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펭가루 Jun 16. 2022

이승우의 「생의 이면」

  표지만 좀 더 예뻤더라면 이 책을 지금보다 일찍 읽었을텐데 아쉽습니다. 표지가 엄청 못생겼고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승우라는 작가도 처음 들어봤고 그의 작품 역시 처음 읽어봤는데 이제라도 발견하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이승우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이처럼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이제야 알게 되어 아쉽기만 합니다.

  총 다섯 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연작 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장편임과 동시에 단편이 줄 수 있는 재미를 모두 제공하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입니다. 작가는 문체와 서술 시점을 유려하게 바꿔가며 성공적으로 독자를 책 속에서 여행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주제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소설은 박부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설가의 인생을 그의 작품과 함께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평전 형식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박부길씨의 어린 시절을, 「지상의 양식」은 그의 청소년기, 「낯익은 결말」은 그의 대학 시절을 다룹니다. 작가가 살아온 인생은 그의 책에 어떤 의미에서든 묻어나기 마련이라는 인식이 기본 전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 책을 쓴 작가 이승우의 인생은 박부길씨의 인생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부길씨는 신학대학에서 대학 생활을 한 설정인데, 표지의 작가 소개를 보니 실제 작가 이승우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이승우는 작가 자신의 배경 때문인지 종교를 주요 소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책은 상당히 자전적인 소설입니다.

  박부길씨의 어린 시절을 다룬  「그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너무 슬프고, 제가 감히 경험도 해보지 못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공감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문장 하나하나에 오래되고 그리운 느낌이 들고, 외할머니 집 장롱 냄새가 묻어나는 글이었습니다. 사실은 단어 하나를 잘못 이해해버려서 차꼬를 찬 남자가 박부길씨의 아버지라는 것을 저는 그의 등장부터 예상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재미가 반감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차꼬를 찬 남자에게 건네준 손톱깎이가 그로 하여금 자살을 하게 만드는 것에서 나타나는 오이디푸스적인 아이러니와, 자신의 아버지를 '신화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찾아간 무극사에서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다시 현실의 사람으로서 기억하도록 강제하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와 달리,  「지상의 양식」은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 중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단 지상의 양식은 소설가 박부길씨가 그의 고등학생 시절을 배경으로 발표한 소설 속 소설입니다.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불우한 배경을 가진 어느 찐따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찐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찐따만큼 그를 잘 표현하는 단어가 없을 듯싶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늘 거리를 두고 경계하며, 다른 사람들도 물론 그에게 거리를 둡니다. 그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어둠을 입자로서 인식'하는 골방에 가두고 있습니다(작품 속 어둠의 의미에 대해 이승우의 문장 스타일을 빌려서 적어봅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생의 이면'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어둠'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책 속에서 어둠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주목한다면 공감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어둠은 불우한 어린 시절에서 기인하는 박부길의 과거와 내면을 상징합니다. 많은 문학작품에서 사용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어둠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그가 어둠을 '입자'로서 인식하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빛의 이중성이라는 물리학적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볼 때 입자에는 무게라는 속성이 있습니다. 겨울철 이불을 덮고 누워 있을 때, 우리는 꽤나 묵직한 솜 이불에 의해 온몸이 눌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무게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게다가 책의 마지막까지 읽으면, 그가 모든 것을 잃고 「지상의 양식」을 집필하기 위해 돌아온 곳이 바로 그 어두운 골방입니다. 박부길의 내면이 어둡지만 동시에 그가 피난처로서 인식하기도 하는 어둠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이 어둠으로 상징되는 인생의 이중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작가는 그가 어둠을 입자로서 인식했다고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읽는 내내 저는 그에 대한 연민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소설의 시작 부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일찍부터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떤 여자와의 사랑을 꿈꾸곤 했다. 꿈꾸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 나이 많은 여자와의 사랑은, 그렇다, 나에게 예감된 것이다.'. 박부길씨는  「그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 다룬 대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인생 어디에서도 아버지는 없었고, 어머니로부터의 사랑은 항상 결핍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그의 배경을 알고 나면 그가 비극적으로 예감한 나이 많은 여자와의 사랑은 그만큼 그가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비가 오던 날, 그는 총을 찬 어느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뜬금없이 등장한 성폭력에 대한 장면, 게다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남성이라는 것에 적이 놀랐습니다), 그 충격으로 쓰러집니다. 눈을 뜬 후에는 밤새 통금 시간 때문에 야경꾼에게 쫓기며 달리다 우연히 어느 교회에 들어가게 됩니다. 교회라는 성스러운 장소에는 운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를 어두운 골방에서 빛으로 인도해 줄 여인, 그가 예감한 운명적인 (동시에 비극적인) 연상의 여인. 저는 마지막 결말을 상당히 희망차다고 느꼈습니다. 박부길씨의 평전을 쓰는 화자는 자신의 미래의 배우자가 신학 대학 졸업생이길 바라는 여인을 위해 단숨에 신학 대학으로의 진학을 결심한 박부길씨의 선택을 가볍다고 말합니다. 장래를 너무 쉽게 정했고, 게다가 신을 섬기는 직업을 선택한 계기가 매우 가볍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박부길씨에게 무엇이 더 중요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이미 그녀에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전부였습니다. 꿈, 미래, 장래 그 어느 것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지상의 양식」은 저에게 인간이 태어나기를 얼마나 나약하게 태어나며, 또 얼마나 쉽게 사랑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지 말해준 소설이었습니다.

