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유쾌하고 기발한 발레 작품 - 롤랑 프티의 <박쥐>
모든 면에서 전반적으로 나무늘보인 나는 발레 레퍼토리를 찾는 것에도 무척 게으르다. 오히려 인친님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좋은 작품들과 무용수들이 많은데, 특히 좋은 작품들을 보내주시고 소개해주신 인친님께 감사드린다. 이렇게 발레 작품을 스스로 찾는 것에 게으른데도 '내가 과연 발레 애호가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잠시 했었지만 타고난 천성이 고쳐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냥 내가 '풍류 조금 좋아하는 나무늘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고 인친님이 보내주시는 영상들을 넙죽넙죽 감사히 받기로 했다.
발레 <박쥐>의 원작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오페라
오늘날 뮤지컬의 기원이 되는 작품을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작곡한 오페레타 <박쥐>를 꼽는다. 내용은 19세기말 흥청망청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비엔나 상류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교적 가벼운 형식의 오페레타이다. 오페라 세리아(정가극으로 레치타티보와 다 카포 아리아가 혼합된 서정비극.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오페라)에 비해 유연하게 연출할 수 있는 데다 연극처럼 대사가 나와서 마치 뮤지컬같다. 왈츠의 왕이 작곡한 오페레타답게 귀에 쏙쏙 들어올만큼 신나고 흥겨운 작품으로 왈츠와 폴카 선율을 기반으로 한 아름다운 아리아가 많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훈훈한 결말 때문에 오늘날 송년 오페라의 레퍼토리로서의 위치를 당당하게 차지하게 되었다.
오페라 <박쥐>의 시놉시스
주요 등장인물은 부유한 귀부인 로잘린데와 그녀의 남편 아이젠슈타인, 그리고 친구인 팔케와 하녀 아델레, 로잘린데의 옛 애인인 알프레드이다. 아이젠슈타인이 세무공무원을 폭행한 죄로 8일간 형무소에서 살아야 하는데, 친구인 팔케가 찾아와 일단 오를로프스키 공작의 파티에서 맘껏 신나게 즐기고 난 후 형무소에 들어가라고 제안한다. 친구의 말에 들뜬 아이젠슈타인은 이미 머릿속은 꽃밭이다. 형무소에 간다고 부인인 로잘린데에게 거짓말하면서 옷차림은 연회복. 그런 남편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로잘린데 역시 옛 애인인 알프레드와 즐길 생각에 이미 마음이 들떠있다. 하녀 아델레 역시 숙모가 편찮으시다는 핑계를 대고 몰래 로잘린데의 옷을 훔쳐 입고 파티장에 갈 생각에 신이 나 있다. 세 사람 모두 머리속으로 딴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가식을 떨면서 애틋하게 삼중창을 부르는 모습이 압권이다.
하지만 형무소장이 들이닥쳐 남편행세를 한 알프레드가 어쩔 수 없이 감옥에 간다. 공작의 연회장에서 아이젠슈타인과 아델레는 서로를 알아보고 놀라지만 아델레는 "웃음의 아리아"라는 유명한 아리아를 부르면서 상황위기에서 모면한다. 파티장에 어느 멋진 헝가리 백작부인이 도착하는데, 사실은 감쪽같이 변장한 로잘린데였던 것. 그것도 모르고 아이젠슈타인은 자신의 와이프를 몰라본 채 아내에게 구애를 한다. 아이젠슈타인은 끈질기게 와이프를 유혹하는 도중에 로잘린데에게 회중시계를 빼앗기고 만다.
