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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같은 환상을 걷어낸 진짜 발레 이야기

정옥희 발레 평론가의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by 아트 서연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데도 어쩐지 책제목에 공감이 갔다.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이 책은 정옥희 무용평론가가 평생 발레 인생을 살아오면서 성찰한 발레 에세이이다. 입시 발레를 했던 학생에서부터 발레 전공자, 학생 신분으로 객원무용수, 외국 발레단에서 활동했던 경험, 프로페셔널한 발레단의 단원, 대학원 진학 및 유학생 신분 이후 무용평론가와 대학교수님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치면서 통찰한 발레에 관한 다양한 시각들을 제공해 독자들이 '발레'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삶에 관한 통찰력들이 책 전반에 녹아 들어있어 책의 깊이가 상당히 무게감있다.


한때 무대 위의 사람이 쓴 책이었기에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마음에 와닿았다. 때로는 뼈 때리는 표현들로 내가 애써 외면하거나 굳이 생각하려 들지 않았던 발레에 관한 이면들을 성찰하도록 일깨워주는 문장들도 많았다.

"'발레리나'는 오븐에서 갓 꺼낸 수플레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단어다. (중략) 하지만 수플레는 이내 푹 꺼져 버린다. 내가 지나쳐 온 발레의 풍경 역시 문구점 편지지를 장식하는 발레리나 일러스트와는 사뭇 달랐다."(p.5)

"춤에서 호흡을 발견하면 춤은 완전 다른 것으로 탈바꿈한다.(중략) 춤의 목적은 동작을 해치우는 게 아니라 동작과 동작 사이를 음미하는 것이다."(p. 46, 49)

"무용수들은 움직임의 세밀한 부분까지 몸으로 기억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p.66)"

"작품을 통해 인연을 맺은 움직임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지문처럼 새겨진다.(p. 69)"

"군무 리허설의 메커니즘은 독무 리허설과는 전혀 다르다. 여기선 개인의 기량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처럼 움직이기 위해 미세하게 약속하고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다.(p. 85~86)"

"발레의 생명은 군무이고, 군무의 생명은 line, interval, timing입니다. 기억하세요.(p.86)"

"발레단이 가장 나태해질 수 있는 작품은 <호두까기 인형>이다. (중략) "여러분은 어제도, 그제도, 몇 주 동안 해 온 작품이지만 오늘 올 관객 중에는 발레를 난생처음 보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니 초심을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해 주세요."(p. 94)

"몸으로 느꼈던, 모든 세포가 꿈틀대는 듯한 생동감이 속절없이 휘발되어 갈 때 느끼는 허무함은 춤추는 이가 감내해야 할 운명이다.(p.111)

"품질 유지의 비결은 꾸준한 루틴의 힘, 그리고 루틴으로 다져진 마음의 힘일테다.(중략) 프로는 그냥 한다. (중략) '이 공연을 하다가 죽어도 좋아.'는 아마추어이다."(p.104)


"10년을 매일같이 꾸준히 노력하면 확실히 변하긴 변한다. 미운 오리가 백조가 되고, 초심자가 배테랑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그 1만 시간을 견딘다는 건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1만 시간의 결과엔 환호해도 1만 시간 자체엔 관심이 없다. 끝없이 반복하고 실패하고 헤매는 시간을 겪어 낼 이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p. 4)


취미로 발레를 배운지 벌써 10년째. 지금이야 가벼운 마음으로 발레 클래스를 받고 있지만 발레에 처음 입문했을 때에는 일주일에 최소 3회, 대개는 4회를 듣고 유명 발레 선생님이나 발레 무용수들이 진행하는 특강은 꼬박꼬박 수강할 정도로 발레를 향하는 열정을 불태울만큼 발레를 대하는 자세가 전공자들 못지않게 진지했다. 그 결과 1년이 지나자 나도 모르는 새에 미운 오리가 조금씩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을 주변인들이 눈치채기 시작했다. 체형은 타고난 체형 DNA에 맞게 최대한 슬림해졌지만 실력은? 돈과 시간을 오랜 시간동안 들였다고 해서 없던 춤 DNA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쎄게 온 발레 권태기를 지나서 이제는 한 학원의 터줏대감,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 된 나는 여전히 발레 실력은 초보이지만 그래도 그만두지 않기를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한다. 만년 초보여도 마음만큼은 발레 무용수들처럼 춤추는 순간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 그만두지 않기를 정말 잘했어!"


지인분에게 선물하려고 한 권 더 주문했다.
정옥희 무용평론가의 무용평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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