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조차 아닌
오늘이 가기 전에 글을 쓰고 싶다. 저녁밥을 먹은 후 오늘은 아빠와 도서관에 갔다. 가기 전에 정시원서를 넣는 이야기로, 생각보다 더 낮은 성적에 뭉뚱그리자면 서로를 진창으로 넘어뜨리는 일이 있었는데 그건 딱히 깊게 파고 싶진 않다. 이전의 일기에서 충분히 이야기한 - 물론 엄밀히 말하면 다른 이야기지만 다만 그 풍토가 같다는 말이다 - 것 같다. 오늘은 음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다. 딱히 다른 이유는 아니고, 내가 오늘 다시 들은 앨범(Getting Killed - Geese)이 좋아서 그러고 싶었다. 아 또 도서관에 가서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서를 조금 읽어보고 빌려온 일도 한몫 한 것같다.
조금 거창한 소리부터 하고 시작하자면, 나에게 음악은 타인 그 자체이자 나를 나타내는 대변인이다. 타인으로써 다가오는 작곡가/가수의 이질적인 이야기들은 새로운 사람들과 문화를 겪듯 교류하게 되고, 가사와 가사 사이의 공백, 빈 리듬의 공간들은 나의 이야기로 채워져 내 처지를 대변한다. 이 관계의 밀도를 표현하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에 이전에 한 말을 빌리자면, '오로지, 그리고 순전히 음악에 품은 깊은 애착은 내게는 아주 깊은 어딘가까지 뿌리내려있다.' 이처럼 내게 음악은 어떤 절대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음악을 나의 일부로써 수용하는 것과 별개로, 음악이 타인이든 현실이든 나에게서 동떨어진 기분이 종종, 아니 사실은 좀 자주 들곤 한다. 믿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이 이런 느낌이 들 것만 같다. 뭐랄까 나의 일부 중 핵심적인 조각으로써 받아들여지고 있는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요동치며 일정하지 못한 것을 보니, 나는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것이 타고난 기질인 것 같기도 하다. 내면으로의 침잠과 땅 속에서의 충분한 숨죽임으로 뿜어나오는 용솟음이 불규칙하고 기괴하게 얽힌 덩굴뿌리. 그런 조금 징그러운 것.
앞서 언급한 책에서 한 클래식 곡(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D장조 D850)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성한 부제는 '부드러운 혼돈의 오늘'이었다. 문단의 공백 사이의 시간에서 과거를 기억해낸 나는 지금 내가 지금 되고픈 나에 대한 실마리를 얻은 것 같다.
"요즘 들어(특히 최근 5, 6년 동안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보다 훨씬 자주 듣는다. 그 이유를 새삼스럽게 묻는다면 간단하게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결국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지니는 '장황함' 이나 '비정돈성' 이나 '민폐' 가 지금 내 마음에 친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음의 자유로운 흐트러짐 같은 것이 있다."
'의미가 없다면 스윙도 없다 - 무라마키 하루키' 중 일부
자유롭고 싶다. 불안과 혼돈, 충만함과 확신으로 어지러이 점철된 내 머릿속과 온 세상, 외피의 자취마저 모호해지는 그 혼란을 자유롭게 배회하고 싶다. 나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가. 다시 한 번 관성을 따라야 하는 것이, 역설적이지만 자유롭기 위해 가장 엄격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그것을 이루는 방법으로 보인다.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떠오르는 맹렬한 생각들과 움직이는 손의 익숙한 관성에 몸을 맡겨 글을 쓴다면,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이 정말로 맞다면, 나는 이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일부는 말이다.
가끔 나조차 놀라운 일을 할 때에 "내가 이걸 어떻게 하고 있지?" 라는 질문이 문득 생각나면 그 즉시 하던 것이 파투난다. 내가 글로써 자유롭다는 자각을 하며, 글을 쓰다가 질문이 떠오른 동시에 나는 자유에서 벗어났다. 자유를 이루기 위해선 자유를 바래서는 안된다. 자유를 이루기 위해선 자신을 구속해야 한다. 그저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준도 없이 나열하는 것이 자유가 되려면 그 무분별의 가치를 존속시킬 속박이 필요하다. 체면이나 자기검열의 구속, 사회적 선을 부정하는 것이나 그에 어긋나는 것을 작성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구속 등 말이다.
그렇다면 글을 쓰다가 멈춰 잠시 작성하지 않는 때에, 자유롭지도 구속되지도 않고 오로지 키보드를 쳐다보기도, 마우스패드를, 바지를, 아니면 손등을 쳐다보며 미세한 숨과 심장의 맥동으로 존재하는, 어떤 정적인 생(生)만이 존재하는 상태는 무엇일까.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혼돈이라고 직관에 의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직관에 반한다면, 이것은 자유이다. 과거의 '동작하는 대로 글을 쓴다'라는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 또한 구속이다. 미래의 글쓰기라는 일련의 과정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에 사로잡힌 상태. 아니면 그저, 그것조차 의미가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상태. 갑자기 내가 이걸 왜 쓰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자유에 도달한 걸까? 아, 재밌는 유튜브 동영상에 낄낄 웃는 것이던,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감정을 담아 열창하던, 내가 투영되여 목이 매여오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던, 그런 충만한 것들에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내 목 뒤에 존재하는 이 시리게 텅 빈 공간의 감각은 충만함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충만함에서 벗어남으로써 공허감이 없어졌다. 이번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졌다.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오늘의 노래
cobra - geese
죽은 우리는 마치 코브라처럼 미끄러지듯 노래에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