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동로(沈東老, 1310~?)의 초명은 한(漢)이고, 호는 신재(信齋)이다. 1342년(충혜왕 3) 생진과에 합격하여 직한림원사(直翰林院事) 판성균관학록(判成均館學錄)을 거쳐 1347년(충목왕 3)에 판밀직당후관(判密直堂后官), 이듬해에 승봉랑(承奉郞)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로 전임되었다.
늙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지방 수령을 자청해서 통주사(通州使·통천군수)로 나아가 청렴하고 공명정대한 업무 처리와 간편한 행정 절차로 백성의 신임을 얻었다.
1351년(충정왕 3) 내직으로 들어가 지제고(知制誥)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헌납(獻納)에 임명된 후 특지(特旨)로 봉선대부(奉善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활동하였지만, 권문귀족들의 권력 다툼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삼척으로 돌아가기를 왕에게 간청하였다. 공민왕은 여러 번 만류 끝에 허락하면서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로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리고, 식읍을 하사하고, 진주군(眞珠君)에 봉하였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심동로는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들의 권력 독점에 따른 부정부패와 횡포 등에 대해 중앙정치의 모순과 폐단을 직시하였으며 또한 권세를 가진 귀족층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을 결심하였다. 삼척으로 돌아온 후 후학을 양성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완역 증수임영지』(강릉문화원)에 따르면 이러한 유유자적한 삶을 살던 심동로는 만년에 조정으로부터 예의판서(禮儀判書)와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치 않았다고 한다.
특히 관직을 사양한 이 대목을 두고서 어떻게 신하가 국가의 부름을 외면할 수 있느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물린 심동로의 결정을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의 인식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시 상황도 아닐뿐더러 권문세족의 횡포가 만연한 시대 상황에서 만년에 관직에 다시 나아갔더라면 청렴한 심동로의 성격으로 보아 필시 권문세족의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갔거나 억울한 죽음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차라리 고향인 삼척에서 유유자적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한다.
이러한 국가의 부름을 사양한 심동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는 장자의 글을 소개하면서 그 당시 심동로의 마음을 대변해 보고자 한다.
장자가 복수(濮水)에서 낚시하고 있었는데 초나라 왕이 대부 두 사람을 사자로 먼저 보내 말했다.
“원하건대 나랏일로 그대에게 누(累, 나라의 정치를 맡김)를 끼치고자 합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잡으며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죽은 지 이미 삼천 년이나 된 신묘한 거북이 있다고 하는데 왕은 이것을 싸서 상자에 넣어 묘당 안에 간직하고 있다고 하니 이 거북이 차라리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하고자 했겠소? 아니면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자 했겠소?”
두 대부가 말했다.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자 했을 것입니다.”
장자가 말했다.
“가시오! 나도 장차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겠소.”(『장자』 「추수편」, 김원중 역)
동해문화원에서 ‘동해의 인물’로 심동로를 선양하기 위하여 교수들과 지역학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관련 연구를 진행하여 작년에 학술 심포지엄도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지역 인물 선양과 관련하여 충실한 인물 연구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고 선양에 대한 의견이 정해지면 첫째로 ‘동해문화예술회관’ 같은 상징성 있는 건물의 명칭을 ‘신재(信齋)아트홀’(가명)로 변경하여 먼저 대중 속으로 들어가 알리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