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뿌린 발레의 씨앗이 프랑스로 날아가 루이 14세가 육성하기 시작했던 발레는 왕이 사망할 즈음에는 유럽 전역에 발레가 퍼져나갔던 상태에요. 영국,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의 왕국들, 독일의 여러 공국들, 폴란드, 러시아, 역으로 이탈리아의 공국들에게까지 수출. 그렇게해서 라 벨 당스가 여러 지역, 여러 국가들의 토착 춤과 만나 변질되었어요. 그리고 18세기가 되어서 프랑스 발레는 역공격을 받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도 본거지인 파리에서 비판을 받았어요. 귀족적인 발레가 진취적인 사람들의 표적이 된 것이지요. 발레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주로 장 자크 루소를 중심으로 한 계몽사상가들과 프랑스 스타일을 안 좋아했던 외국인들이었으며 이들에게 발레는 우아함이 아니라 퇴폐와 타락을 뜻하는 거였어요. 때문에 발레 마스터들과 무용수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발레 개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춤을 개혁하고자 했던 이들은 계몽 사상가들의 비평에 근거해서 점잖게 추는 라 벨 당스에서 연기와 팬터마임으로 채우는 것을 시도했구요. 천사와 신, 왕이라는 귀족적인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인간 자신의 이미지에서 춤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 살레라는 발레리나는 프랑스의 유명한 작곡가 장 필리프 라모와 함께 작업하면서 귀부인의 드레스처럼 치렁치렁한 발레의상 대신 그리스식 옷을 입고 테크닉보다는 감정과 팬터마임으로 춤을 묘사했어요. 치마길이를 과감하게 줄였던 발레리나 마리 카마르고는 남성 무용수들 못지않는 테크니션으로 스타가 되면서 발레가 자라도록 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8세기에서 19세기에는 여성 무용수들의 연기력이 대부분을 차지했어요. 이 모든 게 춤이 스토리를 말보다 이야기를 더 잘 표현하고 춤이야말로 인간의 실체를 더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다는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에서 나온 개념이었어요.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가 스토리가 있는 발레, 몸짓으로 여러 인간 군상과 내면을 표현하는 드라마 발레가 연상되는데, 이런 발레의 장르가 이미 계몽주의 시대부터 싹트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와네트가 공주였던 시절 춤 스승이기도 했던) 장 조르주 노베르라는 걸출한 발레 마스터가 싹트기 시작한 팬터마임들을 좀 더 고급진 연극 발레로 발전시킵니다.
노베르는 프랑스 출신이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발레 마스터였어요. 아버지가 스위스인이었고, 발레 계보에서도 파리 오페라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외되었어요. 결국에는 파리에 정착하지 못하고 런던, 베를린, 슈투트가르트, 빈, 밀라노 등에서 작업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습니다. 마리 앙투와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노베르가 금의환향했는데요. 온갖 시기, 질투, 음해에 시달리다가 얼마 못 버티고 어쩔 수 없이 파리를 떠났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발레 개혁을 위해 <서간집>을 집필했는데, 특히 계몽사상가 루소가 오페라 공연에서 발레를 추는 프랑스 오페라 관습에 불평하면서 발레라는 예술 자체에 공격을 했기 때문에 노베르가 창안한 새로운 발레 개념이 춤을 위한 개혁에 매우 중요했어요. 노베르는 춤이 대사나 아리아, 레치타티보없이도 오직 몸짓으로만 스토리를 표현해야 한다는 '발레 닥시옹'이라는 발레 개념을 창안합니다. 발레 개혁을 위한 이 새로운 아이디어는 춤과 무언극, 팬터마임으로 내용을 전개시켜야 한다는 개념이었어요.