어느덧 새벽이 되어 아이젠슈타인은 형무소로 출두하는데, 이미 형무소에는 아이젠슈타인이라는 남자가 감옥에 갇혀있어서 형무소장은 어리둥절해한다. 아이젠슈타인은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하고서 로잘린데의 정절을 의심한다. 하지만 친구인 팔케와 로잘린데가 형무소에 도착하면서 이 모든 게 팔케의 계략이었음이 밝혀진다. 3년전 만취한 팔케에게 아이젠슈타인이 박쥐복장을 입혀 장난을 치는 바람에 야외에서 깨어나 망신을 당한 적이 있던 팔케의 복수였던 것이다. 아이젠슈타인은 이 모든 게 팔케의 계략이었음을 알고 자신의 회중시계를 가지고 있는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훈훈하게 끝이 난다.
https://youtu.be/hqLrdaj3DM0?si=XKdWmPdgNDv4m2V6
롤랑 프티의 발레작품 <박쥐>
한편 20세기 프랑스 안무가를 대표하는 안무가 롤랑 프티는 1979년에 오페레타 <박쥐>의 음악을 바탕으로 내용을 단순화시켜 발레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오페레타의 등장인물들과 이름이 다르며 줄거리가 더 단순하고 내용도 조금 다르다.
안무 : 롤랑 프티
구성 : 2막 7장
음악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의상 : F. 스콰르치피노
초연 : 마르세유 발레단, 몬테카를로, 1979년
롤랑 프티의 아내이자 발레리나였던 지지 잔메르가 벨라 역으로 출연
발레 <박쥐>의 시놉시스
당시 마르세유 발레단에서 재직하고 있던 안무가 롤랑 프티는 자신의 아내이자 발레리나였던 지지 잔메르를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 내용은 오페레타보다 단순하지만 원작보다도 더 유쾌, 통쾌하면서도 기발함이 살아있다. 주요 등장인물은 20세기 초 어느 부유한 여성인 벨라와 그녀의 남편인 요한, 의미심장한 친구 울리히와 하녀, 차르다슈 등을 추는 코르 드 발레가 나오며 작품 곳곳에 안무가의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겨있다.(롤랑 프티의 아버지가 클럽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요한과 벨라는 자식이 다섯명이나 되는 부유층 부부이다. 문제는 오래된 부부라 그런지 요한이 자꾸 딴생각을 한다는 것. 구렁이 신랑도 아니면서 자꾸 밤만 되면 밖으로 나간다. 아니 날아간다. 박쥐가 되어. 이런...! 요한이 등에 와이어를 달고 박쥐가 되어 날아가는 곳은 바로 사교댄스클럽인 "막심스". 그곳에서 요한은 캉캉춤을 추는 댄서들과 신나게 놀고 예쁜 여자들을 꼬신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은 여느 때처럼 아내가 잠든 줄 알고 박쥐가 되어 몰래 날아갔지만 벨라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크게 낙심한 벨라는 어쩔 수 없이 남편 친구인 울리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울리히는 응큼한 남자이긴 하지만 벨라를 진심으로 도와준다. 벨라를 도발적으로 변신시킨 울리히는 요한이 신나게 놀고 있는 사교클럽으로 데리고 간다. 한편 요한은 벨라가 자신의 아내인줄도 몰라보고 아내를 끈질기게 유혹한다. 벨라는 요한의 혼을 쏙 빼놓고는 마차를 타고 새로운 무도회장으로 떠난다. 그러자 요한은 재빨리 그녀가 탄 마차를 타고 쫓아간다.
광란의 가면무도회장에서 요한은 벨라를 계속 따라다니며 구애한다. 이때 울리히의 계략에 따라 경찰서장이 들이닥치고 벨라의 지시대로 경찰서장은 요한을 연행해간다. 감옥에서 지난 밤을 회상하면서 처량하게 세레나데를 부르는 요한. 그때 벨라가 감옥에 나타나 요한과 파드 되를 춘다. 요한이 그만 지쳐서 잠이 든 사이 벨라는 울리히가 건넨 가위로 박쥐 날개를 잘라버린다. 요한은 날개를 잃어버려 맥이 풀렸지만 어쨌든 이후 요한과 벨라가 무도회장에서 흥겨운 왈츠를 추는 것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빈 국립발레단의 <박쥐> (2025. 11. 25, 인친님이 보내주신 영상물, 빌리빌리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25.11.21 芭蕾舞剧《蝙蝠》维也纳国家歌剧院|音乐:施特劳斯家族|编舞:罗兰·佩蒂-哔哩哔哩】 https://b23.tv/JjpncrA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는 벨라는 해야 할 일도 산더미. 엄마가 집안일에 바쁘면 아이들은 더 어수선해진다. 딸들은 인형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우고, 아들들은 평소보다 더 장난을 친다. 벨라가 코 흘리는 아들의 코를 닦아주고 말썽부리는 아들의 엉덩이를 떼찌하는 모습이 전부 음악의 리듬, 박자에 맞춰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장면들이 무척 재미있다.
