 계승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해서 창단한 발레단이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발레단이에요. 우리나라의 윤혜진 발레리나가 한때 이 곳의 수석무용수로 활약을 했었지요.


그렇다면 몬테카를로 발레단은 어떤 왕비와 연관이 있을까요. 다들 아시는바와 같이 20세기 중반에 헐리우드를 풍미했던 스타 그레이스 켈리입니다. 모나코 공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를 가리켜 다들 20세기의 신데렐라라고 부르지요. 배경도 뭐도 없는 여자가 상승혼을 했다는 의미로 그레이스 켈리를 신데렐라라고 표현하기에는 그녀는 가진 게 너무 많은 여자였어요. 엄청 부유한 집에, 잘 나가는 친척들에, 본인부터가 부를 쌓은 헐리우드 스타였지요. 이랬던 그녀가 부모님의 바람대로 체면치레를 할 수 있는 공국으로 시집을 갑니다. 모나코 공국 역시 모나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유명인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서로가 윈윈한거지요. 엄밀히 말하면 모나코 공국은 왕국이 아니기 때문에 그레이스 켈리 역시 왕비가 아닌 공비 즉 공작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퉁쳐서 왕비라고 할게요.

오스카 시상식 대기실에서 동갑내기 오드리 헵번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레이스 켈리.
이 해에는 그레이스 켈리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어요.


그녀가 공국으로 시집가기 전에 찍은 영화가 <백조>, <상류사회>인데요. 이 영화의 줄거리는 클리셰한데, 다만 이 영화를 찍고 얼마후에 그레이스 켈리가 공국으로 시집을 가서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어쨌든 헐리우드 스타로서의 배우 생활을 접은 그녀는 발산하지 못하는 끼를 발레를 통해 해소합니다. 그녀는 모나코 왕립 발레 학교(강수진 국립 발레단장님의 출신학교)를 창단했고,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후원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자신의 첫째딸 캐롤라인 공주가 발레 교육을 받도록 아주 열성적이었습니다. 요즘 엄마들도 못다한 로망을 딸이 발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데, 그레이스 켈리도 비슷한 심정이었나봅니다.


진짜로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처럼 상류사회 속으로 걸어들어간 그녀는 오직 왕비로서의 삶에만 충실해야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못 다 이룬 사랑을 오페라와 발레에 쏟아부었습니다.

왼쪽부터 그레이스 켈리, 남편 레이니에 공, 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


두 분이 아주 절친이었다고 해요


1982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그레이스 켈리는 지독스럽게 발레를 사랑했습니다. 이후 캐롤라인 공주가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명예 이사장을 맡으면서 지금까지 후원하고 있어요. 그리고 '프린세스 그레이스 재단'을 만들었는데요.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이 재단은 다양한 자선활동과 함께 영화와 연극, 발레의 유망주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딸인 캐롤라인 공주가 어머니가 얼마나 발레를 사랑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93년에는 캐롤라인 공주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를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예술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마이요가 이끄는 몬테카를로 발레단은 주로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을 창작하는 곳으로 유명한데요, 마이요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 고전 발레 작품인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새롭게 해석한 <라 벨르>가 아주 유명합니다.



오늘 소개할 마지막 발레 패트런이자 20세기의 아주 유명했던 셀럽 중의 한 분이었던 왕비. 바로 다이애나비입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빈 역시 유치원 보모 출신으로 왕세자에게 시집간 신데렐라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데요. 그 유치원이 왕족, 귀족의 자제들만 다니는 곳으로 그곳에서 보모를 하려면 역시 귀족 여성이어야 한다고 하네요. 어린 시절부터 레이디(영애)라는 칭호를 들었던 다이애나 스펜서는 유서깊은 백작 가문의 후손으로 윈스턴 처질과도 인척 관계라고 합니다. 영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여식이었던 다이애나는 동화 속 공주님처럼 왕세자 찰스와 결혼식을 올려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동화가 아니라 막장이었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국인들이라면 연극과 함께 꼭 갖춰야하는 국민 소양인 발레를 다이애나비 역시 유별나게 사랑했기 때문에 영국인들이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고 하네요.