하지만 이 새로운 개념에 다른 문제가 있었어요. 팬터마임만으로 복잡한 스토리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특히 과거나 미래를 어떻게 전개시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었는데, 노베르는 이 문제를 '살아있는 타블로' 구조로 해결합니다. 복잡한 스토리를 전개할 때 세 폭 제단화와 비슷한 원리에 입각해서 순차적으로 이어지도록 했고, 그림처럼 원근법, 명암, 패턴 등을 적용해서 무용수들을 무대 위에 배치했어요. 그리고 이 그림같은 배치로 무용수들이 움직이다가 다른 동작을 하기 전에 '얼음'하듯이 정지했는데, 이 기법이 '타블로 기법'이에요. 이 기법은 이미 이전부터 연극에서 사용되었던 기법으로 노베르가 춤을 위한 개혁을 위해 빌려왔다고 하네요.
'타블로'의 사전적 의미가 극에서 움직이던 배우가 멈추거나 정적인 상태로 표현되면서, 다른 상황을 환기하는 기법이라고 나오는데요. 검색해보니 오늘날에는 사진기법으로도 쓰이고 있네요.
오드리 헵번의 뮤지컬 영화 <퍼니 페이스>를 올리다가 그녀의 또다른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가 떠올랐어요. 이 영화에서는 헵번이 발레를 추는 것은 아니지만 상류사회의 라벨당스를 우아하게 추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영화에요.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앞서 말한 '타블로 기법'이 나옵니다.
블랙 & 화이트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이 과장된 모자를 쓰고 경마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 '살아있는 타블로 구조'는 영국 상류 사회를 묘사한 것이라고 하네요. 모던한 듯 세련되고 화려하고 우아한 영화 의상을 디자인했던 디자이너는 영국인 디자이너 세실 비튼입니다. 세실 비튼은 영국 발레사에서도 나오는 중요한 의상 디자이너에요. 영국 발레의 아버지 프레데릭 애슈턴과 공동 작업을 하면서 <마르그리트와 아르망>을 비롯한 다수의 발레 작품들의 발레 의상을 디자인했어요.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작곡가는 바로 20세기의 명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입니다. 세계적인 관현악단을 이끌면서 가끔씩은 재즈 피아니스트로, 또 가끔은 뮤지컬 영화 음악 작곡가로 변신했던 팔방 미인이었어요. 뮤지컬 영화 <지지>, <포기와 베스> 그리고 <마이 페어 레이디>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습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영화 감독 조지 쿠커가 디자이너 세실 비튼에게 "헵번의 의상을 만들 때 지나치게 우아해 보이지 않을 것."하고 주문하는 바람에 디자이너가 고민이 많았다고 해요. 덕분에 스토리의 특성상 너무 우아해질 수도 있었던 것을 우아함도 적당히 챙기면서 세련된 사랑스러움까지 더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실 비튼과 오드리 헵번
유튜브에 자동으로 뜬 영상이 있는데, 영국의 왕세자비 케이트 미들턴이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를 오마주한 듯한 의상을 입은 숏츠 영상이 있어서 담아왔어요.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는 세실 비튼의 의상을 입고 촬영한 오드리 헵번의 바비 인형같은 화보들이 참 많아요. 이전의 글에서 올리지 못한 헵번의 화려한 모습들을 이번 글에서는 올려보아요. 헵번의 영화 속에서 나왔던 발레 & 연극 기법을 통해 발레의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겸사 겸사 작곡가 이야기도 하면서 음악도 듣고, 오드리 헵번의 예쁜 사진들을 감상하는 거지요. (ㅋㅋ) 비는 시원하게 내리지는 않으면서 습도만 높은 목신의 오후처럼 나른한 여름 날씨가 계속되는 요즘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발레 작품보다는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지나치게 가볍지는 않게 춤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 오드리 헵번이 헝가리 공주님(?)이 되어 왕족, 귀족들만 모인 파티에 참석하는 장면을 촬영했던 날 귀족 의상으로 갖춰입은 엑스트라들이 오드리 헵번을 볼 수 있다고 하니까 엄청 기대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짜로 공주님처럼 등장을 한 오드리 헵번을 보고 엑스트라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왔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