요한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아빠를 무척 반기는 아이들. 그리고 여전히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벨라. 하지만 요한은 그런 아이들과 아내가 귀찮아 자꾸 밀어내는데...벨라가 남편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그럴 때마다 요한은 밀어내면서 한동안 서로 밀고 당기는 춤에서 오래된 부부의 온도차가 느껴져 벨라가 안쓰럽기만 하다.
그때 의미심장한 친구인 '울리히'가 등장. 이 작품에서 계속 포커페이스를 해가며 작품 전반을 끌고 가는 매우 중요한 등장인물로 찰리 채플린같은 분장을 하고서 발레 무용수로서 현란한 춤솜씨와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배우같은 연기력을 보여줘야 하는 매우 비중이 높고 중요한 배역이다. 이런 울리히가 가위를 들고 벨라의 집에 등장한다. 울리히는 벨라에게 가위를 왜 선물했을까?
벨라 가족과 울리히가 식사 전 기도하는 모습. 바로 그때 벨라 몰래 가슴을 훔쳐보는 응큼한 울리히. 이런...! 등장인물들이 음악에 맞춰 식사하는 모습. 오래된 부부의 온도차 등을 무용수들이 발레마임과 춤으로 녹여낸 감정씬이 압권이다.
특히 오페레타에서 아델레가 위기를 모면하려고 아이젠슈타인에게 애교를 떨면서 재치있게 부르는 '웃음의 아리아'가 발레 작품에서는 이미 머리속이 꽃밭으로 날아간 요한이 클럽 갈 생각에 신이 나 베리에이션을 추는 음악으로 변신해 웃음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요한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밤. 아내가 잠든 줄 알고 한 마리의 박쥐가 되어 날아갔지만 벨라는 박쥐가 된 남편이 날아가는 모습을 봐버렸다.
크게 낙심한 벨라는 울리히에게 전화를 걸며 '전화 베리에이션'을 추는데 이때 흘러나오는 음악이 '샴페인의 노래'와 '서곡'을 편곡한 선율이니 발레리나의 음악적인 표현력과 연기력을 감상하는 묘미가 있다. 벨라의 전화를 받고 도착한 울리히는 오페레타 1막에 나오는 로잘린데, 아이젠슈타인, 아델레의 삼중창 편곡 선율에 맞춰 파드 되를 춘다. 울리히에게 남편이 박쥐가 되어 날아간 것을 발레마임으로 표현하는 벨라와 그런 벨라에게 주부 모습을 집어던지고 화끈하게 변신하면 남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하는 울리히의 파드 되가 신나게 날아오르는 선율 위에 펼쳐진다.
이어서 벨라가 클럽의상으로 갈아입는 동안 오페레타의 '샴페인의 노래' 선율에 펼쳐지는 울리히의 베리에이션. 요염한 클럽 의상으로 갈아입고 변신한 벨라의 모습은 정말 도발적이고 섹시하고 매력적이다. 화끈하게 변신한 벨라가 취하는 포즈에서 작품이 롤랑 프티의 클럽문화에 대한 향수가 엿보인다.
