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명승 제37호로 지정된 동해시의 자랑인 무릉계에 있는 무릉반석에는 옛날부터 많은 관리와 시인 묵객들이 남긴 암각문이 즐비하다.
그러나 몇몇 암각문은 누구의 글씨인지와 함께 글자에 대한 해석 등에 있어 여러 가지 이견(異見)이 있는 실정이다.
그 중에서 현재 아래 그림의 암각문은 『문헌‧금석문 자료로 본 두타산 무릉계』 (배재홍 저)에 실려 있는 운집용고(雲集龍苦) 외에 운집용심(雲集龍尋), 운집용고(雲集龍高), 운집용암(雲集龍巖) 등 여러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고 있고, 실제로 몇몇 이견이 인터넷상에 소개되어 있다.
따라서 필자는 한 글자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는 상황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아래 암각문의 글자를 몇몇 전문가와 기관에 의뢰하여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2020년 11월 10일부터 23일까지 한국고전번역원, 해동 한문번역원, 연당 한문번역원 등에 의뢰하여 확인해 본 결과 공통적으로 ‘운집용투(雲集龍鬪)’라는 의견을 보내왔다.
그리고 연당 한문번역원에서 보내온 내용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운집용투(雲集龍鬪)
(사방 이민족(四夷)이) 운집하면 용(龍)이 (들에서) 싸운다.
《후한서(後漢書) 광무기(光武紀)》 〈적복부(赤伏符)〉에 광무제(光武帝)가 장안(長安)에 있을 때, 동사생[同舍生, 태학(太學)에 함께 있는 학생.]인 강화(彊華)가 관중(關中)에서 〈적복부〉를 가져왔는데, 내용에 “유수가 군대를 일으켜 부도한 자를 체포하면, 사방 오랑캐가 운집해 용이 들에서 싸우다가, 사칠의 즈음에는 불이 주인이 되리라.[劉秀發兵捕不道, 四夷雲集龍鬪野, 四七之際火爲主.]”고 쓰여 있었는데, 뒤에 그렇게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유수는 광무제의 성명이고, 사칠(四七)은 한 고조(漢高祖)로부터 광무제가 일어난 초기까지 280년이 된 것을 말하며, 적복부는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말기에 참위가(讖緯家)가 만든 부록(符籙)을 가리키고, 불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한(漢)나라가 화덕(火德)을 숭상한 것을 가리킨 말이다. 『사가집(四佳集) 권2』
〈참고〉 적복부(赤伏符)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제위(帝位)에 오기에 앞서 하늘로부터 내려 받았다는 붉은 색의 부절(符節).“
이상이 필자가 확인한 내용이고, 이후 암각문의 저자 및 시대상을 비롯한 더 자세한 내용의 확인과 발굴은 이 문제에 관심 있는 학자들과 향토사학자들의 몫으로 남기며, 앞으로 더 많은 결과가 도출되어 이 문제에 대한 마침표가 찍혀지길 기대해 본다.
〈참고〉 2023년에 발간한 『강원도 암각문 [2] 동해‧삼척‧태백』에서도 필자가 제기한 내용에 대하여 석촌 이두희 선생, 장서각의 초서연구가 심영환 선생의 자문을 얻은 결과 '운집용투'로 단정한다고 하였다.