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군 무연탄 반출항 지정 ~ 삼척철도 개통)
1936년 11월 1일 삼척군 무연탄 반출항 지정이 삼척군 정라항에서 강릉군의 묵호항으로 결정된다. 한가한 어촌이던 ‘묵호진(墨湖津)’은 이후 1937년에는 묵호항 공사로 인한 온유비 공장 철거, 묵호항에 우편취급소 설치, 묵호항 전화 가설 운동, 묵호항 연어 대풍, 묵호항 수축 공사 기공식 거행 준비, 도계 묵호 간 삼척철도선 공사 진척, 송전 실현 등 전례없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한 해가 되며, 1937년 10월 14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733호에 의거하여 묵호항이 ‘지정항만’으로 지정되고 개항하였다.
1940년 8월 1일 삼척군 무연탄 반출항으로 지정된 묵호항에 석탄을 실어나를 삼척철도선이 개통되고, 1942년 10월 1일부로 강릉군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되면서 인구 2만 명의 커다란 읍으로 거듭나며 이후 계속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한적한 어촌 마을이던 망상면(후 묵호읍)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조선총독부의 태백 지역 석탄 개발 배경과 묵호항이 삼척군 무연탄 반출항으로 결정되는 과정에 대하여 태백시에서 발간한 『석탄과 자연 그리고 인간』(태백석탄박물관, 2003)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합방하면서 경제 관련 3대 법령인 조선토지조사령, 조선광업령, 조선회사조직령을 공포하였다. 이 중에서 조선광업령은 1906년 통감부에서 만든 광업법을 1915년에 개정한 것이며, 이어서 1918년에 조선지질조사소를 설립하고, 1922년에 연료선광연구소를 추가로 설립하여 석탄개발 활용의 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3년에는 전조선(全朝鮮) 탄전조사반을 조직, 발족시켰다. 그 후 1925년에 삼척탄전이 경제성이 있는 탄전으로 확인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지질조사소와 연료선광연구소로 하여금 태백지역을 탐탄(探炭) 차원에서 계속 조사하도록 지시를 하였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지시는 자의가 아니고 대륙침공과 전(全) 아시아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은 일본 군부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한반도 북부에서는 유연탄, 무연탄이 수요에 충족할 만큼 생산이 되었고, 일본 해군용 무연탄은 평양 탄광의 무연탄으로 충분하였으나 일본 본토로의 수송은 어려웠다. 그러나 삼척탄전은 일본과 가까운 동해안에 위치해 있어서 일본 본토로의 수송이 용이하였고, 일본 군부는 일본 본토를 요새화하기 위하여 유연탄을 사용하는 군수공장에 연기가 나지 않는 무연탄으로의 대체가 절실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5년 9월에 지질조사소, 연료선광연구소 합동조사반은 삼척의 고사리, 소달(도계)지구에 다시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이 조사는 1928년까지 4년에 걸쳐 시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의 삼척탄전의 윤곽을 제시, 확인하게 된 것이다.
1928년 탐탄(探炭) 조사를 끝낸 조선총독부는 개발 희망자를 찾았지만, 태백지역의 탄광은 매장량도 풍부하고 탄질도 우수하나, 심산유곡의 태백준령이라 교통, 석탄 운반 철도 부설이 어렵다는 이유로 일본의 대기업들이 거절하였다.
1934년에 조선무연탄주식회사가 개발 검토에 나섰으나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는 말만 하고 미루어 오다가 1935년 말에 가서야 개발 계약을 체결하고, 태백의 석탄 광구를 조선총독부로부터 양여 받았다. 그러나 개발에 착수한 조선무연탄주식회사는 개발선발대가 현지에 갔으나, 개발 착수도 하지 못하고 철수한 후 광구 권리를 조선총독부에 반납하였다. 이에 일본 군부가 직접 조정에 나서서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조선전력주식회사를 개발 기업으로 선택하도록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전력주식회사에 광구를 양도하고 조선전력주식회사는 삼척개발주식회사와 삼척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탄광 개발에 임하였다.
당시 태백의 현장을 답사하지 않고 지도만 펴놓고 결정한 일본 군부는 아주 간단하게 생각한 것이다. 태백의 탄광은 동해에서 손에 잡힐 듯한 가까운 거리에 있고, 동해의 수심은 항구를 만들기에 용이하고 탄광으로부터 운반 거리도 짧으니 위치상으로는 일본으로 수송하기에 최적의 탄광으로 보았던 것이다.
1936년 4월에 조선전력 주식회사는 일본 군부의 조선 군사령부 요원을 7월에 삼척으로 초빙하여 여름의 아름다운 동해를 감상하게 한 뒤, 고산준령의 태백의 탄광 위치를 시찰하도록 유인하였다. 이것은 태백준령 꼭대기에 위치한 탄광으로서 군부와 조선총독부의 강요로 개발을 맡았으나 사실은 난공불락 지대로 조선전력 자체의 힘으로는 개발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군부 요원을 유인한 것이다. 그것도 우기의 계절인 7월 하순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계략을 알지 못한 군부 요원은 아름다운 동해의 여름 바다에 이끌려 삼척에 오게 되고, 온 김에 전쟁 수행을 위해서 개발할 태백 탄광을 시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유인해서 군부 요원들을 데리고 오십천을 따라 서남쪽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가는 도중에 비가 쏟아졌다. 오십천은 범람하고 통나무로 걸쳐놓은 외나무다리들은 떠내려가고 없었다. 그 일행은 기진맥진한 채 3일 만에 도계를 거쳐 장성에 도착하였다. 조선전력의 이 작전은 적중하였다. 일본 군부로 하여금 태백의 현장을 확인하게 한 것이다.
현장을 다녀온 군부 요원들은 상부에 특별지원 없이는 개발이 어렵다는 보고를 하게 되었다. 이후 삼척탄광은 일본 군부의 특별지원으로 개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이때 오십천이 범람하면서 상류의 토사가 정라진으로 흘러들어 작은 어항이었던 정라진의 수위가 높아진 것을 목격한 삼척철도주식회사는 처음 부설 인가받았던 ‘정라진~도계’ 간을 ‘묵호(현 묵호항역)~도계’ 간으로 인가를 변경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묵호항이 삼척군 무연탄 반출항으로 지정되고 이후 일본으로 무연탄을 반출하기 위하여 삼척철도선 건설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당시에 묵호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것은 우리의 바람과는 무관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자원 수탈 정책의 일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묵호항이 삼척군 무연탄 반출항으로 지정되고 이후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되는 일련의 과정을 연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5. 07. 01. 조선전력주식회사 설립
1936. 03. 02. 삼척철도주식회사 정라진~도계 간 35.7km의 철도 부설 면허 취득
1936. 03. 13. 삼척무연탄개발회사(자본금 6백만 엔)와 동시에 삼척철도주식회사 (자본금 5백만 엔)
창립 총회
1936. 04. 01. 삼척철도주식회사 설립
1936. 11. 01. 묵호항을 삼척 무연탄 반출항으로 지정 발표
1937. 03. 25. 정라진~도계 간에서 묵호(현 묵호항역)~도계 간 41.7km로 부설면허 변경
1937. 10. 14. 묵호항 개항(조선총독부 고시 제733호)
1939. 05. 삼척철도 도계~묵호 간 운수업 개시
1940. 08. 01. 철암선[철암역~묵호역(현 묵호항역) 간 60.5km] 개통
1942. 10. 01. 강릉군 망상면에서 묵호읍으로 승격, 묵호읍 사무소 개소
Ⓒ『매일신보로 보는 일제강점기 묵호』(강동수 옮김), 「묵호읍(망상면) 주요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