드디어 무대는 '막심스 클럽'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오페레타 2막의 광란의 파티장면에서 발레리나가 춤을 추는 선율이 편곡된 발레음악으로 흘러나오면서 막심스 클럽의 웨이터들의 파 드 트루아가 시작된다. 웨이터들의 현란한 베리에이션과 손동작이 재미있는 춤이다. 클럽에 도착한 요한은 신나게 놀 생각에 무척 들뜬 기분을 베리에이션으로 표현한다. 심벌즈의 박자에 엇박으로 데벨로뻬 드방을 하고, 쏘드 샤와 투르 앙레르 등 현란한 기교를 선보이는 요한의 베리에이션이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이때 웨이터로 변신한 울리히가 등장하고 벨라가 뒤따라 파티장에 나타난다. 오페레타 1막의 삼중창 선율이 흘러나오면서 요한의 혼을 쏙 빼놓을만큼 요염한 벨라의 춤이 시작된다. 벨라의 유혹에 넋이 나간 요한은 아내인 줄도 모르고 끈질기게 구애한다. 벨라는 남편의 정신줄을 쏙 빼놓은 채 다른 무도회장으로 가기 위해 마차를 타자 요한이 그 마차 꼭대기에 올라타 아라베스크 자세를 하며 아내를 따라간다. 이 작품에 출연하는 두 주연급 발레리노들은 극한 배역이다. 한 명은 박쥐가 되어 와이어를 달고 날아야하고 마차 위에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 있기까지 해야하며 다른 한 명은 계속 포커페이스를 해가며 모든 장면마다 출연을 해서 춤도 춰야하고 연기도 해야하니 말이다.
가면무도회장에 도착한 요한은 계속 벨라를 집요하게 쫓아다닌다. 이때 무도회에 참석한 코르 드 발레가 군무를 추고 두 주연급 무용수들은 연기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선이 두 무용수에게 집중이 된다. 영화나 연극에서 사용되는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곧이어 디베르티스망처럼 펼쳐지는 차르다시. <레이몬다>나 <호두까기 인형>의 러시아 춤 동작에서 차용한 동작이 눈에 띈다. 발레리나 여섯명과 발레리노 한명으로 구성된 차르다시가 펼쳐지는 가운데 차르다시 춤 복장을 한 울리히가 등장을 하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곧 차르다시 군무와 벨라의 춤이 펼쳐지면서 벨라의 팔색조 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때 울리히의 계략으로 경찰서장이 무도회장에 도착을 하고, 벨라에게 반한 경찰서장이 벨라의 지시대로 요한을 끌고간다. 요한이 지난 밤 매력적이었던 여인을 생각하며 처량하게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을 때 벨라가 형무소에 도착한다. 오페레타의 여러 반주 선율을 편곡한 음악 위에 펼쳐지는 요한과 벨라의 아름답고도 애틋한 파드 되. 하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열심히 춤을 추게 하면서 요한을 지치게 하려고 했던 벨라의 계략. 요한이 지쳐서 쓰러져 잠이 들자 벨라는 울리히가 건넨 가위로 박쥐 날개를 싹둑 잘라버린다.
발레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페레타 1막의 로잘린데와 옛 애인 알프레드의 이중창 '축배의 노래'에 맞춰 울리히와 하녀가 장난스럽게 춤을 추는 장면도 작품에 활기를 더해준다. 어쨌든 요한은 박쥐 날개가 잘려서 낙심한다. 그래도 요한이 아내 벨라와 함께 무도회장에서 비엔나 왈츠를 추는 것으로 기분좋게 작품의 끝을 맺는다.
빈 국립발레단에서도 역시 연말 레퍼토리
오페레타 <박쥐>가 송년 레퍼토리인것처럼 발레 <박쥐>도 똑같다. 2025. 11. 25일부터 공연한 이 작품은 빈 국립발레단의 연말 레퍼토리로 빈 국립발레단에는 <호두까기 인형> 자체가 없다. 연말에는 "뭐니 뭐니해도 호두를 까야지."가 공식처럼 생각에 박혀있는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충격이다. 심지어 미국도 크리스마스 시즌은 아예 호두까기 인형의 계절인데 말이다.