  「낯익은 결말」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재미없었던 것이어서는 안되고, 소설이 실제로 재미없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화자가 평가하는 대학생 박부길씨는 '사랑의 기술'이 부족했고, 그는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말도 못 할 만큼 부끄럽고 어리숙한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저는 저의 과거를 이곳에서 겹쳐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재미없게 느껴졌던 것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박부길씨의 그녀(종단)에 대한 사랑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성(聖) 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세상을 보여 주었다. 그녀라는 창을 통해 나는 세상을 보았다. 나는 또 그녀를 통해 신에게 이르고자 했다. ....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에 붙는 이름이 아가페라면 나의 사랑이야말로 아가페여야 했다.'. 자신의 사랑을 아가페에 빗대어 생각하는 저 문장에서부터 사실 박부길씨의 어린 마음이 비쳐 보입니다. 박부길씨는 결국 '낯익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제목부터가 상당히 저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박부길씨가 겪은 결말은 아마 어설픈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이 만났을 '낯익은 결말'이었을 터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자신의 사랑이 그 무엇보다 위대하며,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박부길씨처럼 이상한 보상심리 때문에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아닐지언정, 이별만을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을 마주한 그의 심리는 대부분의 독자의 공감을 얻기 충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사랑은 잃었지만, 그는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 덕에 지상으로 올라왔으며, 그를 괴롭히던 것들(존속살해에 대한 트라우마, 타고난 내성적 성격)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글쓰기는 기도입니다. 교회에서 눈을 감은 채 기도하며 모든 것을 토해냈던 그날처럼, 그는 글쓰기를 통해 '생의 이면'을 마주하고 남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를 잘 모르지만, 주인공 박부길씨의 인생은 어딘가 박해받는 종교인, 또는 추방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부터 내적, 외적으로 모두 가난했던 대학시절, 심지어는 꽤나 많은 소설을 쓴 중년의 지금까지, 그에게서는 왜인지 슬픈 모습이 끊임없이 보입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 그는 버림받았고, 「지상의 양식」에서는 구원받았으며, 「낯익은 결말」에서는 자기 손으로 그 구원을 저버렸습니다. 낯선 그의 인생을 읽으며 제가 슬퍼한 까닭은 그에게서 자꾸만 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낯설었지만, 그 안의 장면, 내용들은 너무도 낯익었습니다. 슬프게도 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