비록 다이애나비는 발레를 배운 적은 없지만 발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로열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서 춤까지 췄다고 해요. 1985년 코벤트 가든 기금 마련을 위해 크리스마스 자선파티에서 춤을 춘 것인데, 행사를 두 달 앞두고 다이애나비가 남모르게 로열발레단 출신의 발레 무용수 웨인 슬리프에게 안무를 부탁합니다. 행사 직전까지 극비로 부쳐진 이 비밀스러운 춤은 깜짝쇼로 진행되었고, 다이애나비는 엄청난 갈채를 받았다고 해요. 빌리 조엘의 음악에 맞춰 웨인 슬리프와 파드 되를 춘 다이애나비의 춤실력에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찰스 왕세자였다고 합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자기 곁에서 우아하게 앉아있었던 왕세자비가 살며시 자리를 뜨더니 180도로 변신해서 무대 위에 나타났으니까요. 다이애나비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춤을 췄을까요. 어쨌든 그날 댄스 커플이었던 다이애나비와 웨인 슬리프는 8번이나 커튼콜을 받았고 모금 실적도 좋았습니다.


왕세자빈의 신분으로서 자선 활동을 열심히 했던 다이애나비는 왕세자와 결혼한 후 가장 먼저 런던 시티 발레단을 후원했습니다. 또 영국 국립 발레단도 후원했는데요. 왕세자와 이혼한 후 대부분의 공식 자선활동을 중단했음에도 영국 국립 발레단만큼은 끝까지 후원했습니다. 그 정도로 다이애나비는 영국 국립 발레단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고, 직접 홍보도 할만큼 이 발레단을 사랑했어요. 다이애나비는 영국 국립 발레단의 홍보를 위해 특별한 제안을 했습니다. 바로 백조 의상을 입은 예순 다섯명의 발레리나들과 함께 자신이 홍보 포스터를 촬영하는 것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거식증을 앓고 있는 발레리나들에게 인생 상담도 해주고 여러가지 도움을 주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런던 시티 발레학교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다이애나비
영국 국립 발레단의 홍보 포스터
영국 국립 발레단의 홍보 포스터


발레 관람도 자주 했는데, 영국 발레를 후원하는 중요한 인사였음에도 귀빈석이 아니라 일반석에 앉아 관람을 했습니다. 주로 자신의 아들들인 왕자들과 사촌들을 데리고 들어와 관람을 했는데도 유난을 떨지 않았고 관람 후에는 조용히 극장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자신이 직접 춤을 출 정도로 발레를 사랑했고, 발레단의 최대 후원자이자 발레리나들의 상담가였던 다이애나비는 관람예절에서도 매우 성숙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니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을 때 영국 발레계가 깊이 애도를 했다고 하네요.



** 본문에서 못다한 이야기 **

그레이스 켈리와 다이애나비 역시 친분이 두터웠어요. 다이애나비가 그레이스 켈리를 엄청 좋아했고 잘 따랐다고 하네요.



두 분 다 역시 패션 피플이기도 했습니다. 오드리 헵번과 동갑이었던 그레이스 켈리는 헵번처럼 패션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미지에 맞는 스타일링을 해서 오히려 본인의 이미지를 장점으로 부각시키는 쪽으로 패션을 장착했어요. 본문에서 언급한 그녀의 영화 <백조>와 <상류사회> 속 사진들을 담아왔습니다.   



다이애나비는 너무 아름다워요. 연예인 사진을 보는 것 같더라구요. 오늘도 이렇게 발레의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발레의 최대 패트런들의 스토리를 풀면서 겸사겸사 한시대를 풍미했던 셀럽들의 사진들도 감상하는 거지요. (ㅋㅋ)



** 참고문헌 **

<아폴로의 천사들 : 발레의 역사>, 제니퍼 호먼스 지음, 정은지 옮김

<천상의 언어, 그 탄생에서 오늘까지 발레 이야기>, 이은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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