같은 서구 문화권이라도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이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 한다. 미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아주 큰 명절이다.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과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발레 <호두까기 인형> 관람은 거의 공식처럼 성립되어 있는 큰 연말행사이다. 이 유래가 바로 미국 발레의 아버지 조지 발란신에게서 시작되었다.
발란신은 미국에 발레가 뿌리내리는 데에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매우 잘 활용했던 안무가로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작품으로 만든 후 공연 영상을 TV로 송출하도록 했다. 그러자 TV로 방영된 발레 <호두까기 인형>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아직은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이 다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발란신의 <호두까기 인형>은 지쳐있던 미국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이때부터 미국의 크리스마스에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 빠지지 않고 큰 연말행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의 발레단들은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크리스마스 시즌에 꼭 해야하는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로열발레단만 하더라도 2024년 연말에는 프레데릭 애쉬튼의 <신데렐라>를 공연했다. 로열발레단은 피터 라이트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유하고 있지만 굳이 <호두까기 인형>이 아니어도 연말에 공연할만한 좋은 레퍼토리를 정말 많이 가지고 있는 발레단이다.
심지어 <호두까기 인형> 작품 자체를 하지 않는 유럽의 발레단들이 꽤 많다고 한다. 특히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2021년까지 <호두까기 인형>자체를 공연하지 않았다. 그래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평생 몸담았던 강수진 국립발레단장님은 <호두까기 인형>을 춤 춘 적이 없다. 역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빈 국립발레단에서 재직했던 강효정 발레리나 역시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으로 이적하기 전까지는 <호두까기 인형>을 춰본 적이 없다. 강효정 발레리나가 드레스덴 젬퍼오페 발레단으로 이적하고 나서야 비로소 <호두까기 인형>에 출연했다고 한다.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발레 <박쥐>는 롤랑 프티식의 재치넘치는 발레 마임과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유려한 춤과 기발한 안무가 교차하는 발레 작품으로 연말 레퍼토리에 정말 손색이 없다. 이렇게 굳이 호두를 까지 않아도 작품성과 재미, 발레단 재정에 도움이 되는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다면 연말 시즌에 굳이 <호두까기 인형>일 필요는 없다.
다만 그렇지 않은 발레단에게는 <호두까기 인형>이야말로 가장 큰 효자상품
<호두까기 인형>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이어서 찾는 수요가 많기 때문에 공연 기간이 비교적 길다. 공연기간만큼 발레단의 일년치 이상의 예산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호두까기 인형>을 보유하고 있는 발레단에서는 이 작품을 공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국립발레단에서는 유리 그리고로비치 안무가의 배려 덕분에 볼쇼이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의 라이센스를 공짜로 사용하기 때문에 재정에 더욱 도움이 된다.
게다가 예술감독의 눈에 든 신인 무용수들은 <호두까기 인형>의 주연으로 출연할 수가 있다. 대개 직급이 낮은 무용수들이 예술감독의 눈에 들어 주연을 맡아 출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 무용수들에게는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러면 예술감독은 이 직급이 낮은 무용수가 작품 전반을 끌고 나가는 힘이 있는지 그리고 해당 무용수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어떤지를 예리하게 관찰한 후 그 무용수를 계속 키울지 말지를 결정한다. 해당 무용수가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다고 판단이 되면 발레단측에서는 그 다음부터 지젤, 백조의 호수 등으로 해당 무용수에게 주연을 맡기는 기회를 점점 더 넓힌다.
무엇보다도 연말에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관람하기에 정말 좋은 작품이다. 아이들과 함께 이보다 더 소중한 추억쌓기가 어디 있을까. 딸아이는 일곱살 때 생애 최초 엄마랑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했던 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 역시 딸아이의 보들보들하면서도 고사리같은 작은 손을 잡고 관람했던 그 날의 온기, 다시는 돌아기지 못할 그 시간들과 여전히 아기같았던 딸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이 애틋해지고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